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도서출판 길.

제2장 2절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Pp. 332-69) 

■ 논의의 출발 [pp.332-5] 
  • 일상생활의 경제적 규범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표상을 통찰하기 위해 리처드 박스터를 주되게 다룰 것. 왜냐하면 그가 “직업 관념을 논리적으로 가장 일관되게 정초”한 영국 청교주의의 대표이기 때문. 

            ■ 박스터의 저작에서 드러나는 특징들 [pp.336-46]
            • 부를 경계하고 가난함을 중시하는(=에비온파적) 요소가 드러남 
              •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이는 소유가 “안주의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임. 오직 행위만이 신의 영광을 키우기 때문에 시간 낭비야말로 “가장 무거운 죄”이며, 이는 소명을 “굳게 하기”에 쓰여야 함(336). 요점은 신의 뜻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시간을 직업노동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에 있음(337).
            • 박스터의 노동에 대한 설교에 작용하는 두 가지 동기 
              • 첫째, “노동은 이미 오래전에 그 효과가 검증된 금욕의 수단이다.”(337)
              • 둘째, “노동은 그 이상의 것으로서 무엇보다 신이 규정한 삶 일반의 자기 목적이다. … 노동 의욕의 결핍은 은총받지 못한 상태의 징후이다.”(337-8)
            • 여기서 중세적 태도(=아퀴나스)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남
              • 아퀴나스는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노동이 꼭 필요치는 않다고 생각하였음; 더 나아가 “수도승의 ‘생산력’ 가운데 최고 형태는 기도와 성가 봉창을 통해 ‘교회의 보화’를 증대”하는 것이라 생각(338). 박스터에 의하면 부자에게도 신의 계명은 유효하기 때문에, 바울의 명제(“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문자 그대로 해석됨. 
              • 이는 또한 경제적 질서에 대한 해석으로도 연결됨. 아퀴나스와 루터는 어느 정도 인간이 분업 질서(이 질서는 신의 섭리)에 편입되는 것을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으로 보았음. 한편, 청교주의는 “직업 분화의 섭리적 목적”이 “숙련”, “노동 성과”, “일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함인 것으로 보았음(340). 이는 세속적 문헌의 태도와 유사하나 차이가 있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를 ‘합리적’ 직업노동으로 생각했다는 것. 즉, 이윤을 위해 합리적으로 노동하는 것은 곧 신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요구된다(340-2). 
            • “고정된 직업의 금욕주의적 의미”의 설교는 “근대적 전문가주의”를 신성시하는 것이 되고, “이윤 창출의 기회를 섭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업가들을 윤리적으로 신성시”하는 것이 됨(343). 
              • 구약에 대한 해석 및 구약의 영향 (343-6); 청교도들에게는 욥기가 강력한 영향을 미침. (모세에 대한 재해석은, 구약에서 “근대적 삶에 전혀 적합지 않은 율법적 규정의 제거” 가능케 함.)

            ■ 청교주의적 금욕관과 직업관이 자본주의 생활방식 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점들 [pp. 346-51]
            • “현재적 삶이 제공하는 모든 쾌락을 무절제하게 향유하는 것”에 대한 적대 -- “직업노동과 신앙으로부터 똑같이 이탈하는 충동적인 삶의 향락은 … 바로 그 자체로 합리적 금욕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e.g. 스포츠의 書를 둘러싼 투쟁; 346-8)
            • “직접적으로 종교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문화적 재화[e.g. 문학, 감각 예술]에 대해서도 불신하는 그리고 때로는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348) 
            • 청교주의에 있어 문화적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조금도 비용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음. 
            • 위와 같은 태도들은 고대나 중세에도 존재했으나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논리적으로 일관된 윤리적 토대를 발견.”(351) 

            ■ 앞선 논의의 요약 및 정리 [pp. 351-2]

            ■ 금욕주의로 인한 자본의 형성 [pp. 353-5]
            • 청교도적 금욕주의는 ‘영리의 추구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소비를 억압’함(왜냐하면 부는 충동적 소유욕과 나태를 부추기기 때문). 이것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외적 결과: “금욕적 절박에 의한 자본형성”(353).
            • 이는 투자자본으로서의 부의 사용을 촉진시킬 수밖에 없음. (353-4)

            ■ 금욕주의 운동이 경제적 영향을 완전히 발휘하게 된 때 [pp. 355-63] 
              • 청교주의적 삶의 이상이 “부의 유혹에서 오는 시험이 너무나 강한 경우” 좌절될 때: 355-7쪽. 부가 증대하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증가하고, “자만심과 욕정 그리고 육체적·세상적인 욕망과 삶의 교만함”이 늘어나는 것은 중세 가톨릭 수도회에서도 잘 드러남. 웨슬리는 이를 잘 알고 있었음(356).
              • 금욕주의 운동이 경제적 영향력을 완전히 발휘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순수한 종교적 열정이 이미 그 저점을 넘어서고 또 신의 왕국에 대한 열렬한 추구가 점차 냉정한 직업적 덕목으로 해체되기 시작함으로써 종교적 뿌리가 서서히 말라죽고 그 자리에 공리주의적 현세성이 확립되고 난 후의 일”(357) 이리하여 “마침내 전형적인 시민계층적 직업 에토스가 탄생”(358). 
                • 종교적 금욕주의는 근면하게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제공”하고 또한 이들에게 재화의 불평등 현상을 정당화함(358). 
                • 즉 프로테스탄티즘 금욕주의는 “노동 규범이 경제 영역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요소” 즉 노동을 소명으로 봄으로써 “그 규범에 심리학적 동인을 부여”함(360). 

              ■ 결론 [pp. 363-9]
              • “근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 문화 일반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직업 관념에 기초하는 합리적 생활양식--바로 이것이 우리의 연구가 논증하려고 했던 것이다--은 기독교적 금욕주의 정신에서 탄생했다.”(363)
              • 근대의 쇠우리(iron cage): 괴테의 『편력시대』에 나타나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파우스트적 인간이 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365) 왜냐하면 “승리를 거둔 [서구의] 자본주의”가 그 태동기와는 다르게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365). 따라서 세계는 이제 현대인들의 생활양식을 전문 직업 생활적 양식으로 “마지막 톤의 화석 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게 될 것이다(365). (“‘행위’와 ‘체념’[포기]은 오늘날 불가피하게 서로를 조건짓고 제약한다.”) 
              • ‘직업 수행’이 그 토대가 되었던 종교적 관념과 관련이 없는 경우: 미국에서 찾을 수 있음(366). 근대의 쇠우리가 니체 식의 ‘최후의 인간’상을 불러올지, 다른 사상과 이상을 불러일으킬지 어떠한 식으로 귀결될지는 알 수 없음(366-7). 

                ■ 향후 연구 전망 및 방법론상의 경고 [pp. 368-9]
                •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가치판단과 신앙판단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연구는 그래서는 안 됨. 
                •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떠한 경제적 토대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지 규명하는 작업 역시 필요함. 유물론적 인과해석과 유심론적 인과해석 “양자는 똑같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연구의 예비 작업이 아니라 결론임을 자처한다면 [즉,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유물론 내지는 유심론적 인과해석을 신봉한다면] 양자는 똑같이 역사적 진리에 기여하는 바가 적을 것이다.”(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