매튜 데스몬드. 뉴욕 타임즈. Americans Want to Believe Jobs Are the Solution to Poverty. They’re Not. 2018년 9월 11일. 

URL: https://www.nytimes.com/2018/09/11/magazine/americans-jobs-poverty-homeless.html

기사 번역 



미국인들은 일자리가 빈곤의 해결책이라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네사 설리번과 세 자녀들은 2015년 6월 집 앞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총에 맞아 숨진 후 그들의 마지막 거처를 떠났다. 이스트 트렌튼의 노스 클린턴 거리에 있는 바네사의 부모님 집에서 그들은 잘 곳을 찾았다. 더 안전한 동네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잘 아는 동네였다. 바네사는 집에서 그녀의 2004년 크라이슬러 퍼시피카에 우겨 넣을 수 있는 짐만 챙겨 왔다. 남은 가구는 빈대가 차지하라고 남겨 두고. 


어렸을 적 집에서 바네사는 아픈 아버지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살면서 거의 항상 마약 중독을 앓고 있었고, 날씨가 따뜻한 달에는 조경사로 일했으며 경기가 안 좋아질 때에는 실업률 상승분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죠," 아버지의 마약 중독에 대해 바네사가 말했다. "아빠는 약쟁이지만, 저희를 두고 떠나진 않았어요." 33살인 바네사는 보통 뒤로 쪽진 검은 머리를 하고, 코에 철제 안경을 걸쳤다. 그녀가 스스로를 자랑스럽다고 느낄 때이면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엿보였다. 


바네사의 아버지는 바네사가 아버지 집으로 옮기고 일 년 뒤에 사망했다. 가족들은 거실에 그를 위한 빈소를 만들었다. 한 남자가 있는 빛바라고 큼직한 사진이 쪼그라든 풍선과 조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바네사의 어머니인 제이다는 남편과 같이 푸에트리코 출신이고 62세이다. 그녀는 보행 보조기를 쓴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에게 작은 수입만을 남겼고, 바네사는 종종 돈이 없었다. 건강이 악화되자 자이다는 바네사의 아이들만 보살필 수 있었다. 1세의 탈리야, 14세의 자말, 12세의 타티야나. 만약 언성이 높아지고 아이들 중 하나가 할머니에게 예의 없게 굴면, 제이다는 바네사에게 아이들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라고 부탁하곤 한다. 


바네사에게 돈이 있었다면, 아니면 지역의 비영리기구에게라도 돈이 있었다면, 그녀는 모텔이라도 예약했을 것이다. 그녀는 '빨간 지붕 여관'을 좋아했는데, 그녀 생각엔 머물렀던 모텔 중 가장 "안락했던" 곳이었던 것이다. 이층이고 문들이 모두 밖으로 나 있는 그 모텔은 여느 고속도로 모텔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거기 머물렀을 때 바네사는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너무 시끄럽게 틀었다며 사과하는 두 남자를 지나치며 푸드뱅크에서 가져온 식료품 봉지를 들고 방으로 숙제를 가져가는 아이들을 뒤따랐다. 방 안에서 바네사는 미니 냉장고에 인슐린 약을 넣었고 아이들은 침대를 골랐는데, 매트리스 하나 당 두 명이 잘 터였다. 그런 후 그녀는 작은 의자에 앉아 말했다. "엄마가 얼마나 피곤한지 너희들은 모르지."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바네사는 샤말의 등을 문지르며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런 괜찮은 집이 있었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그녀는 스타코 마감이 된 벽을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이런! 그렇게 좋지는 않네." 바네사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벌레를 툭 쳐서 탈리야에게 날려 보냈다. 그녀는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고 뒤로 홱 움직였다. 집 안에 웃음이 가득 찼다. 


바네사가 모텔을 잡지 못할 때면 가족들은 크라이슬러 자동차에서 밤을 보냈다. 그 스테이션 왜건의 뒷자리에는 꼭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있다. 베개와 담요, 빗과 칫솔, 여벌의 옷, 재킷과 보존식품. 그렇지만 아이들의 구겨진 사진 역시 있다. 하나는 꽃을 들고 크림색 드레스를 입은 탈리야의 8학년 졸업 사진이다. 다른 사진에는 퀸시네라(15세 소녀의 생일파티를 하는 남미 문화 - 역주)에 참석한 세 아이들이 보인다. 연한 청색인 클립 나비넥타이가 아기 같은 얼굴에 둘러진 샤말이 무릎을 꿇고 앞에 앉아 있고, 보조개가 깊게 파인 미소를 짓는 타티야나가 뒤에 자리잡고 있다.


아이들이 화가 나거나 수치스러워 달아나지 않기 위해 바네사는 Route 1 도로에 주차를 하는 법을 익혔다. 그 도로는 도시의 끄트머리에 위치해서 정적이 돌고 버려진 느낌을 준다. 그래서 아무도 해가 뜨기 전에 문을 두드릴 염려가 없다. 아침이 오면 바네사는 어머니의 집으로 차를 몰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또 일에 갈 준비를 할 것이다. 


5월, 바네사는 마침내 공공 주택을 찾았다. 하지만 거의 삼 년 동안 그녀는 오늘날의 저임금/고임대료 사회에서 이제야 필요해진 말인 "워킹 홈리스"였다. 그녀는 이제 가정 요양사로 일한다. 엄마가 무릎과 허리가 나가기 전까지 했던 일이다. 그녀의 직장 유니폼은 베티 부프 수술복, 운동화, 그리고 빨간 "바야다 홈 헬스케어" 줄로 걸린 아이디 카드이다. 그녀는 몇 시간 정도 꾸준히 일하고, 자기 일자리를 좋아한다. 리프트로 환자를 침대에서 올리거나 목욕을 시키는 힘든 일이라도. "사람들을 돕는 데 익숙해 졌어요."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과도 잘 어울리고,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워요." 그녀의 임금은 그때그때 변한다. 한 환자에게는 한 시간 당 10달러를 받고, 다른 환자에게는 14달러를 받거나 한다. 일이 힘들고 쉽고 해서 급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바네사는 "어쩔 때는 제일 힘든 일거리가 제일 값이 싸기도 하죠"라고 말한다—급여와 관련이 있는 것은 일이 어떻냐가 아닌 환자의 헬스 케어 커버리지와 연관된 상환율이다. 세 아이들을 돌보고 당뇨를 관리한 후에, 바네사는 한 주에 20에서 30시간 정도 일할 수 있다. 그러면 한 달에 1200달러 정도를 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이 잘 풀릴 때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 경제가 튼튼하다는 말을 듣는다. 실업률은 내려가고 다우 존스 산업 지수는 25000 이상이며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바네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제가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요?" 같은 질문이 중요치 않다 (물론 답은 대부분 "구할 수 있죠"일 것이다). 그런 질문 대신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자.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일자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죠? 대개 답은 이렇다. 살기에 충분한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일자리. 


최근 몇십 년간, 미국은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닥 풍요로워지지 못 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두고 "생산성-임금 격차"라고 부른다. 지난 40년간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의 이익이 올랐음에도 대학 교육을 받지 않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그대로 남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1973년 미국의 생산성은 77퍼센트 증가했는데, 시급은 반면 12퍼센트만 증가했다. 만약 연방 최저시급이 생산성 증가를 따라 갔다면, 최저시급은 지금의 빈궁한 7.25달러가 아닌 20달러는 족히 넘을 것이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거대한 이윤을 일구는 데에 기여했음에도 그것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다. 주된 이유는 노조의 쇠퇴이다. 20세기 동안, 노조 조직화가 늘어났을 때 미국의 불평등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노조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변화는 조직화된 노동을 무력화시켰고, 기업의 이익 추구를 대담하게 만든 동시에 일반 대중의 권력을 앗아 갔다. 이러한 불균형적 경제는 왜 지난 수십 년간 1인당 복지 지출이 늘었음에도 미국의 빈곤율이 꾸준하게 유지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사회 안전망 프로그램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복지 프로그램은 수백만의 가족들을 매년 빈곤선 위로 끌어 올리고 있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반빈곤 대책 중 하나는 벌이가 괜찮은 직업인데, 그러한 일자리는 바네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 거의 미국 전체 노동력의 삼 분의 일을 차지하는 사천백칠십만 명의 노동자들은 한 시간에 12달러도 채 못 벌고 있고, 그들의 고용주 대부분은 건강 보험을 제공하고 있지도 않다. 


미국 노동통계청은 "워킹 푸어"를 적어도 일 년에 절반을 일하거나 직장을 찾는 빈곤선 아래의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다. 2016년, 거칠게 추산해 760만 명의 미국인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대부분의 워킹 푸어는 35세 이상인데, 5% 미만은 16-19세이다. 달리 말해 워킹 푸어는 식료품 가게에서 물건을 종이 가방에 담거나 아이스크림을 퍼 담는 십대들이 아니다. 워킹 푸어들은, 호텔 샤워장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음식 주문을 받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정육점에서 치킨을 해체하고, 24시간 데이케어 센터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과일을 따고, 쓰레기 통을 청소하고, 한밤 중에 식료품점 찬장을 정리하고, 택시나 우버를 운전하고,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고, 고속도로 아스팔트를 깔고,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물론 식료품을 종이 가방에 담고 아이스크림을 퍼 담는 성인들이다(그리고 그들은 대개 부모들이기도 하다).


미국은 경제적 이동이 자유로운 나라임을 자랑스러워 한다. 미국에서 삶의 기회는 오직 당신의 용기와 야망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노동 시장에서의 변화는 원래 적었던, 평사원에서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더욱 축소시켜 놓았다. 예로 들자면, 노동시장은 이중화되어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의 거리가 늘었다. 만약 고용주들이 사다리를 걷어 올리고 관리직을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열어 놓는다면,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는 것은 승진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대기업들이 많은 일자리 직위를 다른 하청 업체에게 맡기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 사무실 바닥에 광을 내거나 쉐라튼에서 시트를 빠는 사람들은 보통 마이크로소프트나 쉐라튼에 고용되지 않고, 회사 안에서 승진할 기회가 없음에 좌절한다. 여기에 더해 예측하기 어려운 일자리 스케줄 때문에 사실 더 긴 시간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선택지로 주어져 있지도 않다. 거의 40%의 풀타임 노동자들이 노동 스케줄을 한 주나 그도 안 되는 시간 전에 통보받는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고등학교 졸업장이나 그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 일자리는 그렇게 오래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새로운 직책의 절반이 1년 안에 사라지니까. 노동사회학자 아르네 칼레버그(Arne Kalleberg)에 따르면, 영구 해고는 "고용주의 구조 조정 전략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홈 헬스케어 일자리는 지금의 새로운 저임금 서비스 경제의 전형적인 일자리로 부상했다. 인구가 노령화되며 가정 내 헬스 케어의 수요는 급증했지만, 노동통계청의 최신 자료에 따르면 2017년의 홈 헬스케어 노동자의 연소득 중위값은 그저 23,130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노동자들 절반은 겨우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공공 부조에 의존한다. 바네사는 몇 명의 복지 대상자들과 친해졌는데, 그들에게 그녀는 자신이 홈리스라고 털어 놓았다. 한 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 이런, 뭐라도 좀 도와주고 싶네." 바네사가 일자리 감독관에게 상황을 설명했을 때, 그는 혹시 그녀가 타임 오프를 원하는지 물어봤다. "아뇨!" 바네사는 말했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고, 남는 일 시간을 채우곤 했다. 감독관은 그때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서랍을 열고 그에게 50달러짜리 셸 주유 카드와 100달러 짜리 숍라이트 식료품점 카드를 내밀었다. 바네사는 도움에 감사했다. 그녀는 바야다가 관대하고 동정적인 회사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임금은 그녀가 일하던 삼 년 동안 그렇게 오르지 않았다. 바네사는 9815달러를 2015년에 벌었고, 12763.94 달러를 2016년에 벌었고, 10446.81 달러를 작년에 벌었다. 


연방정부는 바네사의 가족이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 년에 29,420달러가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바네사는 거기에 가깝지도 않지만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는 운이 좋은 편이다. 미국의 사회안전망은 이제 근로소득세액공제(현재 노동 중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현금 정책) 같은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노동자를 강력히 선호하고 있다. 지난 해, 바네사는 5000 달러 정도의 세금 환급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근로소득세액공제와 아동소득공제가 모두 포함된다. 제도들은 그녀의 소득 상승에 도움을 주었으나 빈곤선을 넘을 만큼은 아니었다. 만약 바네사의 경우와 같이 워킹 푸어가 논워킹 푸어보다 더 잘 산다면, 이는 그들이 일자리 그 자체를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빈곤층들이 절실히 원하는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이 고용되어 있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빈곤선 아래서의 불평등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불러 왔다. 워킹 푸어는 버려진 논워킹 푸어나 극빈으로 빠지게 된 불안정 노동자들보다 좀 더 많은 사회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 


가난이 특별히 사무칠 것 같을 때, 바네사는 중학교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던 셰리 스프라우스에게 전화를 종종 걸곤 한다. "셰리는 저와 비슷해요," 바네사는 말했다. "강하거든요." 셰리는 감정적 지지를 잘 해주고 판단에 균형감이 있어서 자주 친구들에게 인내심을 주고, 친구들은 그런 셰리를 고마워한다. 그러나 셰리도 두 딸을 고정 장애 수표[fixed disability check]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이다. 그리고 셰리의 집이 연방정부 바우처로 보조받고 있기 때문에, 이는 관리된다. "[제도의 조항] 8항 때문에, 같이 살 사람들을 구할 수가 없어요," 바네사는 말했다. "그래서 그것 가지고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 바네사가 홈리스였을 때, 셰리는 바네사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말고는 그다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바네사는 작년에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 막내인 타티야나가 학습장애 때문에 보족적 소득 보장[SSI]을 받은 것이다. 바네사는 장애인 보조금으로 매달 766 달러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서 카운티의 사회서비스 위원회가 바네사의 이런 추가적 소득을 알았기 때문에, 위원회는 바네사에게 그녀의 보족적 양육 보조 프로그램의 수혜가 544 달러에서 234 달러로 줄어들 것임을 통지하는 편지를 보냈다. 식량은 꾸준한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이것은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다. 옥스팜 아메리카의 2013년 연구에 따르면 이 분의 삼의 워킹 푸어들이 충분한 식량을 부담할 수 없다는 것에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바네사가 호텔에서 머물렀을 때,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전자레인지에 돌릴 수 있는 것들뿐이 없었다. 그녀 차에서 잠을 잘 때면 가족들은 그냥 조리된 레토르트 식사들을 먹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은 보통 비싸기 마련이다. 가끔 바네사는 식품 잡화점에 들러 15 달러에 치킨 쌀 요리를 주문한다. 가끔 아이들은 배고픈 채로 등교한다. "전혀 먹지를 못 했어요," 어느 아침 바네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녁에 그녀는 푸드뱅크에 들르려고 했다. 샤말이 좋아하는 맥앤치즈가 아직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미국에서 일을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그러니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일을 열심히 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 중추에 존재하는 생각이다. 18세기 버지니아의 농장주였던 윌리엄 버드는 "참을 수 없게 게으르고" "아이들 돌보는 것 외에는 나무늘보처럼 게으른" 빈민들에 대해 글을 썼다. 토마스 제퍼슨은 "일 없고 방종하게 지내며 시간을 낭비하는" 부랑아들을 구빈원에 가두는 것을 옹호했다. 20세기로 넘어가면, 배리 골드워터는 교육을 적게 받은 미국인들이 "낮은 지능이나 낮은 야망"을 드러낸다고 했으며, 로널드 레이건은 "복지 여왕(welfare queens)"을 비난했다. 2004년, 빌 오라일리는 빈민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너희들은 무책임하며 게으르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가난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신사 숙녀 여러분." 


미국인들은 빈민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들을 한다. 미국 기업 연구소(공화당의 정책 연구 기관 - 역주)에 의해 진행된 2016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거의 2/3의 응답자들이 대부분의 빈민들은 정규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2016년에 장애가 없는 노동할 수 있는 연령의 성인들 대부분이 노동력의 일원이었다. 삼 분의 일을 약간 넘는 응답자들은 복지 수혜자들이 생계를 꾸리는 것보다는 복지에 의존하는 쪽을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가정은 미국적 현상이다. 사회학자 오페 샤론(Ofer Sharone)의 2013년 연구는 미국의 실업자들이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반면, 이스라엘의 실업자들은 고용 시스템을 비난한다고 밝혀 냈다. 미국인들이 담요를 뒤집어 쓴 홈리스를 볼 때 우리는 보통 그가 어떻게 실패했을까 궁금해한다. 만약 프랑스인들이 같은 사람을 본다면, 그들은 어떻게 국가가 그를 실패시켰는가를 궁금해한다.


만약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해답은 일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일하게 하는 것, 즉 사람들로 하여금 어디라든지 일할 수 있는 만큼 출근부를 기록하게 만드는 것일 테다. 하지만 바네사를 생각해보자. 그녀의 사연은 좀 더 거대한 문제를 상징하고 있다. 즉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안전과 편안함에 대한 희망은 거의 없는 채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최근 수십 년간, 미국은 저임금만을 제공하고 혜택은 없으며 확실성도 거의 없는 나쁜 일자리들의 부상을 목격해왔다. 빈곤에 관한 한 일하고자 하는 의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일 자체도 더이상 해답은 아니다. 


18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서양에서의 빈곤은 지속 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을 위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초기 근대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경제 이론인 중상주의는 굶주림이 일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임금을 낮게 유지한다고 보았다. 구호 대상자들은 감금되고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받았다. 현재 시대에는 정치인들과 대중들이 노역과 땀을 빈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1980년대 보수주의자들은 푸드 스탬프에 노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고자 했다. 1990년대에, 그들은 보조금으로 주택을 짓는 프로그램에 노동 조건을 붙이기를 요구하고 있다. 두 제안 모두 실패했지만 그러고 싶은 충동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복지 수급에 노동 조건을 붙이는 것의 옹호자들은 1990년대 중반에 복지 개혁에서 기록에 남을 승리를 거두었다. 의장 뉴트 깅리치에 의해 주도되고 하원 공화당원들에 의해 제안된, 또 빌 클린턴 대통령이 법에 사인한 복지 개혁안은 현금 부조에 시간 제한과 노동 조건을 붙였다. 복지 취급 건수는 1996년 1230만 건에서 450만 건으로 줄어들었다. "복지에서 노동으로" 정책은 사실 작동하는가? 빈곤을 줄이고 번영의 씨앗을 뿌리는 데에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나? 별로 그렇지 않다. 캐서린 에딘과 로라 레인이 그들의 중요한 책 "Making Ends Meet"에서 보여주었듯이, 싱글맘들은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몰아 넣어지고 있으며 노동시장은 복지에 의한 것보다 더 돈을 많이 벌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또한 싱글맘들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나 교통 수단에 더 많은 지출을 쓰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적당한 수입을 무효화시킨다. 가장 성가신 것은 가장 필요한 수급자들에게 현금 부조를 보장하지 않았을 때 미국의 극한 빈곤이 급등했다는 것이다. 한 명당 하루에 2 달러나 그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수는 복지 개혁 이후 적어도 두 배 이상 올랐다. 거칠게 추산해 삼백 만 명의 아이들이—이는 시카고의 인구보다 많다—지금 이러한 상황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그 아이들 중 상당 수가 일 년 중 때때로 일을 하는 어른들과 함께 산다. 


트럼프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미국의 가장 큰 사회안전망 프로그램 몇 개의 노동 조건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1월에 연방 정부는 메디케이드 수급자에게 노동을 요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열두 주들은 메디케이드 프로그램에 노동 조건을 붙이기 위해 연방 면제 규정(federal waiver)을 공식적으로 신청했다. 네 주는 이미 승인이 되었다. 6월, 아칸소 주는 새로운 노동 조건을 시행하는 첫 주가 되었다. 만약 모든 주가 아칸소 주처럼 메디케이드에 노동 조건을 규정한다면, 무려 사백 만 명이나 되는 미국인들이 건강 보험을 잃게 될 것이다. 


4월,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 기구들이 보족적 영양 부조 프로그램에서 주택 보조까지의 복지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새로운 기준을 제안하라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보족적 영양 부조 프로그램이 이미 몇 개의 요구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6월 하원은 신체가 건강한 성인들이 한 달 동안, 한 주에 적어도 20 시간을 (직업 훈련 같은) 노동 관련 활동에 참여하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보족적 영양 부조 프로그램의 혜택을 일 년 전체 동안 삭감하는 농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의 농업법은 초당적 노력을 통해 이러한 규칙과 냉혹한 페널티를 삭제했는데, 이는 트럼프가 승인한 하원의 법안과 일대 결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의회의 예산국은 노동 조건 규정이 120만 명의 사람들이 식사하는 데 쓴 혜택을 삭감시킬 수 있다고 추정했다. 


다른 프로그램의 노동 조건 역시 비슷한 요구를 한다. 켄터키 주에서 제안된 메디케이드 조건안은 매달 일이나 일과 관련된 훈련을 80시간 이상 받아야만 충족된다. 자꾸 바뀌는 노동 시간, 보잘것없는 고용과 비자발적인 파트타임 노동이 특징인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취약한 노동자들 대부분은 위 조건에 미달한다. 미국 전역을 대표하는 수입과 프로그램 참여 설문조사 데이터는 메디케이드를 지원한 노동자들 중에서 50%만이 적어도 한 달 동안은 80시간보다 적게 일했다고 보여 준다. 


7월, 백악관 경제 자문위원회는 전국 최대 규모의 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노동 조건을 열렬히 지지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노동 시장의 노력에 대한 원조를 막는 "부정적 인센티브"를 선호했고, 저소득층 노동자의 세금 혜택과 같은 "긍정적 인센티브"를 깎아 내렸다. 왜냐하면 전자가 좀 더 싸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또한 미국의 복지 정책이 "자급자족의 감소"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과연 사실일까? 연구자들은 복지 의존에 대한 연구를 그 이슈가 공적 토의를 지배했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추진했다. 연구자들은 많은 근거를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거나 이혼 이후에 현금 복지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다시 주기적으로 복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실업 수당에 그렇게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한 연구는 90%의 복지를 받는 젊은 여성들이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후 2년 안에 수급을 중단했지만, 대부분은 미래 언젠가 다시 복지를 받는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것이 한창 때일지라도 복지는 대부분의 수급자들에게 의존의 함정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그들이 일자리를 구하거나 가족의 위기 이후에 사람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언스 지의 1988년 리뷰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복지 제도는 일시적인 불행에 대한 보험으로 작용하므로 복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이 가능한, 가난하고 일이 없는 성인들은 희귀한 것으로 남아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 빈곤층의 1/3은 어린이들이며, 11%는 장년이고 24%는 노동하는 연령(18세에서 64세)이었다. 노동하는 연령대에 속하고 노동 시장과 연결되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다수는 파트타임 노동자들이다. 대부분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 못하는데, 바네사처럼 가족을 돌볼 책임이 있거나 고용주가 더 일할 옵션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 경우 그들은 비자발적 파트타임 노동자라 불린다. 남은 노동하는 연령대의 성인들 중에서는, 12%가 장애 때문에 노동력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었고 (노동을 제한하는 연방 프로그램에 가입한 사람들 포함), 15%는 학생이거나 돌보미고 3%는 이른 은퇴자였다. 이러면 범주에 속하지 않는 2%의 가난한 사람들이 남는다. 즉, 가난한 사람들 중, 2%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노동 시장과의 연결이 끊긴 일하는 연령대의 성인이라는 것이다. 놀고 먹는 일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은 선거 사기와 비슷하다. 실제 생활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나 보이는 천민들인 것이다. 


바네사는 바야다에서 일하지 않을 때면 아이들을 쫓아다닌다. 바네사는 샤말을 제일 걱정한다. 샤말은 키가 180cm는 족히 넘는데, 그 덩치는 동네에서 샤말을 도구이자 타겟이 되게 했다. 작은 아이들은 그들이 말썽쟁이나 깡패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좀 큰 아이들은 그를 위협으로 본다. 작년, 샤말은 싸웠다는 이유로 두 번 정학당했다. 바네사는 벌로서 샤말의 소중한 아프로 머리를 밀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아이들의 돌발 행동을 좀 더 큰 맥락에 놓는다. "이 거리에 우리가 나앉아 있을 때 아이들 행동은 어떨가요?" 그녀는 좌절감 속에 내게 물었다. 한번 샤말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외부인들은 "아마도 내가 마약을 판다고 생각할 것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전 그냥 사람들 웃기고 노는 것 좋아하는 쿨한 사람이에요." 샤말은 셰프가 되고 싶어했다. 바네사는 만약 그녀가 샤말에게 경찰의 전자발찌를 붙여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추적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샤말은 그 생각을 좋아했다. "만약 제 친구들이 저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싶어할 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요," 그는 내게 말했다. 즉, 그 발찌가 친구들이 그에게 위험한 길을 가자고 꼬실 때 물러서기에 좋은 핑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샤말과 타티야나의 아버지는 최근에 트렌튼으로, 바네사가 기억하기로는 "떠돌이들이나 쓰는 가방을 들고" 다시 옮겼다. 변덕스러운 양육비 지급과 와 척 E. 치즈[피자 체인점]로 한번 데려가는 것 빼고는 그는 아이들의 삶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탈리야의 아버지는 그녀가 1살일 때 감옥에 갔다. 탈리야가 8살일 때 아버지는 풀려났고, 그리고 몇 달 뒤 가슴에 총을 맞아 숨졌다. 가끔 바네사의 세 아이들은 서로 아버지를 운운하며 놀리곤 한다. "너 아빠 죽었어," 타티야나가 이렇게 말하면, "그래? 네 아버지 살아 있어도 뭐 해주는 것도 없잖아" 하고 탈리야가 받아친다. 


그러나 다른 때에 아이들은 아버지의 부재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서로 가볍게 안심시킨다. "아빠에게 쓸 시간이 없었어," 한때 탈리야는 마치 그것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나 된양 말했다. "내 진짜 친구들에게는 시간이 있어." 탈리야는 그녀의 막내 여동생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봐. 만약 착하게 굴면 아빠가 다시 돌아 오겠지."


바네사가 몇 시간 더 일을 했다면 지금처럼 그녀 가족을 관리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빨래를 하고, 치과 방문 약속을 조정하고, 섹스에 대해 아이들을 카운슬링해주고, 아이들의 재능은 뭐고 불편은 뭔지 깊게 고민하고. 하지만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아이를 돌보는 것을 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곤 한다. 복지 개혁의 초창기에 몇몇 지자체는 복지 수혜를 받는 싱글맘들을 위한 쓸데없는 일들을 고안해 냈다. 한 극단적인 사례에서는, 수급자들은 작은 플라스틱 장난감을 각기 다른 색으로 분류하도록 되었다. 그 일이 끝나면 감독관이 다시 장난감들을 섞어버리고, 다음 아침에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게 아이들을 보호하고 먹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병들거나 죽어 가는 부모를 돌보는 것도 역시 일로 인정되지 않는다. 바네사는 아버지의 입에 비둘기콩밥[푸에르토 리코 요리]을 떠먹였고, 그의 약을 다시 채우고 요강을 비웠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일들을 바야다 노동자의 자격으로 사실상의 외부인들에게 할 때에만 그녀는 "일"을 하는 것이 되고 그때야 고려 사항이 된다. 에블린 나카노 글렌이 2010년 책 "돌보도록 강제되다Forced to Care"에서 말했듯이 산업화는 미국 가정들이 점점 임금에 의존하게끔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여성들에게 속했던 과업(가사, 요리, 돌봄)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소명"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글렌은 다음과 같이 쓴다. "남성의 임금을 받는 노동과 다르게, 여성의 무임금 돌봄은 동시에 귀중하고 가치 없는(priceless and worthless), 그러니까 화폐화되지 않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들이 풀타임으로 모성애의 이상에 맞춰 살 수 없기 때문에, 가난한 유색 인종 여성들은 결격이 있는 엄마나 돌보미로 보이곤 한다."


바네사는 그녀가 학업에서 부진했던 것—중학교 때는 좋은 학생이었으나, 고등학교 때 수업을 빼먹고 문제를 일으켰다—의 원인을 그녀의 부모님이 떠났다는 사실에 돌린다. 바네사가 지도와 훈육이 필요했던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는 약을 했고 어머니는 항상 일을 하는 듯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바네사의 삶은 다음과 같은 작은 루틴을 따라 돈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 놓고, 일하고, 한 달에 천 달러보다는 임대료가 적은 아파트를 찾고, 아이들을 다시 데려 오고, 밥을 먹이고, 자는 것. 그녀는 돈을 담배나 술 포함해 다른 것들에 쓰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가 말하길 "내가 갖고 있는 이 작은 돈이라도" 아끼고자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집을 찾으면, 아이들에게 수건과 타월을 가져다줄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아마 바네사 같은 수백만의 워킹 푸어의 존재가 게으름과 빈곤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여러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이 여러 집단적 반발의 힘에 의해 시들어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효과적인 공식에 압도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늘어나는 정치적 양극단화와 처방받는 약들의 가격이 오르는 것, 도시의 스프롤 현상이나 다른 많은 사회 병리 현상에 대해 확신에 차 할 수 있는 설명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지 우리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우리는 바로 빠르게 임시변통의 설명을 내놓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국가적 수치가 너무 엄청나서 견디기 힘든 것이 될 터이다. 어떻게 빈곤율이 라트비아, 그리스, 폴란드, 아일랜드, 그리고 OECD의 다른 국가들보다 높은 국가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일까? 바네사의 존재 자체는 일종의 판결이다. 하지만 이것을 설명하고 책임지려는 것 대신에,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을 탓함으로써 역할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 


여기 청사진이 있다. 첫째, 노동을 가난에서 벗어나는 티켓으로 간주하고 돌봄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공식적 직장이 없는 싱글맘을 보고 그녀가 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싱글맘을 찾아내고, 더 일하라고 요구해라. 사랑을 게으름인양 다뤄라. 다음으로, 빈민들로 하여금 그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노동 시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쓰도록 해라. 그렇다면 당신이 그들에게 돈을 덜 써도 되고 병가나 건강 보험을 보장하지 않아도 될 것임을 확신해도 좋다. 근로소득 세액 공제 및 푸드 스탬프와 같은 프로그램에 돈을 대는 미국 납세자가 곧 개입할 것이다. 빈곤율이 정체하는 동안 복지 지출이 증가하는 것을 지켜보라. 이제 당신은 유리한 패를 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사회 안전망 자체를 비난함으로써 책임을 져라. 그리하여 정치가들은 빈민들의 구호에 비현실적인 노동 조건을 붙이는 것처럼 가족들의 구호를 부정하는 새 방법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원들은 공화당원들이 주장하는 노동 조건들을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원들은 아직, 이렇게 비열한 정치를 조장하는 지금의 빈곤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에 도전한 적이 없다. 자유주의자들은 '받을 만한 자격이 되는 것'(deservedness)이라는 미국의 도덕적 수사에 반대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대신 일반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심지어는 저임금 일자리를 빈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원조라면 대중들이 그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며 그것을 포용하기까지 했다. 진보적 운동에 충실한 사람들조차도 경제적 번영을 풀타임 노동자들에게만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한때 그를 보러 온 민주당원들의 긴 줄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주 40시간이나 일하는 사람이라면 빈곤에 처해 있으면 안 된다." 그렇다. 하지만 바네사와 같이 20시간이나 30시간 일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보수주의자들이 빈곤 논쟁의 언어들을 정하는 것을 리버럴들이 허용했기 때문에, 지금 리버럴들은 (일자리 보장 정책jobs guarantee 같은) 완전고용 국가나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포스트노동 사회를 꿈꾸는 급진적인 해법에 대해 논쟁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이 중 어느 계획에서도 조만간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다는 아주 희미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바네사와 그녀 같은 수백만에게 좋지 않다.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유토피아적 해결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빈곤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한다. 식량을 구할 수 없고 집값을 댈  수 없으며 실직 상태에 있는 가족들을 돕는 사회안전망 프로그램은 매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빈곤선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SNAP (The 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은 그 자체만으로 8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매년 빈곤에서 끌어내고 있다. 2015년의 연구에 따르면 연방 세제 혜택 및 이전이 없이는 깊은 빈곤 상태(빈곤 기준치 절반 아래)에 머물고 있는 미국인의 수가 5퍼센트에서 거의 19퍼센트로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효과적인 사회 이동성 프로그램이 옹호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붙어 있는 끔찍한 노동 조건이 제거되어야 한다. 


워싱턴은 더 취약한 노동자를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워싱턴은 고용주들이 생활 임금이나 고용 안정을 고용주들에게는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일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복지가 아닌 가난한 일자리인 노동 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 빈곤 문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연방 및 주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네사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시청 사람들의 절반은 트렌턴에도 살고 있지 않아요," 바네사는 한때 허둥지둥대며 나에게 말했다. "그들은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죠." 한편, 이 동네의 의회는 기록상 가장 부유한 의회로, 13명의 의원 중 한 명이 1% 부유층에 속한다. 그런 높은 지위에서는 빈곤이 덜 골치 아프고 작은 문제로 보이고, 노동이 뭔가 만족스럽고 가장 큰 해결책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줄여야 해결책이 같이 줄어든다. 거대한 문제에 작은 해결책들만을 적용하면 효과가 없다. 그리고 약한 빈곤 퇴치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그냥 그 문제에 대해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싸구려 해법은 문제의 격을 떨어뜨리기만 할 뿐이다. 


이번 달, 나는 매사추세츠의 한 대학에서 1학년 우수 학생들과 저녁을 먹었다. 몇몇은 우파였고 나머지는 좌파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어떻게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곤궁의 책임을 묻지 않는 방식으로는 빈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뜻이 같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윤리가 없어요,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러려는 근성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한 학생이 "The Pursuit of Happyness"라는 영화—윌 스미스가 홈리스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 초인적으로 직장에서 노력하는—를 꺼냈을 때 술이 없었다는 사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 학생은 상원의원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 참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 젊은 친구가 자신을 윌 스미스와 동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그의 부모님이나 목사들, 선생들, 카운슬러들이 동기 부여를 위해 "공부 열심히 하고, 충실히 살고, 꿈을 크게 가져야 성공한다"고 말한 것이 그의 인생관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는 빈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빈곤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말한다.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국에서는 누구도 빈곤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면 된다. 누구든, 혼자 힘겹게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이든, 이전에 복역했던 범죄자든, 젊은 헤로인 마약 중독자든, 연금을 낭비하는 퇴직한 버스 운전수든 빈곤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열심히 노동하는 것을 존중한다면, 물론 그것을 보상할 일이다. 노동의 가치를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커져 가는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정당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금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열심히 일했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바네사 역시, 지금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오기까지 열심히 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