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1.
‹에드바르트와 하느님›은 언뜻 보기에 ‹히치하이킹 게임›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멈추지 않는 연극”이다. “삶에는 늘 이런 일이 일어나는 법, 우리가 어떤 연극에서 한창 자기 배역을 연기하는데, 누가 슬그머니 무대 장치를 바꿔 놓았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연극이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계속 연기를 하게 되는 그런 일 말입니다.”(333) 두 소설에서 주요 인물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연기를 한다. 그러고선 우리는 그 연기의 무대(‹히치하이킹 게임› 식으로 말하자면 게임의 판세)가 바뀌어 버리는 상황을 목도하게 되는데, 그럼으로 인해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의도나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며 심지어는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거나 뒤틀린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느낀다. 다시 말해 두 소설은 (1) 주인공들이 어떤 배역을 연기한다는 점, (2) 그런데 연극 무대(게임의 판세)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바뀌어 간다는 점, (3) 자신의 가면을 떼버릴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며 우리는 여기서 재미를 느낀다. 내가 여기서 지적할 것은 ‹에드바르트› 쪽이 ‹히치하이킹›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더 높은 성취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에드바르트›를 중후반부까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에드바르트에게는 여자친구 알리체가 있는데 알리체가 신앙이 있다는 점, 또 그 신앙에 입각해 섹스를 거부한다는 점 때문에 에드바르트는 고민이 깊다. (2) 에드바르트는 알리체와 같이 자려는 속셈으로, 그리고 알리체 신앙에 대한 반항심의 발로로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고 하느님 교리에 충실한 연기를 한다. 그러다가 성호를 긋는 것을 공산주의의 신봉자인 교장에게 들키게 된다. (3) 에드바르트는 학교 사람들과의 미팅에서 자신의 신앙이 진실된 것임을 거짓으로 연기하며 고백한다. (4) 에드바르트는 교장과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고 어쩌다 보니 교장을 좋아한다고 거짓으로 고백한다. 웃기게도 에드바르트는 여기서 자신의 남성적 매력을 확인하며 좋아한다. (5) 자신의 신앙 고백(=“순교”)이 마을에 퍼진 것을 보며 알리체는 에드바르트에게 (성적인 측면에서) 마음을 열게 된다. 일이 에드바르트에게 좋게 풀린 것이다. (6) 교장과의 다음 미팅에서 결국 교장은 에드바르트에게 저돌적으로 성관계를 시도한다.
다시 정리하면 에드바르트는 연기를 함으로써 알리체의 환심을 샀으며, 둘의 관계는 잘 풀릴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교장이라는 존재가 에드바르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부주의하게 에드바르트는 그것을 허용했다. 교장의 집에서 에드바르트는 매우 난처한 상황을 겪게 되며, 또한 알리체를 스스로 배반한 것이 된 것이다. 알리체와 교장과의 관계 모두에 있어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것이다! 아마도 보통의 소설가라면 여기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의 전개에도 소설은 충분히 재미있다. 이러한 소설 구성상의 테크닉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소설을 즐겁게 분석하며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쿤데라는 끝까지 간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교장의 집에서, 소설은 여기서 끝나도 좋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쿤데라는 끝까지 간다. 쿤데라는 여기서 첫 번째 전도를 선보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에드바르트는 교장과 성관계를 맺지 못하거나(발기가 되지 않아서), 맺더라도 굉장히 불만족스럽고 불완전한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단순한 결론이 도출된다. 하지만 예상외의 전개가 우리의 허를 찌른다. 에드바르트가 교장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을 하고, 교장은 기꺼이 순응한다. 어디 무릎만 꿇을 뿐이랴, 그 교장이 주기도문을 왼다. 여기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다(340). 에드바르트는 발기한다!
쿤데라는 또한 알리체와의 관계에 있어 두 번째 전도를 선보인다. 알리체는 에드바르트의 순교에 감명받아 몸을 완전히 내맡기기를 결정한다. 에드바르트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며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일은 그리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알리체의 허락은 전적으로 “오류에 근거”한 것이다(342). 결국 에드바르트의 눈에 있어 알리체는 일관성 없는, 바보 같은 엉성한 존재로 전락한다. 알리체의 정절을 지키겠다는 결심이 이렇게 무너진 이상, 알리체의 사상이나 신실함 따위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스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알리체의 정절이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결국 에드바르트의 노력 또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낱 독무대에서의 몸짓으로 전락한 것은 당연하다. 에드바르트와 알리체는 제대로 된 관계를 나누지 못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두 개의 전도가 쿤데라의 이야기를 “그렇게 뻔한 역설”로 마무리하지 않게 만든다(350).
2.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끝내 모두 어이없는 소극(笑劇) 속의 인물로 전락하는 이유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삶에 있어 진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선 교장(체하츠코바)의 공산주의에의 신념은 그녀가 공산주의라는 이념 속에서 인류의 해방이나 역사의 진보 따위를 진실로 발견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삶의 진실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공산주의라는 유사-종교로 대체한 것이다. 그녀는 공산주의 이념이 아닌, 거기에 전념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그리고 공산주의가 주는 젊음과 진보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알리체가 종교에 전념하는 것은 그녀가 하느님을 영접했거나 종교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체코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그리고 정절을 지키겠다는 의식 역시 진정한 신앙심에서 비롯한 게 아닌, 그저 만만해 보이는 교리를 그녀가 취사선택한 것임에 불과하다.
소설 말미에서 에드바르트가 형에게 던지는 질문은 절규에 가깝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진실해야 하는가? 그것이 정언명령이기 때문에? 에드바르트가 보기에는 아니다. “형이 세상 앞에서 진실을 말하겠노라 고집한다면 그건 형이 세상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진지하지 않은 어떤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건 자기 자신이 진지함을 다 잃어버린다는 거야. 나는, 나는 미친 사람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 자신이 미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만 해.”(346). 세상은 전혀 진지하지 않다. 세상은 허위와 우연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진중권이 말했듯이 상대가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면”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와는 진지한 언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다. 진지하지 않은 세상에 진심을 다해봤자 다가오는 것은 비참한 공허이다(348). 그렇게 에드바르트는 교장과 알리체 둘 모두에게 허위를 연기하며 아이러니를 빚어낸다(결국 그도 이 세계의 일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실존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끝내는 여자들을 후리고 다닌다(350). 이 비본질적인, 허위와 가장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오로지 본질적인 것—존재하는 것만으로 족한 것은 신(혹은 신에 준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에드바르트는 신 속에서 미소를 짓는다(351-2).
세상이 결코 진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거기에 진지하게 응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쿤데라가 그의 작품에서 유머, 아이러니와 역설을 강조하는 이유이며 냉소가 그의 작품 전반에 깔린 정서인 이유이다.
3.
쿤데라는 그의 가치관과 사상을, 흥미로운 플롯과 소설 구조 속에 적절히 배치하고 역설과 반전 같은 장치들을 적절히 동원해 정말로 소설다운 소설을 써낸다. 그의 소설은 단순한 연애소설이나 우스갯소리 차원에서도 훌륭하고, 세계의 허위와 모순 그리고 덧없음을 교묘하고도 우습게 폭로한다는 차원에서도 훌륭하다. 그는 소설의 기술에 정통하다. 그리고 그의 통찰은 사랑, 인간의 심리, 욕망과 같은 미시적 차원에서도 정확하며, 이데올로기들 혹은 사회 제도가 인간 사회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방식 같은 거시적 차원에서도 정확하다.
아마 세계에 대한 쿤데라의 냉소는 그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체코 공산당에서 추방당한 전력이 있고 끝내는 체코 공산주의 정권의 억압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쿤데라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면, 현실의 이념과 정치에 대한 그의 냉소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진정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이념이 절대로 진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세계의 허위를 그토록 생생하게 삶에서 마주한 사람으로서, 쿤데라는 그가 할 수 있는 말들만을 정확히 소설에서 풀어내고 있다.
확신하건대 앞으로 쿤데라와 같은 “냉소하는” 소설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쿤데라는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소설가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진정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은 세계에서는 세계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조소하는 것이 의미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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