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글] 고프먼, 『상호작용 의례』
따라서 애덤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에서 지적한 대로, 개인은 자기의 관심사, 느낌, 흥미를 다른 사람들이 몰입할 만한 가장 효과적인 이야깃거리로 구사해야 한다. 또한 상호작용자로서 개인의 의무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기대에 공감하고 호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라고 요구할 권리와 균형을 이룬다. 상대의 능력과 요구를 감안해 말하는 사람은 표현의 수위를 낮추고 듣는 사람은 관심의 수준을 높인다. 이 두 경향이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사람들은 상호몰입으로 교감하는 대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세상을 밝혀주는 것은 바로 이런 불꽃이지 너무 뻔히 보이는 사랑 같은 것이 아니다.
— 어빙 고프먼, 「상호작용에서의 소외」, 『상호작용 의례』, 진수미 옮김, 아카넷, 2014, 126-7쪽.
행동이 있는 곳(where the action is)을 찾다보면 세상의 낭만적인 영역에 다다른다. 한쪽에는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 있다. 집이 있고, 일터에서 잘 관리하는 역할이 있다. 반대쪽에는 개인의 자기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온갖 활동들이 흘러가버릴 한 순간에 자신을 던지라고 부추기는 전선과 장소가 있다. 바로 그 대비가 모든 상업적 공상물의 원천이다. 비행청소년, 범죄자, 도박꾼, 운동선수들은 그 대비로부터 자존심을 찾는다. 아마도 우리가 치르는 비용은 그들이 연출하는 의례를 이용하는 대가일 것이다. (…) 세상의 한끝에서 이런 자아의 작은 경련이 적나라하게 벌어진다. 그 세상의 한끝이 바로 행동과 성격이 있는 곳이다.
-- 어빙 고프먼, 「행동이 있는 곳」, 『상호작용 의례』.
아래는 세미나에서 쓴 쪽글들
고프먼, 「체면 지키기」, 「존대와 처신의 성격」 쪽글
단상
1. 고프먼의 두 논문을 읽고 생각난 것. 고프먼은 상호작용의 목적 혹은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표현적 질서(expressive order)의 변화와 같은 측면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상호작용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 질서의 측면에 매우 주목한 듯하다. 이런 점에서 고프먼의 작업은 사회적 질서가 그 세부 단위의 작용들로 유지되는지를 밝히고자 한 구조기능주의자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책 15쪽의 역자 주석에서 고프먼은 미시 수준(즉 사회적 만남)의 구조를 분석 단위로 삼았다고 하는데, 고프먼 연구의 기능주의적 특성은 그의 분석 단위가 미시적 상호작용의 구조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싶다.
2. 고프먼의 연구는 민속방법론을 택했다고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특정한 집단 내의 사람들이 형성하고 공유하는 생활세계 내지는 의미망을 탐구하는 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두 개의 논문을 읽어본 바, 방법에 대해 논문이 명시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연구 자료를 모으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관찰인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기술(記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고프먼은 미시적 상호작용의 구조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얼마 간 보편성을 획득한다. 책의 55-6쪽을 보면 이는 명확하다.
3. 「존대와 처신의 성격」은 흥미로운 텍스트인데, 왜냐하면 이 텍스트의 본문에서는 정신병동의 관찰을 연구 데이터로 삼아 의례의 두 가지 기초 성분인 존대와 처신을 분석하고 있는 한편, 결론 부분(99-103쪽)에서는 의례가 지속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제시하는 한편 세속적 서구 사회에서 자아의 성스러움에 대한 일반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들이 소임을 다하고 사라졌지만 개인 자신의 신성은 엄청나게 중요해졌고 견고하게 남아 있다. … 어떤 경우든 개인은 의례적 조심성을 가지고 대해야 할 신성한 존재다.”(103쪽) 그런데 이는 바꿔 말하면, 신이 제자리를 잃은 근대 사회에서 개인은 더욱 신성해졌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 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의례(ritual)로 개념화하고 분석이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속적이지 않은 전통 사회에서 고프먼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4. “체면(face)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동안 그들이 짐작하는 노선대로 자기를 표현하여 얻게 되는 긍정적인 사회적 가치라 정의할 수 있다. 체면은 개인이 남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사회적 자질을 지닌 존재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아 이미지인 셈이다.”(18쪽) 그런데 논문을 읽어가다 보면 체면의 용법이 위의 개념 정리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체면까지 확장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고프먼, 「당혹감과 사회조직」, 「상호작용에서의 소외」, 「정신이상 증상과 공공질서」 쪽글
1. 당혹감과 사회조직
- “감추는 사람과 감춰주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연기에서 당혹감은 재산 침해의 경우와 똑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또한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111) 여기서 ‘재산 침해의 경우’라 함은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당혹감은 우선 잘못된 처신 등으로 인한 자아 이미지의 잘못된 투사로 비롯된다(115).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정의된 당혹감의 발생이란, 앞선 논문 「체면 지키기」에서 설명하는 ‘체면이 없는(be out of face)’ 상황(20)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체면이라는 분석 개념 이외에 당혹감이라는 개념을 설정한 데서 어떤 이점을 얻을 수 있을까? 체면의 경우 상호작용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를 참여자 중 누군가가 어기게 된다면 다른 참여자들은 그것을 지켜주려고 하거나 무시하려는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당혹감 역시 상호작용의 질서를 어느 정도 교란하고, 다른 사람들도 당혹감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려는 움직임을 일으키게 된다. 없어진 혹은 망가진 체면과 달리 당혹감은 상호작용의 필수 요건이 아니며 당혹감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당혹감이란 조직 안에 생태계로 조성되어 있는 셈이다.” 118-9쪽) 상호작용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당혹감은 체면과 어느 정도 구분되지만 비슷하기도 한 것 같다.
- 당혹감의 사회적 기능: 당혹감은 사회적 행동규범을 깨뜨리는 것이 아닌 질서를 지키는 행동인데, 왜냐하면 당혹감은 (지금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 자신이 안정되고 통합된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신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119-20). 흥미로운 기능적 설명(functional explanation)이다. 그런데 “어떤 문화권에서든 대면 상호작용에 꼭 필요한 자질이 있고, 당혹감이 그 자질을 망가뜨리는 것 같다”(109)고 고프먼이 썼을 때, 그리고 과도한 당혹감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것을 봤을 때(111-2) 꼭 당혹감을 질서를 지키는 행동으로 볼 수 있을까?
2. 상호작용에서의 소외
- “상대로서는 [거만한 태도를 지닌] 그들이 지나치게 자주, 길게, 이야기하고, 분수에 넘칠 정도로 두드러진 ‘생태적’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보인다.”(132) 여기서 생태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사회적 상황을 은유하는 단어로서 쓰인 것일까?
3. 정신이상 증상과 공공질서
- “집합행동을 전공한 사회학자들은 … 공공장소에서 평화롭게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교류규칙의 구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공장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켜야 할 규범적 요건들이 있다. 벽이나 창문처럼 단순한 물리적 경계선을 의사소통의 경계선으로 바꿀 것, 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기는 했지만 지나친 호기심의 대상은 아닌 듯 서로를 세련된 시민적 무관심으로 대할 것, ….”(157, 강조는 본인)
여담이지만 강조한 부분을 읽고 고프먼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어쨌든 각설하고, 고프먼이 제시하는 상호작용의 규칙들은 뒤르켐이 말한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처럼, 행위자들의 의식이나 행동 이전에 존재하는 규범들 같다. 그렇다면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임무는 일상 행위자들이 체화하고 있지만 명시적으로 나타내지는 못하는 그런 규칙들을 명문화하고 체계화하는 데에 그치는 것일까? 이러한 규칙들은 언제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하는가? 또한 우리는 이러한 규범을 어떻게 학습하는가?
고프먼, 「행동이 있는 곳」 쪽글
“위험한 행동은, 대개 영웅주의에 결부된 기회를 몽땅 상실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영웅적 품행과 비슷한 도덕적 이점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위험한 행동에는 또 상당한 대가가 따른다. 개인이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삶의 한 영역에서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에 참여한 대가를 나머지 삶에서 치르도록 정교하게 계산해놓은 상업화된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액의 요금만 치러도 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277-8쪽)
“우리가 운명적 사건을 대리소비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거기에는 분명 사회적 기능이 있다. … 이런 동일시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온전히 지키려면 대가가 너무 크고 위험한 운명적 활동의 품행 코드가 명료해지고 재확인된다.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일상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는 준거틀이 보장되는 것이다.”(282쪽)
“명예가 높이 평가되고, 체면 지키기에 삶을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사교 세계에서 유행하는 도덕성은 빠르게 변하고 남성성으로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증명하려는 행동의 중요성 또한 점차 줄어들 것이다.”(273)
* 위의 인용구들에서 얘기하는 것. 이는 근대 세계의 합리화 경향과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와 행동이 시작될 때, 그것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문젯거리). 다만 행동을 피하고, 그 시비를 공권력을 빌어 법적으로 해결한다면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것이 되고 안전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정도 행동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1) 행동을 영화, 문학 등으로 ‘대리만족’하거나, (2) 비교적 눈에 잘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행동이 제도적 틀 안에서 안전하게 일어날 수 있는 카지노 같은 곳으로 향한다.
(작업걸기making-out에 대해. 현대 사회에서 운명적 사건 혹은 행동은 심대한 신체적 훼손을 피하고 나머지 삶을 아예 결정지을 수 있는 사후영향은 배제하도록 제도적 틀 등에 포섭되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데이팅 어플도 그러한 류인 것 같다. 클럽이나 길거리에서의 작업걸기는 확실히 사후영향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 그럼에도 우리가 운명적 사건을 대리소비하는 것의 사회적 기능을 파악하는 고프먼의 통찰은 흥미로웠다. 실제로 그런 지는 따져봐야 하겠지만…
* 266-8쪽에 등장하는 바의 피아노 연주자에게 시비거는 비행 청소년들은 행동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행동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즉 판돈은 무엇일까? 주변 비행 청소년 친구들에 대한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