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출간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를 모두—로저 페더러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읽었다. 그의 에세이는 정말로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 그는 청탁받은 글의 주제와 상관없는 것을 말한다. 혹은 더 나아가서 말하면 안 될 것에 대해 말한다. 이를테면 한 미식 잡지에서 돈을 받고 미국 플로리다의 랍스터 축제에 대해 취재한 글(“랍스터를 생각해봐”) 에서 동물의 고통과 육식의 윤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예시 하나에 불과한데, 어쨌든 이것은 아주 대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보통 편집자가 누군가에게 잡지에 실을 글을 청탁할 때 그는 내심 자기가 받았으면 하는 글의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할 말을 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작가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한 미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월리스를 훌륭하다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청탁받은 글을 아주 장황하게 써 낸다. 일례로 (역시 돈을 받고 간) 크루저 여행에 대해 쓴 글은 국문으로 180여 페이지가 넘는다. 다른 예로는 미국 영어 용법(usage) 사전에 대해 쓴 글이 국문으로 100여 페이지가 넘는다. 이것도 역시 대담한 일이다. 왜냐하면 잡지에 글을 실을 때에는 분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분량을 맞추는 일에 대해서만 편집자들이 상당한 정력을 소모하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많은 학술 저널들은 정해진 분량을 넘겨 원고를 투고할 때 투고자에게 돈을 엑스트라로 더 받는다. 어쨌든 그는 이중의 의미에서 편집자에게 성가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좋은 글들은 본질적으로 잡지에 실리기 애매한 종류의 것들이다. 기본적으로 잡지란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서 존속해야 하는데, 좋은 글들은 필연적으로 잡지의 수익성과 배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글들은 잡지의 정해진 분량(이를테면 200자 원고지 40매)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제한된 지면에서 말해야 할 것들을 모두 말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여기서 (청탁을 받는) 작가들은 두 가지 선택지에 직면한다. 그냥 그런 글을 써냄으로써 잡지와 공생하거나 뚝심 있게 밀고 나가거나. 생계 등의 여러 문제 때문에 후자를 선택하는 작가들은 드물다. 어쨌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드문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어제 그의 글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을 읽으며 감탄했다. 이것은 사실 한 용법 사전에 대한 서평이지만 글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월리스에게 글을 청탁한 잡지는 이 글의 게재를 거부했다. 어쨌거나 따로 번역출간된 글을 읽는 입장에서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고 대단한 것은 월리스가 이 방대한 글에서 서평의 목적(독자들로 하여금 “당신은 이 책을 사겠습니까?” 하고 묻기)을 뛰어넘는 다양한,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주제들을 건든다는 것이다. 몇 가지만 들자면 그는 일단 이 글에서 오웰의 글 “정치와 영어(Politics and English Language)”에서의 통찰들이 여전히 유효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언어 사용에는 사실 (그것으로 인해 얻어질 공적 이익과는 별개인) 자기 표현의 욕구와 구별짓기의 동기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함과 동시에, 민주적 사회에서 전문가가 가져야 할 윤리 내지는 덕목을 근사하게 예증한다. 이 글만이 아니라 여기 실린 거의 모든 글이 다 중요하지만 서로 이질적인 주제를 하나의 중심 소재를 바탕으로 섬세하게 엮어낸다는 점에서 글을 읽으면 압도적 감탄이 들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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