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이상길, 배세진 옮김. 킹콩북. 2019.

 

 

저번 달에 단숨에 읽은 책이지만 정리를 해 두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우선 이 대담에서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말들의 많은 부분은 강연문과 대담이 있는 다른 책인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에 좀 더 정리되어 있고 풍부한 형태로  실려 있다. 만약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를 읽은 독자라면 이번 대담집을 부담 없이, 부르디외의 생각들—사회학자의 역할이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사이 대립 등 사회학의 잘못된 이분법에 대한 의견—을 다시 한번 환기하는 겸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 대담집의 제목이 왜 이렇게 붙여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을 주로 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경험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101-6쪽, 엘리아스와 부르디외의 작업을 비교하는 부분. 

“저는 (…) 더구나 거대한 경향적 법칙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자주 권고합니다. 베버가 말하는 합리화 과정도 마찬가지고, 엘리아스가 어느 정도 발전시킨, 국가에 의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화 과정도 예외는 아니죠. 거기에는 실제로 목적론의 위험이 있으며, 단순 묘사를 설명으로 치환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저는 푸코의 ‘감금’ 개념 역시 염두에 두고 있는데요, 이런 개념들이 저를 좀 불편하게 만듭니다.”(부르디외, 102-3쪽) 

사실 대담의 후반부로 갈수록 부르디외가 제기했던 사회학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언명 대신, 역사학자인 로제 샤르티에가 콕콕 찌르는 질문들에 맞춘 부르디외의 그의 경험 연구 경력에 기반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부르디외의 코멘트들이 어떤 연구에서 구체화된 것인지는 역자들이 각주에서 잘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굉장히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을 듯하다. 

아래의 인용문에 관해서는 『초대』에서도 비슷한 말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부르디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주저 앉아서 울고 싶어진다.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 사람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환상입니다.”(49쪽)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그는 사회학의 객관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정말로 심지가 굳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런 활동이 저를 때때로 괴롭게 합니다. 사회학자로서 제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자문하고 과학적 작업의 기능에 관해 고민에 빠지는 것이죠. 이를테면, ‘사회세계에 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일인가? 비밀이 없는 사회세계는 정말로 살 만한 곳인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문화가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노동이 무엇인지 등에 관해 우리가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인식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수많은 종류의 고통과 비참이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의 거대한 탄식 아래서 잊히는 대신에, 급격히 개선되고 사라지거나 적어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56쪽) 

대담자 로제 샤르티에는 이것이 유토피아에 가깝지 않냐는 말을 한다. 유토피아주의라는 딱지에 대해 부르디외는 딱히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과학 장의 규칙이 잘 작동한다면 과학은 “잠정적 진실”을 생산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바로 이 작고 보잘것없고 당연한 확신 때문에 정말로 우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