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as and Knöbl, Social Theory, CUP. ch.14 “Structuralism and Poststructuralism” pp.339-370. 일부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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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강의는 주로 미국, 영국, 독일의 현대 사회학 이론에 집중된 인상을 준다. 다른 국가들은 마이너한 역할만 한 것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현실은 좀 달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자립적이었다. 이는 사회학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제1차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 사회학은 뒤르켐 학파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전까지 뒤르켐주의자와 뒤르켐은 프랑스에서 라이벌이 없는 거부할 수 없는 준거점으로 군림하였다. 우선은 20세기의 프랑스 사회학의 발달을 개괄적으로 짚고자 한다. 

뒤르켐 학파는 1918년 이후에도 한두 명의 뛰어난 학자들 덕택에 살아남았지만 많은 뒤르켐 학파의 인원들은 새로운 추동력을 불어넣는 데에 실패했다. 뒤르켐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학자들 중에는 마르셀 모스,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가 있다. 다른 학샘 인물은 조르주 바타유, 그리고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가 있다. 발터 벤야민이나 한스 마이어Hans Mayer같은 독일 지식인은 위의 인물들과 교류가 있었다. 하지만 뒤르켐 학파가 1920년대 시카고 사회학파가 겪었던 것처럼 혁신이 떨어져간 같은 운명을 공유했다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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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지식인게에서 매우 주목할만한 발전은--물론 사회학보다는 철학에 처음에 영향을 끼쳤다--전간기에 “독일 사상”을 새로이 수용한 것이다. 헤겔과 맑스, 그리고 프로이트와 후설, 하이데거는 함께 같이 읽혔다. 코제브Kojève가 여기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레이몽 아롱Aron의 막스 베버의 작업의 융합은 사회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수의 지식인들이 성장하였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에세이』는 “실존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1940,50년대의 프랑스의 지적 논쟁을 지배한, 비시 레짐의 붕괴 이후에 시작된 운동의 철학적 매니페스토였다. 

사르트르는 가끔 메를로퐁티와 같은 철학자와 부딪히며 1945년 이후 그의 철학적 논쟁을 밀고 나간다. 이것과 함께, 사르트르의 문학적 작업은 넓은 공중에게 삶에 대한 태도를 상기시켰고 시간이 갈수록 실존주의는 독서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다. 당분간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하였다. 

1950년대 프랑스 학계를 지배한 현상학과 실존주의와 좌익 급진주의는 영향력을 잃게 된다. “구조주의”란 이름 하의 강력한 반대 운동 때문이다. 왜 구조주의가 이륙하자마자 실존주의가 영향을 잃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철학적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 도움될 수 있다. 프랑스 철학과 사회학이 발전하면서, 그들은 과장된 주관주의subjetivism와 반-주관주의 혹은 객관주의objectivism 사이를 요동쳤다. 또한 사르트르는 철학을 다른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학제에 열어놓는 작업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이는 새로운 접근과 지적 link를 찾는 학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황금기 이후 구조주의가 사르트르의 주관주의적 성향을 능가한 것이다. 

구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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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먼저 구조주의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의 행동과 정신의 기능 밑에 잠재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깊은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Gardner, The Quest for Mind). 이것만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구조라는 개념을 쓴다고 해서 모두 구조주의자가 아니다. 파슨스나 루만, 기든스 같은 이론가들이 구조주의자라고 분류될 수 있는가 하면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자들은 구조에 대한 아주 특정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자들은 20세기의 첫 반세기에 인간의 생각과 언어의 특별한 특징을 다룬 인문학 학제들에서 생겨나고 발전된 구조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갖고 있다. 사회과학에서 구조주의적 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언어학인데, 여기서 outstanding figure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이다. 소쉬르 이전 언어학은 대부분 역사적 문헌학의 형태를 띠었다. 소쉬르는 그러한 문헌학이 언어학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혁파했다. 대신에 어떤 언어가 어떻게 내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래서 그것이 안정적인 조건에 따라 어떻게 서술될 수 있는지 탐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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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앙signifier (기표) 그리고 시니피에signified (기의) 사이의 관계는 명확함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소쉬르는 소위 “언어의 재현적 모델” 즉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 어느 정도 자연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기각한다. 소쉬르는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에 전적으로 독립적이라는 입장이다. 언어는 규약의 체계, 기호의 체계이고, 이는 랑그와 파롤의 구분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예비적 고찰들은 소쉬르가 언어적 기호들이 그 자체로는 정의될 수 없고, 다른 기호들과의 연관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게 한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자의적 관계라는 테제, 그리고 언어는 기호들 간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기호의 체계라는 명제는 언어학을 엄격한 과학적 학문으로 만들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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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의 구조주의적 방법론은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사회과학자들이 구조주의 방법을 사회관계라는, 비언어적인 상징체계에 적용하기까지는 시간문제였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사회학자, 인류학자. “구조주의의 아버지.” 그는 인간의 마음과 문화에 내재하는 무의식적인 구조를 찾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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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의 짧은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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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의 주저, 『친족의 기본 구조』,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 
『친족의 기본 구조』는 뒤르켐을 떠올리게 함. 이 책은 뒤르켐의 조카인 모스의 『선물The Gift』에 많은 영향을 받음. 친족구조에도 증여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 그는 모스의 증여 원리 활용해 인류의 모든 문명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근친상간 터부를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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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상간 금기와 족외혼 규칙은 부족들에게 기능적 이점을 제공함. 그뿐만 아니라 친족체계는 기호체계로서 분석될 수 있음.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마음은 언어와 같이 이항적 원리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았음(로만 야콥슨의 idea). 친족체계나 선물교환 체계는 이항적 대립에 근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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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며 그는 인간의 문화적 형식이 이항 구조에 근거한다는 아이디어의 분석을 친족체계만이 아닌 다른 것에도 확장시킴. e.g. 『신화학 입문』. 

레비스트로스의 프랑스 학계의 영향은 그가 가진 ‘낭만적’ 모티프 때문이기도 함. 그의 저작은 서구 문명에 회의적이었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이었음.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고, 레비스트로스의 ‘과학적’ 면모도 중요했음. 그는 자신이 소쉬르의 언어 분석 말고도 맑스의 저작이 그에게 구조의 ‘잠재적’ 속성을 깨닫게 하는데에 중요했다고 말함. 잠재적 구조가 표면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면, 구조적 분석으로 의식되지 않는 요소들을 파헤치는 것은 한 학제의 과학적 방법임을 보증하는 것임. 

(353-4)
실존주의의 “주체성의 환상illusion of subjectivity”을 떠나 인간 마음의 잠재적 구조를 분석하는 “과학적 열망impluse”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매력적이게 한 것임. 
이후 (1960년 중반 이후) 많은 프랑스 학자들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적 방법을 따라했다. 구조주의는 많은 학제에서 만연했고 프랑스 학계를 지배했다: 정신분석학 (자크 라캉), 철학, 사회학, 정치학 (알튀세르, 풀란차스Poulantzas), 기호학, 문화분석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 “스타”들이 다 죽으면서 구조주의의 황금기는 끝나게 된다. (풀란차스: 1979년에 자살; 바르트: 1980년 교통사고; 알튀세르: 아내를 목 졸라 죽임; 라캉: 1981년 사망; 푸코: 1984년 에이즈로 인한 사망) 
구조주의가 남긴 유산도 그리 인상깊지 않다. 맑시즘은 소련 굴락에서의 범죄에 대한 논의가 불붙었을 때부터 프랑스에서 지반을 잃었고 1989년 매우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잃었다. 맑시즘이 지적으로 영향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풀란차스와 알튀세르의 아이디어를 갖고 실용적으로 뭘 하기는 어려웠다. 바르트의 문화분석도 체계적인 문화사회학에 쓰이기에는 부적절했고 역시 사회과학에서 아주 주변부 영역만 라캉에 관심을 기울였다. 등등... 
하지만 미셸 푸코의 경우는 다르다. 

355-64: 미셸 푸코 설명 
365 포스트구조주의: 데리다 
366-8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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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는 무엇보다도 현대 시대 진단이라는 측면에서 사회과학에 영향력을 줬다(특히 푸코와 리오타르의 저작을 통해). 
하지만 이들 이론이 구성된 방식은 이들이 사회 변동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을 생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충분히 논리적으로, 구조주의의 급진적인 반-주관주의는 행위이론 측면에서도 별로 기여하지 못 했다. 저자들의 테제는 사회학 이론의 발전이 사회적 행위-사회질서-사회변동의 개념적 세 쌍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인데 구조주의에 이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이것이 사회과학의 중심부보다는 주변부에 구조주의적 접근이 설 자리를 찾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때 구조주의는 좁게 정의된 인문학계 - 특히 문학 연구 literary studies - 에 매우 지배적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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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
François Dosse: History of Structuralism 
Manfred Frank: What is Neostructuralism? 

푸코 관련 책 추천
Axel Honneth의 Critic of Power의 관련 있는 챕터
Dreyfus and Rabinow의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