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만, 『새로운 빈곤』.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
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 푸어>, 이수영 옮김, 천지인, 2010.
Zygmunt Bauman,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 2nd Ed. Open University Press. 2005.
* 개정판이 동녘 출판사에서 다른 역자에 의해 출판됨. 번역은 어떨지 모르겠음.
일부 요약
노동윤리 (1부 1, 2장)
(1) 노동 윤리를 불어넣기
근대 산업화 초기 유럽에서,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노동 윤리(work ethic)를 노동자들에게 불어 넣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산 수단에 의한 노동에 통제에 익숙하지 않던 노동자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생활 리듬을 따르고, 왜 만족함 없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또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했다. 공장주들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공장에서 상당한 감독과 규율을 동반하였다. 한편, 신빈민법은 빈곤층에 대한 외부 원조를 폐지함으로써, 빈민들에게 “노동하든가 굶어 죽든가”(work or perish) 양자택일의 상황만을 남겨 놓았다. 이러한 식으로 노동자들에게는 자주성을 잃어버린, 공장의 철저한 규율화된 노동 외에 주어진 선택지는 없게 되었다. (cf. ‘열등처우’ 원칙)
(2) 미국: 포디즘 그리고 소비자 사회
미국에서는 유럽과 같은 식의 강제와 규율을 동반하는 노동윤리가 팽배하지는 않았다. 대신, 미국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이 가져다 주는 물질적 이익을 강조했다. 과학적 방법으로 세분화된 규율(테일러, “과학적 관리”)에 순응하고 노동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것이다(=포드주의). 포드주의가 성공을 거두면서 점점 노동 자체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이전의 레토릭은 효력을 잃게 되었다. 공장주들은 강제와 규율을 통해 노동윤리를 불어 넣지 않더라도 노동에 상응하는 물질적 보상을 제공하면 노동자들은 자율(autonomy)과 자유(freedom)에 대한 질문 없이 알아서 일을 할 터였다. 이렇게 근대 사회는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3) 소비자사회 및 복지의 변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소비자 사회에서 노동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품의 소비를 지탱할 수요와 욕망이다. 오늘날 기업들은 오프쇼어링을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는다. 기술의 발달로 노동력의 필요는 빠르게 감소한다. 노동윤리의 필요성은 공허해지고, 노동윤리는 더이상 국가의 부와 유관해지지 않게 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윤리는 빈민을 차별하기 위한 식으로 작동하며, 복지 역시 사회 구성원의 역량을 키워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기보다는 노동할 의지가 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을 가려내는 ‘근로연계복지work-fare’로 구성된다. 최하층 빈민들은 노동하지 않는, 주류로의 진입에 대한 욕망이 없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 찍어진다. 빈곤층은 사회의 기능 부전이 만들어낸 도움의 대상이 아닌, 사회의 복지에 기생하고 의존하는 노동윤리를 저버린 존재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회 구성원들은 빈곤층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갖지 않게 되는 식으로 노동윤리는 작동하게 된다.
"잉여적 인간"
(1) 지구는 만원?
바우만이 말하는 ‘잉여적 인간’의 형성, 처리 과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러한 단절은 “지구가 만원(our planet is full)”이 되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지구상에 식민화와 이주에 개방된 지역이 이제는 더 없다. 잉여적 인간들은 고용·임금 수준의 문제와 관련해 발생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고, 경쟁 등으로 기 존의 산업들이 파괴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생계 수단을 빼앗기게 된다.
많은 경우에 그들 “과잉 인구”(Marx)들은 잉여적 인간이 된다. 일찍 근대화된 국가들이 식민지 등에 잉여 인구를 내보낼 수 있었던 때에 잉여적 인간의 배출은 주로 이주였다. 이주를 통해 잉여적 인간을 배출함으로써 일자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수를 줄여 기존 산업의 고용·임금 수준의 위기를 해결하고 나중에 불만 분자나 혁명 세력으로 그들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후자의 사례로 1848년 6월의 프랑스 혁명이나 1871년 코뮌을 예로 들 수 있다. 정부는 도시 내부에 있는 불만 세력들을 알제리나 뉴칼레도니아 같은 미개발된 식민지로 보내 본국에서의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 미개발지를 산업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지 지역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은 주변화되거나 몰살되었다. 한편 식민지로 이주한 잉여 인구들은 “경제적 이민자(economic migrants)”라는 미화된(?)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2) 지구가 만원인 시대의 이주와 노동력 재조직
하지만 지구가 주권 국가들로 꽉 찬 지금, 상기한 사례들처럼 대규모의 잉여 인구들을 어딘가로, 영구적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현재 "인간쓰레기"의 생산이 줄어들거나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렇기는 커녕 "인간쓰레기"는 이전보다 더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책에서는 지적. 국가의 질서 유지나 경제 발전이라는 원인 말고도 지구화라는 요인이 더해져, 다국적 기업들은 비용 절감의 명목으로 저개발된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주며 착취한다. 선진국도 예외는 아닌데, 많은 공장들이 저개발 지역으로 이주하며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더욱 발전된 통신 기술과 생산 기술, 편리해진 아웃소싱 등에 힘입어 기업은 ‘효율적으로’ ‘다운사이징’하며 노동자 들에게 ‘새출발’과 자기계발의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형성된 인간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이주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까? 분리 정책과 엄벌주의를 들 수 있다. 분리는 말 그대로 인간쓰레기와 인간쓰레기가 아닌 사람들을 지역적으로 격리하는 것이다. 인 간쓰레기와 인간쓰레기가 아닌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개인은 사설 보안 업체를 사용할 수 있다. 엄벌주의는 인간쓰레기로 낙인찍힌 범죄자들을 강력하게 처벌시켜 앞으로는 더이상 사회에서 볼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교화나 교정은 무시된다.
*(이런 지점에서 Wacquant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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