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기억에 남는 구절들 

1/ “그에게 분화된 사회란 체계적 기능, 하나의 공통 문화, 교차하는 갈등 혹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권위에 의해 통합된, 이음매 없이 매끈한 총체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는 ‘자유로운 활동’ 영역들의 총체를 말한다.”(61쪽)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이성은 역사적 산물이지만 매우 역설적인 산물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떤 조건들, 즉 합리적 사유를 위한 제도적 토대를 보호하기 위해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함으로써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만 하는 조건들 아래서는 역사를 ‘벗어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106쪽) 
-> 이는 111쪽에서 로익 바캉이 해명하는, 부르디외가 사회에 대한 숙명론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사회의 지배구조와 그 재생산의 역사에 대해 더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과 공명한다. 사회는 어떤 괴물처럼 움직이는 권위 하에 복속된 공간이 아니다. 이를테면 예술 장과 과학(학문) 장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학문 장의 자율성은 과학의 성격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단히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한에서만 보장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즉 이성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주의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cf. 104쪽).

2/ “저항이 소외시킬 수도 있고 순종이 해방시킬 수도 있다. 그것이 피지배자의 역설이며 그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71)
-> 부르디외가 보기에 ‘사회학의 쓸모’는 행위자들을 자유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점에서 행위자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108쪽 각주 90번). 사회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은 아주 기가 막힌 역설이라고 항상 생각을 해왔다. 사회학이 선사하는 자유는 물론 어떤 제도적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사회학이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로 이끌고 무엇이 해방으로 이끄는지 확정적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학은 사람들을 자유의 환상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도덕적 행위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을 규명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한다.”(107)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학은 공화주의적 덕성을 갖는 시민들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실마리를 줄 수 있다(109쪽). 

3/ “그러한 시각[사회적 행위에 대한 신비화된 시각]은 도구적 행위와 표현적 혹은 규범적 행위 사이의 인위적 경계에 집착하며, ‘무사무욕’한 듯 보이는 행위자들을 이끄는 다양한 형태의 숨겨진 비물질적 이윤을 인정하지 않는다.”(74쪽) 
-> 이는 앞선 인용 — “[장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는 ‘자유로운 활동’ 영역들의 총체를 말한다.”(61쪽) — 과 관련이 있다. 부르디외의 장 개념은 사회 세계를 정말로 다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것을 너무 복잡하지 않게, 구조주의적/구성주의적 접근의 이중주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부르디외의 접근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규범적 구조주의와 갈등주의 사이의 대립은 허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