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만, 『액체근대』.

2019. 7. 4. 00:12

63쪽 “우리 시대는 희생양을 환영한다.” 

바우만은 근대화의 충동을 “현실을 비판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 비판의 대상이 자신들의 사적 삶으로 향할 때 개인들은 “자기 책망과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공적 영역이 부재하고 사회 변화의 언어가 개인의 권리 주장으로 환원된(50쪽) “유동적 근대”에서 개인들은 책망과 자괴감을 극복하기 위해 주로 “희생양”을 택하게 된다고 바우만은 주장한다. *

이러한 시대에서 기존의 비판이론은 유효를 다했다고 바우만은 단언한다.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식의 비판이론이 향했던 시대가 이제 지나버렸다는 것은 노베르트 엘리아스 책의 제목이 개인 대 사회가 아닌 ‘개인의 사회’라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가 근대의 합리화하는 경향, 즉 도구합리성에 의해 종속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성의 정당성이 자기비판이 아닌 오직 형식적·법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인정되는 상황을 비판하고자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사회는 ‘관리자’들에 의한 통제사회로 접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개인의 권리 주장이 확대되고 이상적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부재해진 ‘액체 근대’로 접어들었다. 1) 

이러한 액체 근대에서 개인은 일견 해방된 듯하지만 바우만이 강조하는 것은 “운명으로서의 개인성과 자기주장을 위한 실제적, 현실적 능력으로서의 개인성 간에 점차로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57)는 것이다. 주류 미디어는 이러한 간격을 ‘상담자’를 내세우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하지만, 사실 그 극복은 공적 공간을 복원시키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닌 상담자 개인의 극복사례를 통해 개인의 문제들(많은 이들이 그것을 겪고, 그 문제들이 카테고리화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철저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닌)을 개인의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점이 또한 바우만의 비판에서 중요한 것이다. 비판이론의 과제(해방)는 완수되지 못했지만 그것의 문제의식의 출발 지점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셈이다. 2) “현 단계에서 해방이라 함은 오직 법적인 개인의 자율성을 실제적인 자율성으로 바꾸는 과업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81) 

*) 바우만의 많은 현대사회 분석들은 ‘희생양’(보통 극빈층, 이민자, 범죄자 등 = 통칭 ‘인간 쓰레기’)이 정해지는 과정, 그들이 처리되는 과정 등에 향해 있는데 이것은 ‘액체근대’의 문제의식 하에 있는 것 같다. 

1) 어떠한 요인들이 이 과정에 개입했는지 분석하고 묘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g. 탈포드주의적 생산양식, 개인의 행복 및 권리, 자유, 정체성의 인정과 같은 식으로의 정치 담론 변화(특히 68운동), 전쟁 등으로 인한 이성에 대한 회의, 정보화, 복지국가의 붕괴 및 세계화 등... 특히 서구의 ‘생활정치’ 운동이 ‘액체근대’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의 소임은 절반은 완성된 것이 아닌가. ‘창조성’, ‘다양성’, 기타 이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생활양식의 개별성과 성 해방 같은 의제들이 주류에서도 공인화된 셈이니... 사실 말들은 무성한데 아직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고 비판하는 글은 읽어보지 못한 듯. 

2) 텍스트를 읽으면 기존 비판이론가들이 창조성과 자율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바우만은 이에 대비되게, ‘자율을 보장하는 사회 없이는 자율적 개인이 없다’며 대문자 정치가 수행되는 공적 영역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뒤르켐이 연상되는 주장이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과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82) 그런데 이것은 사실 하나마나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당연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걸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공적인 것/사적인 것이라는 개념쌍은 매우 다의성을 갖고 있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딱 좋다. 바우만의 글은 드는 예시들이나 은유들, 인용구들이 탁월해서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이런 점에서 엄밀한 개념 정의가 없어서 좀 힘든 것 같다. 


1장 ‘해방’에서 바우만은 ‘고체 근대’와 구분되는 ‘액체 근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는 진보의 목적이 존재하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붕괴한다는 것, 두 번째는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폐지되고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점”, “전체로서의 사회가 입법적 행동을 함으로써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이상”에서 강조점이 “개인의 자기 권리 주장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3장 ‘시공간’에서 바우만은 ‘액체 근대’의 “지속되는 시간의 폭을 단축시키고, ‘장기간’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고, 지속보다는 순간을 조절하는 데 집중하고, 순간적이고 즉각 써버릴 또 다른 것들을 들여오려고 기존의 모든 것을 가볍게 버리는 ...”(202) 특성을 지적한다. 

3장의 이러한 정의는 1장의 정의와는 일견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진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붕괴했다는 것은, (전기통신 등의 테크놀로지 발전에 힘입은) ‘장기간’이라는 지속적 시간을 상상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의 결과일 수 있다. 또한 ‘고체 근대’, 포드주의의 시대에 자본은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한 장소에 눌러 앉아 있었는데, 그 장소에서 자본은 노동과 결혼 서약을 맺어 자본에게는 지속적인 축적을, 노동에게는 안정과 임금 상승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미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깨져 버렸고 기업이든 국가든 ‘붙박혀 있는’ 대신 ‘군살을 빼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하청과 외주 주기, 비정규직 비율을 늘리기, 조세 피난처를 이용하기, 실물경제 노동을 희생시켜 부채비율을 줄이고 좋은 신용등급을 받기 등의 ‘군살 빼기’ 전략은 공공의 이상을 수립하고 공적 방법으로 그것을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사적 권리와 이익의 추구에 골몰하는 액체 근대의 다른 특성과 닮아 있다(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시장만능론이다).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nationalism)을 옹호하는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보다 온건하고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애국주의(patriotism)이다. 이는 종족성(ethnicity)이나 출신 지역, 언어와 같은 태어날 때 주어진 특성에 근거한 공동체에의 애착을 강조하기보다는 어떤 정치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다원주의적 규범이나 가치를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하버마스가 이러한 입장의 옹호자이다. 둘째는 종족적 민족주의인데, 대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의 상이 여기에 부합한다. 

바우만은 이 둘에 대해 이런저런 논평을 하는데, 우선은 사실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나 비슷한 정치적 이념의 다른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시선을 보낸다(278-9쪽). 그리고 많은 경우 애국주의들은 국외자에 대해 “온화하고 동정적인” 시선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사적 표현 자체에 어떤 실용적 의미가 있기도 한데, 말인즉슨 “애국심은 미완성에 대한 근대의 신조”를 표현하며, 민족주의는 “소속”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280). 

한편 바우만은 “일체성” 개념을 발전시킨 크릭을 소개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일체성의 공화주의적 모델,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데 참여한 주체들의 연합적 성취인 새롭게 출현한 일체성이라 할 수 있다.”(284) 그런데 액체근대에서 일체성은 공동체 내에서 공적인 방식으로, ‘연합적으로’ 성취되기 어려워 보인다. 사회적 행위자의 ‘문화적 심리적 특수성’은 개인에게서 찾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액체 근대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는 “사적인 동기에 맡겨지”고, “지방 행정당국들과 지방 경찰이 바로 가까이서 조언과 지원을 해주고 있다.”(288) 여기서 바우만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 이전 장에 묘사된 액체 근대의 ‘게토’와 같은, 높은 담이 쳐지고 사설 경비업체가 경계를 서는 아파트 단지 같은 공간들이다. 

이러한 공간의 특징은 무엇일까? 사실 안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대안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공간에서 일체성,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란 없는 셈이다. “‘비슷함을 나누는 공동체’에 대한 꿈은 근본적으로 자기애가 투사된 것이다.”(288) 그러한 아파트 단지에서 서로의 비슷함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사후에 확인되는 것이다.(비슷한 소득 수준, 교육 수준, 성장 환경 등.) 

그런데 안전에 대한 갈망 뿐만이 아닌 우리의 정치 담론도 많은 부분 액체 근대 식의 ‘일체성’ 발견 방식에 정향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근대 유럽에서의 민족주의가 민속 문화, 민속 음악, 민족 언어를 발견했듯이 지금의 여러 사람들도 마치 주어진 확고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 같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성적 지향/정체성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어떤 ‘짤방’을 본 적이 있는데, 외우기도 어려운 demi- poly- 등의 접두어가 붙은 성적 지향/정체성이 형형색색의 깃발과 함께 스무 개 정도 나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자기정체성 주장은 “주체의 기술과 결의”(284쪽) 그리고 그것을 관용해줄 무관심한 타인에 적극적으로 호소하면 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