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시학

— 제임스 테이트 시 읽기 



우리는 누군가가 우스꽝스럽게 되고, 조롱받거나, 심지어 치욕스러운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웃지 않는다. 


대신에, 한 현실이 느닷없이 모호한 상태로 드러나고, 사물이 자기 본연의 명백한 의미를 잃으며,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웃는다. 자, 이게 유머다. 

— 밀란 쿤데라[각주:1]



1


제임스 테이트(James Tate)의 시를 읽는 것은 약간의 당혹감을 동반한다. 그 당혹감은 내용과 형식 둘 다에서 발생한다. 우선 형식에 대해 말해보자. 테이트의 시를 읽을 때 설핏 느껴지는 당혹감은 우선은 형식에서 비롯한다. 테이트의 시들은 아주 파격적이고 대담한 형식을 시도하지는 않지만, 간단히 말해 테이트 시의 형식은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산문시. 테이트의 시는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내용에 대해서는? 테이트의 시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 일상이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식으로 전개된다. 이는 첫 번째로 우리 주변의 일상도 그것이 곧바로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옴과 동시에 두 번째로 그 일상이 갑자기 초현실적인 것이 되거나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을 담고자 하는 것인지 이상하고 모호한 느낌을 자아낸다. 

테이트의 시가 산문시라는 형식상의 문제에서 출발해 그의 시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산문시라는 형식 자체는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으며, 여러 시인들의 산문시들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감각의 질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읽을 때, 최정례의 「있음과 있었음의 사이에서」를 읽을 때,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을 읽을 때 다가오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 위의 시(집)들은 모두 산문시라는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그 패션은 독특한 것으로도, 자연스러운 것으로도, 무언가 엉거주춤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시인은 자신이 의도한 바를 실현시키기 위해 산문시라는 형식을 채택한다. 그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는 개별 시인마다 다르지만. 시인은 자기가 쓰고자 하는 바가 있으며 그 시가 산문시냐 장시(長詩)냐 그렇지 않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테이트의 시를 읽을 때 드는 내용과 형식에 대한 당혹감은 서로 다른, 분리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둘이 긴밀하게 연합하여 테이트의 산문시가 갖고 있는 요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테이트 시의 요체는 유머이다. 산문시는 테이트 식의 유머가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다. 운문이지 않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시 같지 않아 보이는 산문시는 테이트 식 유머를 보여주기에 훌륭한 도구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테이트의 시가 시 다워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개별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런 식의 추상적인 논의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우선 테이트의 개별 시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2


마고가 “차 좀 세워 줘. 오줌 마려워”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다. “이런,” 내가 말했다, “대체 어디서 오줌을 눈다는 거야?” “나무 뒤나,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오줌을 꼭 싸야 한단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 보는 눈이 없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하고 차를 세웠다. 그녀가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거기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는데, 그때 나는 그녀를 언뜻 보았다. 날고 있었다. 나무들은 빽빽했는데 그녀는 나무들 사이를 아주 편하게 활공하고 있었다. 더 잘 보기 위해 차에서 나와 걸었다. “마고, 내려와,” 나는 소리쳤다. “못 하겠어,” 그녀도 소리질렀다. “무언가가 내 엉덩이를 물었어, 그래서 날아다니는 병에 걸렸어.” 나는 말문이 막혔고, 그녀의 우아함이 경이로웠다. 정말로 자연스럽고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어떡해야 해?” 나는 말했다. “내 생각에는 너가 나한테 화살을 쏘아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대답했다. “화살이 없는걸,”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럴 수 없어, 사랑한단 말야!” “내 생각에 이 날아다니는 병은 평생을 갈 것 같아,” 내 위를 활공하며 그녀가 말했다. 그때 그녀는 흐릿한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원을 그리며 걸었고 애꿎은 나무를 걷어 찼다. 그녀는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누구에 의한 건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강력했다. 일요일의 드라이브, 숲속에서 오줌 누기, 그리고 지금 이것. 

— James Tate, 「A Sunday Drive」 전문. 이하 모든 시는 James Tate, Return to the City of White Donkeys, New York: Ecco, 2004에 수록된 것.


우선 비교적 짧은(?) 시인 「A Sunday Drive」에서 시작해보자. 내러티브—시에서 내러티브를 말할 수 있다면—는 간단하다. ‘나’는 인적 드문 곳에서 친구 마고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 갑작스런 요의(尿意) 탓에 마고는 숲 속에 들어가 소변을 본다. 그런데 마고는 어떤 벌레에 물려 날아다니는 병에 걸렸다. 그 활공은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했고, 마고는 빛의 어딘가로 떠나 버린다. 나는 어이가 없어 애꿎은 나무를 걷어 찬다. 

이 시에서 우리는 크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첫째, 이 시가 다루는 내용이 어쩐지 아주 일상적이고 비속해 보인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숲 속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내용은 일반적인 시에서 흔히 보기 어렵다. 쉽게 말해 ‘이런 것도 시로 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둘째, 특히 말미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유머 감각이다. 실제로 나는 애꿎은 나무를 걷어찼다는(kicked an innocent tree)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풋, 하고 웃었다. 

일단 두 번째로 지적한 것, 테이트의 이 시에서 느껴지는 어떤 유머에 대해 출발해 보자. 나는 이 시가 보통 사회적으로 약자인 대상의 어떤 특성을 부각시키거나 말장난을 해서 웃은 것이 아니다. 시가 정치인들의 어이 없는 말들을 풍자해서 웃은 것도 아니다. 이 시에는, 우리가 흔히 개그 콘서트를 보거나 농담 따먹기를 하며 웃는 것과는 궤가 다른 특정한 종류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고 말해야 좋을 성싶다. 부연하겠지만, 이 시에서 웃음은 비속함과 고상함, 그리고 현실과 초현실 사이의 균열과 간극이 자연스럽고도 우아하게 결합하는 데에서 나온다. 

숲 속에서의 노상방뇨는 고상하지 않다. 하의를 벗고 숲 속에서 소변을 보면 물론 벌레들에게 물리기 십상이다. 고상하지는 않지만 여기까지는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내러티브 상 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회가 등장한다. 날아다니는 병을 옮기는 벌레에게 물린 것이다. 어이없게도, 날아다니는 병에 걸린 마고는, 의외로 ‘우아하게’ 날아다니고 ‘나’는 경이에 차 그것을 바라본다. 부름을 받은 것(being called)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고의 병은 신이나 종교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각주:2] 평범한 현실, 이런 걸 시로 써도 될까 싶은 현실에서 당황스러운 초현실이 출현한다. 

흔히들 비현실적인 것을 시적이거나 문학적이라고 칭한다. 그것은 일부 맞는 말이다. 테이트의 상상력이 없다면 위의 시는 한낱 꽁트나 잡문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초현실과 현실의 이상한 간극을 시가 메우는 방식이다. 테이트는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마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듯 방관의 태도를 취한다. 그의 시에서는 애당초 무엇이 현실적이고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초현실적인 상황을 계속 밀고 간다.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마고의 비행이 이어지다가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수순인 듯 흐릿한 불빛 속으로 사라질 때 유머의 기반이 마련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 속 상황에 대한 당황과 함께 ‘대체 이게 다 무어냐’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날아다니는 병에 걸렸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휩쓸고 지나간 현실의 폐허이다. 그러나 그 폐허는 비통하지 않다. 현실이 폐허가 된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어떤 초현실적인 상황의 등장으로 그 당연함의 기반인 의미를 잃었기 때문인데, 현실은 초현실의 등장에 책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테이트의 시는 비극이 아니라 하나의 소극(笑劇)이다. 애꿎은 나무를 걷어찼다는 센스 있고 위트 있는 구절은 화룡점정이다. 



3


「The Case of Aaron Novak」에서 ‘나’는 “아론 노박, 넌 죽었어”라는 전화를 받는다. ‘나’는 물론 아론 노박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경찰에 전화를 했고, 로텔로라는 경관이 집에 도착했다. 로텔로 경관은 ‘나’에게 당신이 아론 노박이 맞는지 자꾸 묻는다. ‘나’는 내 이름은 오웬 놀란이라고 대답하는데 경관은 “그거 참 저에겐 아론 노박과 비슷하게 들리는군요”라고 응수한다. 어쨌든 전혀 관련 없는 이에 대한 협박 전화가 나에게 오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나’와 경관은 전화번호부에서 아론 노박의 이름을 찾는다. 그런데 전화를 거니 받는 것은 노박의 어머니이며, 경관은 당황하고 ‘나’는 그에게 그가 노박인 척하고, 데이트가 있어서 집에 늦게 올 거라고 둘러댈 것을 주문한다. 어이 없게도 경관은 그렇게 하고 잠시동안 아론 노박이 된 듯이 노박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썅, 엄마. 당신이 할 줄 아는 거라곤 훌쩍이고 흐느끼는 것밖에 없군요. 무료 급식소나 가서 당신 한심한 자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돕는 건 어때요,” 그리고 나는 전화기를 쾅 내리쳐 껐다. 로텔로 경관이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 느리게 미소가 피었다. “굉장했어요,” 그가 말했다. “저라면 절대 못 했을 겁니다. 그 년이 계속 전화를 하게 냅뒀을 거예요.” “이제 아론 노박에 관련해 뭘 하실 거죠?” 나는 말했다. “잠시동안, 저는 제가 아론 노박이 된 줄 알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이제 심각한 문제에 처하겠군요,” 내가 말했다. “아마 그는 그래도 싸요,” 그가 말했다. “커피 드실래요?” 내가 말했다. 

— James Tate, 「The Case of Aaron Novak」 부분.


오웬 놀란과 아론 노박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테이트의 기발한 위트가 드러나고, 노박의 엄마가 전화를 받자 당황하며 노박인 척하는 그 상황도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부분이다. 경관과 노박의 어머니가 쓸데없는 대화를 하자 ‘나’는 전화기를 낚아채 다짜고짜 욕을 한다. 경관은 잠시동안 내가 아론 노박이 된 것 같다며, ‘나’의 대응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커피를 제안한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커피를 제안하는 것. 우리는 일이 지나갔을 때 한숨 돌리기 위해 커피나 차를 마신다. 또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음료를 제안하는 것은 예의기도 하다. 바로 이 커피 제안에서 테이트 시의 진정한 유머가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론 노박에 대한 살인 협박 전화로 시작된 비일상은 노박의 엄마에 대한 ‘나’의 욕설로 절정을 찍는데, ‘나’는 커피를 제안하며 그 비일상에 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일상과 비일상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고 긴장이 이완된다. 이 이완의 자리에 서서야 독자는 마침내 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재고한다. 생각해보면 앞선 일련의 일들은 한 편의 소극이다. 아무 관련 없는 사람한테 살인 협박 전화가 온 것도 웃기는 일이고, 또 아무 관련 없는 노박의 엄마한테 노박인 척하며 욕설을 하는 것도 어이 없는 일이 아닌가. 살인 협박이 장난 전화든 아니든 애꿎은 아론 노박은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이 날 것이다. 그런데 경관은 “그는 그래도 싸”다고 말한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집에 경찰까지 온 이 급박한 상황은 그 긴장을 한순간에 잃어버린다. 긴장의 안개가 걷히고—덧붙이자면, 독자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빠르게 시를 읽어내려갈 수 있는 것도 산문의 리듬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시가 묘사하는 현실은 놀란의 집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우스운 에피소드는 시적 공간을 무의미로 가득 채운다.

바로 이 무의미로 가득 찬 자리에서 유머가 발생하고 나는 웃는다. 



4


나는 앞서 테이트의 시에서 유머가 느껴지고, 그 유머는 시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과 초현실, 일상과 비일상, 혹은 비속함과 고상함의 경계가 무너지고 현실이 그 의미를 잃는 데서 나온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만약 「A Sunday Drive」나 「The Case of Aaron Novak」이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 적혀 있다면 어땠을까? 운문을 사용할 경우 테이트의 시는 좀 더 시다워질 수 있을 것인가? 테이트 시의 유머와 산문, 운문 형식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시의 유머는 산문을 통해서만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내 결론은 이렇다. 산문시 형식과 테이트가 노리는 유머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 

문학 연구자 이언 와트(Ian Watt)는 그의 저서 『소설의 발생』에서 소설의 문체인 산문과 리얼리즘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고 지적한다. 근대는 플라톤이나 중세 철학(실재론)이 상정한 원형이나 이데아, 신과 같은 보편자에 대한 탐구를 거부하고 개별성과 현실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대다. 이러한 인식관심에 걸맞는 글쓰기 양식은 단순 명료한 산문이다. 소설은 산문을 통해 실제 삶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산문은 삶을 “정황적으로 바라”본다.[각주:3]

물론 테이트의 시는 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테이트 시가 묘사하는 일상은 산문적이고, 산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산문을 사용해 우리들의 평범한(때로는 굳이 문학작품으로 쓸 필요가 있나 싶기까지 한) 일상을 일상답게 묘사하고, 또 그것을 위화감 없이 초현실이나 상상으로 발돋움시키는 목적을 적절히 수행한다. 그러고서는 그걸 자연스럽게 뒤섞어 버린다. 그리고 운문으로 썼다면 운신의 폭이 제한됐을 법한 위트 있는 문장을 잘도 날려 댄다. 

산문으로 시를 씀으로써 테이트는 일상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한편 그것을 확실하게 ‘낯설게’ 만드는 기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브레히트가 극에서 갑자기 방백을 사용하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쓰는 방법 등으로 ‘낯설게 하기’를 훌륭하게 수행했다면 테이트는 구체적인 삶의 국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다가 갑자기 초월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법한 상황들을 묘사하다 급작스레 국면을 전환시키고 또 제동을 거는 방식으로 그만의 ‘낯설게 하기’를 수행한다. 산문이 이러한 의도에 제일 적합한 것인 듯하며, 그러한 ‘낯설게 하기’의 결과는 유머이다.



5


한편 현실의 무의미성을 드러내는 유머 전략 말고도 테이트는 사회 비판의 요소가 있는 풍자적인 유머를 시에서 구현하기도 한다. 비현실적이거나 느닷없는 상황, 혹은 화자의 상상을 가정하고 그것을 현실(일상)과 맞닿게 해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에 도달한다는 점에서는 앞서 인용한 시들과 유사하지만, 아래의 시들은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나 부정적인 국면들을 블랙 유머로 폭로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특별한 듯하다. 


나는 개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만약 다른 개미 식민지를 공격하는 와중에 개미 하나가 사로잡힌다면, 그 개미는 그 개미를 잡은 전사 개미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그 개미는 전사 개미의 모든 욕구를 처리하는 데에 남은 일생을 쓸 것인데, 그러면서 전사 개미는 점점 뚱뚱해지고 약해지며 결국에는 완전히 무력해져 일찍 죽을 것이다. 그리고 개미들은, 음, 말하자면 소떼 농장과 똑같은 것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경우 소가 진딧물일 뿐이다. 개미들은 그들을 목초지로 데려가고 젖을 짜고 그들에게 깨끗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몇몇 개미들은 오직 환기를 위해서만 일한다. 집 짓는 개미들은 새 세대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식민지를 계속 늘린다. 그리고 인생에 한번 사용하는 날개를 가진 여왕은 그녀의 알을 낳고, 헌신적인 수행원들이 그 알을 돌본다. 여기에는 무언가 가슴이 찢어지는 것이 있다. 진딧물들을 해 지기 전 목초지에서 몰아 오고, 젖을 짜는 것, 낙농원 농부의 삶이란! 나는 책을 덮었다. (…) 나는 부엌 출입문에 서 있었는데 그때 어떤 차가 내 집 앞에 차를 댔다. 누가 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방역 차였다. 그는 차에서 나와 집 주변 온 곳에 스프레이를 뿌려 댔다. 몇 년 전에 계약한 것인데 지금은 내가 왜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는 이 분 정도 있다가 가 버렸고, 광대한 문명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 James Tate, 「The Aphid Farmers」 부분.


「The Aphid Farmers」의 뒷부분 역시 자세히 논의할 가치가 있지만, 일단은 앞 부분을 보자. 뜬금없이 테이트는 개미가 일구고 있는 문명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실로 개미는 훌륭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노예 개미와 진딧물 농장은 인간 사회의 그것들과 대응된다. 노예를 보유한 전사 개미가 일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다가 결국 일찍 죽어 버린다는 내용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한다. 여왕 개미의 일생에 화자는 가슴이 찢어지는(heartbreaking) 비애를 느끼고, 진딧물 농부 개미들의 목가적 삶에 깊이 공감한다. 여기에는 무언가 서정적인 것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개미와 인간 사회, 주변 자연 환경에 대한 화자의 명상은 몇 년 전에 계약했지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이제는 잊어버린 방역 차 때문에 끝이 난다. 시의 전개에서 방역차는 불쑥 튀어나온 것으로, 독자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이상하게도 불쑥 튀어나온 방역차는 역시 불쑥 자기 할 일만 하고 2분 뒤에 떠나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화자의 건조한 논평이 압권이다.

식민지 개미집에 대한 전쟁, 주인과 노예의 투쟁, 진딧물 농부의 목가, 여왕개미의 실존적 비애. 결코 인간에 비해 못나다 할 수 없는, 작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개미들의 삶은 자기 일만 휙 하고 가버리는 관료적인 방역 업자에 의해 파괴되었다. “광대한 문명은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짧은 논평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날리는 조소(嘲笑)이다.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 감돈다. 이 시를 읽었을 때 테이트에게 갑작스러운 훅(hook)을 얻어맞은 듯했다. 이런 식으로 테이트는 능숙하게 상상과 현실 사이의 결락을 (경우에 따라서는 블랙) 유머로 채우고,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다. 일견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의 결합은 사실 독특한 시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마찬가지의 블랙 유머를 「The Promotion」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화자는 전생(前生)에 개였고, 주인을 보필하는 데에 충실해 인간으로 승진한다. 화자는 고층 빌딩에서 예전에 그러했듯이 개처럼 일한다. 아무와도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이것이 착한 개로서의 내 삶에 대한 보상이다. 인간 늑대들은 나를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나를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목적 없이 일에만 몰두하는 자신에 대한 냉소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The Aphid Farmers」의 사회 비판적인 유머와 조응한다. 



6


산문시를 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문(愚問) 같아 보이지만,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다. 시는 운문으로 쓰여야 한다, 행과 연 사이 고유의 리듬이 있어야 한다, 하는 관념은 문학 작품을 읽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관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테이트의 시는 산문으로 쓰여졌다는 사실 이외에도 우리가 시에 대해 보통 기대하는 것들을 배반한다. 보통 시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시인의 서정이 깃들어 있을 법한데 그렇지도 않다. 테이트 시의 대부분은 상황의 묘사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시인 특유의 아름답고 독특한 은유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테이트의 시를 읽어본다면 ‘그의 시는 확실히 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는 산문을 씀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시에 기대하는 고정관념들을 대부분 파괴했다. 그러나 그가 산문들을 엮어내 시를 만드는 방식은 확실히 ‘시적’이다. 그는 산문을 사용해 현실과 초현실, 혹은 현실과 상상 사이를 자유자재로 활강한다. 산문은 본래 건조할 수밖에 없고, 시 속 상황과 정경에 대한 그의 묘사와 문장은 밋밋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산문은 상상력으로 즙이 가득 차 있다. 그는 뛰어난 권투선수처럼 파고 들어오는 위트를 날리며 우리들의 일상을 낯설게 만든다. 그 결과로 발생하는 것은 유머이다. 우리의 일상이 갑자기 의미를 잃게 되어 소탈한 웃음이 날 수도 있고(「A Sunday Drive」, 「The Case of Aaron Novak」), 현대 문명을 기존대로와는 다른 시각으로 마주치게 되어 씁쓸한 조소가 입가에 맴돌게 될 수도 있다(「The Aphid Farmers」, 「The Promotion」). 

테이트는 기존의 관습적인 서정시에서 탈피하고 대신 자유로운 산문을 사용해 시적 상황들과 상상력을 충돌시켜가며 유머를 창출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일상을 우리가 종래에 보던 방식대로 볼 수만은 없게 된다. 그의 산문시 스타일은, 기존의 형식을 고수했다면 도달하기 어려웠을 시 쓰기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 듯하다. 이러한 그의 시 쓰기 방식을 ‘유머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1. 밀란 쿤데라, 『커튼』, 박성창 옮김, 민음사, 2012, 195쪽. [본문으로]
  2. ‘Ca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단순히 누군가를 부른다는 의미 뿐만이 아닌 종교적인 뉘앙스도 포함하고 있다.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 천직, 소명(calling)이라는 단어는 신의 부름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본문으로]
  3. 이언 와트, 『소설의 발생』, 강유나·고경하 옮김, 강, 2009, 46-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