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주파수를 맞추기: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 Bill Evans: How My Heart Sings』 서평 

 

빌 에반스를 좋아해 최근 개정판이 출간된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 Bill Evans: How My Heart Sings』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죽 생각했던 것이 있다. 바로 음악을 듣는 것과 어떤 음악가에 대한 책을 찾아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어떤 아티스트에 대한 팬심을 넘어 수고로이 음악가에 관한 책을 구해 읽는다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사실 이는 바로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테면 모두들 재즈를 진지하게 감상하지는 않는다. 그저 카페 배경 음악 역할로 귀를 편하게 하는 속성을 좋아하는 데에 그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아티스트를 좋아한다 해도 그 아티스트의 작품에 바쳐진 평문(評文)을 굳이 찾아보는 청자는 드문 것 같다. 그것은 어떤 곡의 가치가 해설자의 권위나 훈련받은 청각이라는 제3의 매개체를 거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인 것일까? 

흥미로운 점은 에반스가 여기서는 ‘훈련받지 않은’ 감상자의 편에 선 것 같다는 것이다. 관습적이지 않은 보이싱과 코드로 자신의 연주를 엄격히 건축하고자 했던 에반스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 음악의 아름다움은 ‘저절로 드러나는’ 듯하다. 에반스는 교육용 비디오 <빌 에반스의 보편적인 심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난 평범한 사람들의 견해가 직업적인 음악인의 것보다 음악을 판단함에 있어서 덜 타당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난 종종 직업적인 사람들보다는 감수성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에 더 귀를 기울이는데, 그 이유는 직업적인 음악인들은 음악의 메커니즘에 늘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순수한 감정을 지키기 위해 이에 맞서야 한다”(376). 

나뿐만 아니라 에반스의 연주를 좋아하는 재즈에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도 여기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비밥 시절’이나 『California Here I Come』에서처럼 ‘스윙한 연주’보다는) 조용하고 서정적인 그의 피아노 터치에서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감명을 얻는다. 한데 그렇다면 빌 에반스의 음악에 대해 (에반스 본인이 쓴 것이 아닌) 전문 피아니스트의 해설이라는 도움을 받을 필요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재미있게도 또 앞의 진술과는 상반되게도 책의 몇몇 대목에서 에반스는 본인이 청중을 향해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도 한다. “나는 직업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다시 말해 난 청중이 없는 곳에서 연주하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는 점이다. 의사소통하는가 혹은 하지 않는가는 내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훈련과 집중력을 통해 나의 자아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401).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로서 스타일에 관해 부단한 노력과 혁신을 꾀했다. 

이는 기묘한 역설이다. 그는 대중을 향하는 듯하면서도 사실 대중을 염두에 두고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대목을 들자면, 에반스는 이렇게 얘기했다. “재즈는 결코 집단적으로 호소력이 있는 음악이 될 수 없다. 내가 청중에게 준 것은 내 스스로에게 연주한 것과 다르지 않다”(421). 그의 음악이 온전히 그 자신을 향해 있다면, 그의 앨범 제목마냥 그의 연주가 사실 ‘자신과의 대화(Conversations with Myself)’에 지나지 않다면 빌 에반스를 진지하게 듣는 것은, 그의 음악에 전기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과 함께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내성(內省)이 코드 진행, 보이싱, 스케일의 적절한 선택과 혁신 같은 전적으로 음악적인 것들에 집중되었음을 볼 때, (에반스의 말을 따른다면) 일반적인 청중이 그를 듣고 그의 연주로부터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보았을 때 청중들이 에반스의 연주를 듣고 호소력을 느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된다. 피아노에 조예가 깊지 않을지라도, 재즈 연주에 대한 그의 신념과 마치 승려 같은 자기반성과 연습 과정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를테면 『Moonbeams』 앨범의 「Polka Dots and Moonbeams」과 같은 그의 가장 센티멘털하고 관습적이고 감상적인 연주일지라도, 저자의 표현을 빌면, “그때도 마치 누군가가 경청하고 있는 듯 연주된다”(268).

‘빌 에반스를 감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숙고하기를 이끄는 이런 역설에 관해 저자의 서술은 눈여겨 볼만하다. “초기 서정주의가 형성된 이후, 에반스는 자신의 내적인 성찰로 자연스럽게 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 그의 연주가 강하게 표출될 때조차도 그는 스스로에게 열중한 듯 보였다. 무엇보다 우선했던 그의 생각은 자신이 만족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며, 그 길 가운데서 청중과 만남이 이뤄지길 기대했던 것이다”(244). 

‘그 길 가운데서의 청중과 만남’이라는 구절을 잠시 곱씹어본다. 같은 쪽의 재즈 평론가 휘트니 발리엣의 표현처럼 에반스는 “완벽하게 개인적이며 내면의 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픈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의 당연한 욕망이자 삶의 지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의 감상은 에반스 본인 혹은 동료 피아니스트가 아닌 이상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진심은 그것이 아무리 자신만이 아는 언어로 씌어진 것일지라도 전달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 안에서 그러한 음악이 발견되었다는 환희를 표현하고픈 강렬한 욕망” 같은 것들. 사실, 그는 무대 중에서 말하기를 꺼리고 청중들의 박수가 방해된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다음 구절에서 보이듯 그는 ‘가장 재즈적인 것’을 매개로 한 청중과의 소통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순수주의자이다. “재즈의 위대한 전통이 사멸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청중들의 지배적인 태도는 피아노 독주자를 그들의 대화나 저녁 식사 뒷편으로 밀어 넣고 있다”(424). 

그렇다면 피터 페팅거가 표현한 ‘빌 에반스와 만날 수 있는 어떤 길’은, 잠시 라디오의 은유를 빌려 보자면,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진심은 저절로 전달되기도 한다. 「My Foolish Heart」의 그 수줍은 터치처럼. 그런데 「Five」의 (누군가는 재치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해하고 변칙적인 박자나 여러 차례 연주되고 녹음된 「Nardis」의 판본들의 차이에서처럼 음악과 자아에 관한 에반스의 절실한 고뇌가 결정화되어 있는 곡들은 그 진심을 놓치거나 종종 잘못 전달받을 수도 있다. 에반스의 마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평생 절실히 추구했던 어떤 피아노 연주의 이상(理想)에 먼저 공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마음이 전달하고자 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을 피아노 연주라는 노랫말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이 노래를 부르는 방식(How my heart sings)일 것이다. 다만 이를 왜곡 없이, 깨끗하게 받아들이려면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빌 에반스의 생애와 연주에 대한 피터 페팅거의 서술은 ‘빌 에반스와 만날 수 있는 어떤 길’을 찾는 데에 중요한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에반스의 삶과 가족 관계에 대한 서술이 물론 존재하지만 그것이 가십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연주와 내면 세계와의 관련 하에서만 제시된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그의 삶의 중요한 결절점에서 우리는 재즈 피아노 연주를 대하는 그의 구도자적인 태도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를테면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이 연주하며 “난 연주에 대한 나의 관점을 뒤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팀의 일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정진하게 된 대목이라든가(112). 

저자가 피아니스트인만큼 음악 구성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들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종종 있기는 하다. (바꿔 말하면 피아노를 연주하고 음악을 악기와의 연관 하에 더욱 깊게 듣는 사람들은 이 책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전문 용어가 나올지언정 에반스가 녹음한 트랙들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피터 페팅거의 서술은 탁월하다. 개인적으로는 302에서 304쪽까지의 『Conversation with Myself』 앨범의 오버더빙과 멀티트랙 녹음에 대한 묘사를 듣고 이 앨범을 다시 진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빌 에반스의 가장 유명한 트리오만 알고 있었던 청자들은 토니 베넷이나 짐 홀과의 사이드 프로젝트나 펜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를 쓰는 기획에 대한 에반스의 여러 접근들을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을 통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에반스의 녹음들에 대한 그의 자료 수집은 탁월하고, 많은 대목에서—비록 과하게 전문적일지라도—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재즈 애호가로서 그의 비평은 빛을 발한다. 

단순한 레코딩 이력에 대한 지식을 쌓기보다, 책을 읽어나가며 「Some Other Time」이나 「Nardis」, 「My Romance」와 같은 에반스가 즐겨 연주했던 곡들의 판본 사이 강조점들의 차이를 견주는 것도 에반스가 전달하려는 무엇인가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설의 트리오로 남은 스콧 라파로와 폴 모션과의 트리오가 사고로 해산하게 된 후 다른 여러 음악적 동반자(베이스스트 고메즈라거나 드러머 존스라거나)를 만난 과정들에 대한 서술들 역시, 그가 재즈에 대한 차분한 열정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어떤 시도들을 해나갈 수 있었는지 느끼게끔 해준다. 

절반 이상 책을 읽어나가며 독자는 다음 문장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추상적이거나 은밀한 음악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난 그저 나의 음악적인 개념을 연주할 뿐이다”(421). 물론 그의 음악은 어떤 전문성이나 대단한 비평을 요구할만큼 ‘추상적’이거나 ‘은밀’하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내성적 감상이 항상 촉각할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정의 내리기 어려운 너무도 개인적인 영역”, “그 사람의 ‘색깔’과 정서적인 울림”(498-99)을 파악하는 데에는 주파수를 맞추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피터 페팅거의 전기는 그 진동을 적절히 조절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