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 “마찬가지로 동일한 계급에 속하는 하비투스들의 구조적 친화력은 ... 서로 수렴하며 객관적으로 조율되는 실천들을 생성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 집합 행동이나 집합 반응처럼 RAT에게 극복할 수 없는 딜레마를 제기하는 현상들을 설명한다.” 

합리적 행위 이론(RAT)의 가정을 받아들일 때 집합 행동(시위), 자발적 협력 등은 설명 불가능한 현상이 된다. 실제로 많은 합리적 행위 이론가들은 이러한 딜레마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를테면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하비투스가 장에서의 게임의 감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하비투스는 장 내 행위자들 사이의 무의식적으로 조율되는 실천을 생성한다고 말한다. 부르디외는 합리적 선택 이론이 애초에 목적론이었기 때문에, 합리적 선택 이론의 패러다임 안에서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라며 자신의 이론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듯하다. 한데, 하비투스에 의해 실천이 거의 ‘자동적으로’ 조율되며 이것이 무임승차가 아닌 시위, 자발적 협력, 신뢰 등의 현상을 낳는 경험적인 예가 어떤 것들이 존재할까? 


2/ “하비투스의 최초 경향을 통제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성찰적 분석은 우리에 대해 상황이 행사하는 잠재적 힘의 일부를 바로 우리가 부여한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그러한 분석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변경하게 만들고 ... 반응을 변화시키도록 만들어 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위치와 성향의 즉각적인 공모 관계를 통해 작동하는 일부 결정 요인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조정하게 해준다.” (232쪽) “바캉: 당신은 또한 말하기의 사회적 능력이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는 ‘언어적 공산주의의 환상’을 비난한다.”(245쪽)

부르디외 사회학의 비판적/해방적 측면이라고 하면 위 인용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위의 인용한 부분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부분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은 부르디외가 내내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인식 자체가 사회학을 사회학의 분석에 놓이도록, 지식인 역시 사회학의 분석 대상이 되도록(“호모 아카데미쿠스”) 하기 때문이다. 

한편 부르디외의 해방적 기획은 하버마스의 것과 조금 다르다. 뒤의 245쪽 인용 이후에서 부르디외는 특히 오스틴이 발화행위의 사회적 성격과 제도를 분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고 있다. 즉, 배에 이름을 붙이는 발화행위에 효과를 부여하는 ‘힘’은 사회적 실재, 즉 “발화하는 사람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창조하는 일정한 관계”(249)에 의해 주어진다. 따라서, 부르디외에게 있어 사람들이 동등한 이성을 가지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하버마스의 이론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이데올로기나 외부적 강제, 폭력 때문에 언어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언어 행위의 불평등은 우리들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상징폭력 때문인데, 이러한 상징폭력은 누구의 말이 정당하고 귀기울여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정하기 때문이다. 

3/ “온갖 형태의 ‘은밀한 설득’ 가운데 가장 가차 없는 것은, 아주 간단히, 사물의 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설득이다.”(279) 

위의 인용구는 상징폭력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서 가져왔다. 왜 현재의 분류 체계와 도식이 실제 피지배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피지배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루카치나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의 조종(manipulation)이나 국가 기구(apparatus)의 음모 때문일까? 부르디외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적 음모론(?)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상징폭력에 놓여 있고, 현재의 상징 체계=주어진 사회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세계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