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느림»에 대해
2017. 1. 21. 15:40
밀란 쿤데라 «느림»(김병욱 옮김, 민음사, 1995) 발제문
2017.01.19.
1. 들어가기에 앞서: 소설에 대해
쿤데라의 «느림»은 그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우스운 사랑들»은 단편소설집입니다.) «느림»은 쿤데라의 소설 커리어 중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프랑스어로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7부로 이루어진 전작(前作)의 형식을 «느림»에서 처음으로 깼다는 것입니다. («우스운 사랑들»도 7부의 형식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 소설집은 총 7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외는 «이별의 왈츠»입니다.) 프랑스어로 소설쓰기에 대해 쿤데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멸»을 발표하면서 나는 첫 소설 때부터 다양하게 발전시켜 온 내 소설 형식(일곱 부 구성)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했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내가 소설가로서의 길 끝에 도달한 것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발견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사실이 말이다.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도 아마 거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완전히 다른 곳에,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길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게임의 규칙», 1995년 5월호. 김병욱, “느림, ‘검은 유머’를 숨긴 유희적 광시곡”, «밀란 쿤데라 아카이브» 티스토리 블로그, 2013년 10월 22일에서 재인용.)
다른 소설들과 구별되는 이러한 «느림»의 특징은 우리가 쿤데라라는 ‘작가’를 읽을 때 얼마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분명 망명한/이주한 작가로서 모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자 작가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전환점이고, 또 기존에 고수했던 소설 구성의 방식을 깨뜨리는 것도 소설가의 이력에 있어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니까요. 언뜻 보기에 «불멸»에서 쿤데라가 시도한, 읽는 데에 방해마저 되는 것 같은 다성적(polyphonic) 글쓰기 방식이 «느림»과 «정체성» 등 후기 소설에서는 작품 전체로 확장된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쿤데라의 사유의 악보(樂譜)가 이전 작품에서는 론도와 같은 일정한 형식을 갖춘 클래식 음악의 그것이었다면, 지금은 재즈의 그것 같아 보인달까요. 사실 재즈에는 악보랄 게 없지요. «정체성»에서도 그렇고, «느림»에서 쿤데라는 장(章)마다 짧게 특정한 모티프를 제시한 채(이를테면 ‘느림’, ‘프라이버시’, ‘춤꾼’) 그것을 즉흥 연주[improvisation]하는 재즈 음악가들처럼 내러티브 속에서 자유롭게 풀어 놓는 것 같습니다.
2. 소설의 구조
«느림»은 부 없이 총 5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족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바로 뒤 발표한 소설 «정체성»도 51장 구성이라는 것입니다.) 첫 장에서 작가는 성(城)에서 아내와 하룻밤 묵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소설은 성이라는 주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성으로 가는 길에서 쿤데라는 “느림”에 대해 착상하며, 이는 이후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한 모티프가 됩니다. 이 “느림”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18세기와 20세기가 대별됩니다. 18세기는—“18세기의 정신과 예술을 가장 잘 드러낸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11)라고 꼽는 ‹내일은 없다›에서 알 수 있듯—느림의 시대입니다. 반면 20세기는 느림의 가치라고는 사라져 버린 시대입니다.
이 성 안에서 크게 세 가지의 사건이 진행됩니다. (1) 작가(밀란쿠)와 아내(베라)의 휴가. (2) 곤충학자들의 학술대회. 여기서 등장인물들은 뱅상-줄리, 베르크-임마쿨라타-카메라맨, 체호르집스키입니다. (3) ‹위험한 관계들› 소설 내용. (2)와 (3)은 모두 (1)의 작가 밀란쿠가 착상한 내용입니다. 쿤데라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의 등장인물들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곤충학 학술대회가 열리는 성에서 우연히 한데 만나며 기막힌 소극(笑劇)을 연출합니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철저히 작가 밀란 쿤데라의 인위적 기획에 의한 것입니다. 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26장을 봅시다. 이러한 고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작가의 개입과 존재 드러내기—은 마지막 결말부에 있어서 정점을 찍는데, 바로 작가의 상상인 (2)의 뱅상과 (3)의 기사가 만나는 것입니다.
3. 18세기의 두 가지 가능성: ‹내일은 없다›, ‹위험한 관계들›
쿤데라는 «느림»에서 18세기의 두 가지 소설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내일은 없다›입니다. 소설의 젊은 기사는 T부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자신이 부인의 외도를 숨기는 도구로 이용됐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쿤데라는 T부인의 “연출 예술”에 감탄하며, “그녀야말로 에피쿠로스의 참 제자”(165)라며 감탄합니다. (9장-12장). 이러한 T부인의 치밀성이 가져다준 쾌락은 18세기가 대변하는 느림의 미학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험한 관계들›인데, 사실 이 소설은 3장에서 짧게 언급되며 그렇게 중요한 비중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18세기의 이 소설은 앞의 ‹내일은 없다›에 맞서 부정적인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관계들›은 18세기가 프라이버시가 전무해졌으며, 쾌락을 경쟁적으로 좇는 것만이 중요한 20세기의 맹아임을 보여주는 듯한 소설입니다. 라클로의 이 소설에서 “발설된 모든 말이 언제까지나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남”(15)으며, 소설 속에서 쾌락을 경쟁적으로 좇는 등장인물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 철학에 정면으로 반합니다.
이러한 18세기가 배태한 두 모순적인 가능성들—‹내일은 없다›의 ‘느림’ 지향적, 에피쿠로스적 쾌락, 그리고 ‹위험한 관계들›의 디스토피아적 가능성—중에서 20세기는 후자의 것만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쿤데라가 ‹위험한 관계들›을 두고 표현한 “거대한 하나의 소리나는 조개껍질”(15)은 20세기 이후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지 않”(15)습니다. 20세기 이후 사람들은 숨어 살지 않습니다. 언제나 카메라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뱅상이 정확히 지적하듯, 소설 속 (20세기의)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모두 “존재의 행복한 춤꾼”입니다. 퐁트벵이 지적한 대로 도덕성을 무기로 하여 덩어리진 익명의 대중들 앞에서 춤을 추느냐, 혹은 주변 친구들—대중들의 표본—앞에서 섹스 무용담 따위를 무기로 하여 춤을 추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베르크는 전자 부류의 춤꾼이며 뱅상과 퐁트벵은 후자 부류의 춤꾼입니다.)
후자 부류의 춤꾼 또한 ‹위험한 관계들›이 암시한 암울한 20세기의 시대상입니다. 사드를 위시한 18세기의 탕아들은 쾌락을 도덕적 금기로 해방시켰는데, 사실 쾌락에의 추구가 알고 보니까 정복에의 욕망이었던 것입니다. (가설이지만 이것이 ‹느림›이 우엘벡과 공명하는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벵상은 베르크와의 논쟁에서 정장 입은 남자에게 반론을 한 방 먹자, 어쩔 수 없이 샴페인 병을 들고 행사장에서 퇴장하여 쥴리를 꼬시려 합니다. 쥴리를 꼬심으로써, 베르크에게 한 방 먹어 깎였던 자신의 자존감을 벌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끝에 벵상은 발기도 안 된 채 섹스 흉내를 내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만, 친구들 앞에서 떠벌릴 무용담을 애써 꾸며내며 스스로 행복해 합니다. 통렬한 풍자이지요.) 결국에 현대인들은 고상한 도덕을 무기로 춤을 추거나 건장한 섹슈얼리티를 무기로 춤을 추거나 하는 불쌍한 춤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4. 이미지의 폭정 아래 춤추는 춤꾼들
“아마 폴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들은 역사에 속하지만,
이마골로기의 통치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 밀란 쿤데라, «불멸», 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0. 191쪽.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스운 지점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베르크: (퐁트벵이 지적한) 진정한 춤꾼. 에이즈와 관련된 일화도 아주 우습지만, 체호르집스키와의 대화(프랑스-체코 곤충학회를 설립하자)가 백미입니다.
- 체호르집스키: 이 사람도 진정한 춤꾼이라 할 만합니다. 체코에 대한 소련의 억압에서 얼떨결에 억압받는 위치에 선 후, 그 억압받았던 자로서의 이미지 자체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또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 몸이 별로인 사람들을 상상하고 비교하며 뜬금없이 운동을 하는 것이 벵상과 비슷한 지점인데 이것도 우습지요.
- 벵상: 학회장에서 베르크에게 한 방 먹이려다가 도리어 반격당하자, 여자를 꼬셔 그걸 무용담으로 삼을 요량으로 퇴각합니다.
- 임마쿨라타: «불멸»에서 괴테에게 치근덕거리던 여인 베티나가 생각나는 인물입니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거대한 카메라 앞에 선 자들처럼, 어떤 이미지에 자신을 끼워맞추고 자존감 투쟁을 하는 춤꾼이라는 점에서 우습습니다.
이는 곧 역사가 끝난 자리, 즉 이마골로기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전형적인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 스카르페타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이 ‘액션’이라기보다는 ‘리액션’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합니다(김병욱, “느림, ‘검은 유머’를 숨긴 유희적 광시곡”, «밀란 쿤데라 아카이브» 티스토리 블로그, 2013년 10월 22일). 이들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이념에의 지향이랄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상정한 이미지에 자신들을 구속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이상화된 이미지가 그들을 원격 조종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리액션으로 만들고,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삶을 향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예정된 어떤 이미지를 흉내 내는 시뮬라크르로 만드는 것”입니다(앞의 글).
이러한 행동양식은 T부인 혹은 이념이나 대의 따위를 위해 헌신한 18-20세기의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앞의 인물들은 실패하더라도 비극으로 남는 데 반해 쿤데라 소설의 인물들은 어찌됐건 희극이나 소극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시끄럽고 혼잡한 각축장 속에서 인간들은 훌륭한 도덕적 인물로 비치기를 노력하거나 혹은 쿨한 쾌락주의자로 비치기 위해 몸싸움을 벌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무엇을 지향하건간에 그러한 몸싸움은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의미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마치 강박에 가까운 것이며 아무런 진실성도 없는 키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쿤데라는 역사의 종언이 선언된 시기에 서서 마치 현대의 이 인간상을 조소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쿤데라가 탈근대가 아닌 근대에 묶여있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결국에 이러한 풍자나 조소는 탈근대 이전의 시기, 즉 근대에 대한 애정 혹은 미련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후일담 문학이 1980년대 운동에 대한 공통의 기억과 회상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듯 말입니다. 쿤데라는 쿨싴하게 본인의 작업이 “거대한 장난질”이며 “무의미의 축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인양 굴지만, 그가 어쩐지 느림이라는 구시대적 가치를 예찬하며 “진실된 것”을 희구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요.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레이먼드 카버 읽기 (0) | 2018.01.20 |
---|---|
유머의 시학: 제임스 테이트(James Tate) 시 읽기 (1) | 2017.08.28 |
하루키 「오후의 마지막 잔디」를 읽고 (0) | 2017.08.24 |
밀란 쿤데라,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0) | 2017.08.24 |
«소리와 분노»를 쉽게 읽기 위해 (3) | 2017.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