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개정판, 문학동네)에 실린 단편 「오후의 마지막 잔디」를 읽고. 

원래는 『반딧불이』의 「헛간을 태우다」까지 포함해 쓴 글이지만. 수정했다. 




1. 가라타니 고진은 구니키다 돗포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풍경의 발견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남을 지적하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풍경이 범람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소설의 내러티브와 별 상관이 없는 재즈 레코드나 록 음악을 마치 리스트를 만들듯 나열하거나, 주제와는 무관해 보이는 화자의 정서나 주변 풍경을 구체적인 상품 브랜드 등의 고유명사를 자주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라타니는 이것이 단순한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의 소설이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해 문학이 가져야 할 어떤 의식이나 책임을 방기한 내면으로의 침잠이다(「무라카미 하루키의 풍경」). 그런데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러한 내면의 침잠은 근대문학이 역사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과정이다. “정치 소설이나 자유 민권 운동 쪽을 향하던” 문학 운동이 “그 대상을 잃어버리고 내부를 향했을 때 <내면>이나 <풍경>이 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하루키의 데뷔 년도는 1979년이다. 부동산 버블에 힘입은 것이지만 일본은 1980년대에 엄청난 성장을 기록했다. 일본의 이러한 성장은 한국전쟁 이후로부터 계속된 것으로, 중간에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가 있었지만 사실상 전후 일본은 계속 성장만을 거쳤다고 생각해도 괜찮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에 일본 경제가 미국 경제를 따라잡을 가능성도 있겠다는 세간의 진단이 존재했다. 플라자 합의(1985)는 미국이 일본에게 추월당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하에서 미국의 세계 패권 재수립을 위한 시도로 나타난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를 두고 “그들[근대문학가]이 부정적 자세로든 도피적인 자세로든 고집하고 있었던 대상[역사 혹은 자본주의의 부정성]이 급격히 소멸되었다”고 말한다(「무라카미 하루키의 풍경」).


비슷한 것을 일본의 문예평론가인 가토 노리히로도 지적한다(『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가토는 하루키 문학의 핵심은 부정성의 부정—즉 긍정성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근대문학의 핵심은 부정성, 예컨대 자본주의적 불평등에 대한 부정, 전쟁과 같은 폭력에 대한 부정인데, 하루키는 그것을 부정하고 긍정성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한데 다시 가라타니의 논의로 돌아가자면, 하루키의 긍정성 내지는 대량소비사회 ‘풍경의 발견’이 전적으로 일본의 경제적 발전에 의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가 대량소비사회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라타니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 그 흐름을 바꿈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풍경의 ‘발견’이다.


일본 안보 투쟁과 전공투 운동(=부정성)의 실패의 흔적이 하루키의 소설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주인공이 집착하는 물건이나 당시의 문화적 아이콘과 같은 사소한 소품들과 한데 모여 동일하게 취급된다는 것에 있다. 하루키의 ‘풍경의 발견’은 문학이 다뤄야만 하는 대상들을 마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양 능청스럽게 레코드나 비디오 테이프, 미국 페이퍼백들이 모여 있는 잡동사니 바구니에 같이 넣어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제스처의 맥락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루키의 스타일을 차용한 작가들은 그저 페스티쉬를 행했을 뿐이다. 적어도 가라타니의 논의를 유의미하게 받아들인다면 하루키가 조장하는 소비문화는 유해한 것이며 골빈 대학생들이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모 노쇠한 평론가의 주장이 무의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하루키의 단편소설에서 등장하는 풍경의 범람과 내면에의 침잠을 살펴보자. (하루키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학생이라든가 정규직 직원, 가난하지 않은 작가인 것은 앞서의 논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가라타니는 『1973년의 핀볼』을 두고 그러한 결론을 내렸지만 그러한 경향은 하루키의 거의 모든 단편에 나타난다고 보아도 좋다. 실제로 2015년 발표한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도 그의 단편 스타일은 별로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세계와 부딪히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조정하고 세계 속 자아의 위치를 정립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을 성장소설이라고 할 때, 풍경의 범람과 내면에의 침잠은 소설에서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거의 모든 하루키의 단편소설은 일인칭의 시점에서 전개되며,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이른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능동적이고 능청스런 회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들 기억의 저울에서 비틀즈의 해체와 베트남 반전운동은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일인칭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소설이 대개 회상의 구조로 전개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오후의 마지막 잔디」) 중요한 것은 일인칭 화자의 말하기 혹은 소설 쓰기 행위가, 적극적인 기억의 복원과 세계의 사건들을 나의 맥락과 사회의 맥락에서 다시 의미화하는 것과 무관하다면 소설은 주인공의 내면과 주관을 중심으로 닫힌 구조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하루키 소설의 적극적인 사회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정리했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어떤 풍경의 발견으로 명명하고 그의 소설을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문학이 처할 수밖에 없는 흐름 속에서 검토한다. 사실 그러한 인식의 부재나 무관심 자체가 교정되어야 하는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평의 영역에서만 유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의 단편소설에서 풍경의 범람과 내면에의 침잠이 빚어내는 결과와 기능이다.


사회에 대해 침묵하고 등을 돌린다고 해도 성장소설적 기획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그런데 좋은 성장소설들은 대개 사회적 사건들에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풍경의 범람'은 사회적 사건에 대한 무관심 이상을 의미한다. 소설 주인공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의 문제들—주로 연애와 관계맺음에 대한—은 화자의 내면적 인식의 틀 안에서 일부 삭제되고 협소해진다. 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연한 관계맺음과 그것의 끝 내지는 실패들은 주인공 개인의 내면 바깥으로 객관화되지 않으며 성찰이 아닌 회고의 영역에 머무를 뿐이다. 「헛간을 태우다」에서 '나'는 여자아이와 헤어진 후 이따금 당시를 회상할 때 흥미롭게도 관계의 대상인 여자아이가 아닌, 의미가 없는 기호인 불타는 헛간만을 기억한다.


소설적 장치의 기능들에 대해 말하자면 내면과 정경의 묘사는 하루키의 단편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우연성—개연성의 부재—의 처리에 일조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안에서 충분히 그 내적 개연성이 해명되지 않는 우연한 사건들은 나 자신의 짧은 논평으로 처리된다. 어떤 점에서 소설이란 해명되지 않는 내면의 의식을 컨텍스트와 엮고 응답하는 과정임에도 말이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오후의 마지막 잔디」) 폴 매카트니나 빌 에반스, 요한 스트라우스, 짐 모리슨 따위의 고유명사들은 제멋대로로 보이는 서사와 화자의 내면 상태를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정서’로 환원시켜 독자들을 납득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에서 위에서 설명한 하루키 단편소설의 특징이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잔디」는 집 근처의 중학생을 바라보며 나의 십사 년 전을 회상하는 식으로 시작한다. 십사 년 전 ‘나’는 잔디를 깎았는데 이는 당시의 여자친구에 대한 회상으로 이어진다. 여자친구와는 그해 여름에 헤어졌고 여자친구가 없으니 돈을 벌 이유도 없어 ‘나’는 잔디 아르바이트를 접는다. 사장은 일주일만 더 일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뒤 소설의 내용은 마지막 잔디깎기 아르바이트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 잔디 깎기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기 위한 의식처럼 등장한다. “나는 다시 한번 잔디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 마지막 일이었다. … 그 슬픔에는 헤어진 여자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다”(161쪽).


그러다가 갑자기 잔디 깎는 집 주인이 딸아이의 방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주인은 딸아이의 방을 보고 딸아이에 대해 무언가든지 추론해볼 것을 권유한다. 딸아이의 방에서 나는 헤어진 애인을 생각한다(168-9쪽). 그 뒤의 딸아이에 대한 ‘나’의 추론은 명시되지는 않지만 사실 헤어진 애인에 대한 회고로 읽어도 좋다. “문제는… 그녀가 여러 가지 것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한다는 거예요. 자기 몸이나, 생각이나, 자기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들이 요구하는 것… 그런 것들에요.”(170쪽). 잔디 깎는 집 주인이 딸 아이의 방을 보여준 우연한 사건을 경유해 나는 의도치 않게 이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와의 실패한 관계에 대한 자각은 타인의 귀띔에 의해 이뤄진다. 우연히 자각과 성찰의 기회가 주어지며, '나'는 과거의 관계와 그것의 실패를 현재 자신의 언어로 다시 의미화한다.


잔디 깎기가 끝난 후 차의 좌석에 깊숙히 몸을 묻은 후 비로소 실패한 관계에 대한 단서의 실마리가 생각난다. “‘너는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겠지만,’ 애인은 그렇게 썼다. ‘나는 내가 그 대상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173쪽). 물론 소박하게도 나의 성찰이 수렴하는 곳은 주관의 폐쇄회로이다. “내 바람은 잔디를 꼼꼼하게 깎는 것뿐”이라고 나는 애써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의 끝은 역시 관계 자체가 아닌 잔디 깎기에 대한 생각으로 끝이 난다. 중요한 것을 짐짓 중요하지 않은 척 도피하려는 이러한 제스처는 앞에서 살펴본 풍경과 조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