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tness

2020. 12. 22. 21:42

한때 게임 중독 소년이었다. 많은 남자 아이들이 그랬듯 게임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또래 친구들과 조금 달랐던 점은 온라인 게임 대신 다른 패키지 게임을 즐겼다는 것 정도일 테다. 다양한 게임을 접하는 데에 있어서 일종의 욕구불만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플레이했다. 대략 2006년에서 2012년 사이 발매된 PC 게임은 어떤 식으로든 접해본 것 같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나름대로 머릿속에 나만의 베스트 게임 탑 리스트가 있었다. 어떤 독자적인 비평적 견해를 가졌다기보다는 당시 평론가들과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게임들 중에서 내 기호에 맞았던 것들을 적당히 추려낸 것에 불과했던 것이지만. 떠올려보면 2010년대 초반 당시 스토리가 좋다는 등의 이유로 명작으로 추앙받던 게임들이 몇 있었고--이를테면 포탈이라든가 바이오쇼크, 폴아웃 3--그 게임들이 훌륭하다는 점에 당시의 나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게임을 플레이한 후 네이버 블로그나 루리웹 등 인터넷 사이트에 산재한 게임 줄거리에 관한 해석들을 참조하며 게임의 스토리를 음미하고는 했다.

당연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 했던 게임들의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유튜브에서 바이오쇼크 영상을 봤는데 그 게임의 세부 요소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는 점에 적잖이 놀랐다. 아마 하프라이프나 포탈도 마찬가지로 기억이 안 날 것이다. 글을 쓰면서 잠시 떠올려봤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망각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시간이 흘렀다는 당연한 사실일 것이지만, 오직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젠가부터 전통적인 형태의 선형적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임들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었다. 소위 명작 게임이라고 하는 것들이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그리 진지한 문제에 대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 같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떤 유(類)의 게임 자체에 대해 내가 흥미와 관심을 잃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억도 안 나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지금 떠올려 보건대 당시 플레이했던 게임들의 이야기에는, 화려한 치장 속에 감춰진 빈곤함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바이오쇼크 말미의 반전처럼 당시 흥행한 명작 게임들의 스토리는 분명히 잘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에는 좋은 할리우드 영화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익숙함이 있다. 여러 명의 팀으로 이루어진 능숙한 시나리오 라이터들이 짠 이야기들은 나름대로의 시사점과 비평할 거리, 그리고 재미와 흥분을 가져다주지만 그것뿐이다. 이러한 막연한 느낌은 수능을 마치고 나서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플레이했을 때 갖게 되었다. 수능 준비 기간 동안 특별히 게임을 하지 못했기에 나름대로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여러 역사적 소재와 그를 통한 은유, 그리고 양자역학이나 평행세계라는 재밌는 아이템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대단원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럴싸한 오락에 불과한 것이라 느껴졌다. 어떤 레시피(흥행 공식)의 적용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뒤로 PS4에서 라스트 오브 어스를 플레이하고 나서 그 막연한 느낌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감동을 느낀 게임이 있었다면 레드 데드 리뎀션 2인데, 위에서 열거한 게임들과 크게 다른 게임은 아니지만 연출이 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메인 스토리 과정을 다 마친 다음 무언가 더 하고 싶지는 않았고, 이내 PS4를 팔았다.

게임에 대해 흥미를 서서히 잃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재밌게 플레이했고 기억에 남는 게임이 하나 있다면 조나단 블로우(Jonathan Blow)의 위트니스(The Witness)이다. 여가 시간을 보내며 오락거리를 하는 데에 나름대로의 가치관이라고 할지 관점이 세워진 뒤 접한 컴퓨터 게임 중에서 실제로 흥미를 길게 느끼게 된 것은 이것뿐이다. 문명도 하고 다른 인디 게임도 이것저것 해봤는데, 대부분의 게임은 말초적 재미마저 없었다(그 중 최악은 언더테일이었다). 반면 The Witness는 그 자체가 감탄스러운 하나의 체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