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an Szelenyi (2015). "The triple crisis of sociology." Contexts. https://contexts.org/blog/the-triple-crisis-of-sociology/


일부 번역 


앨빈 굴드너는 45년 전인 1970년에 <서양 사회학의 다가오는 위기>를 출판했다. 다른 대부분의 위대한 이론들처럼 그것은 황혼이 와서야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였다. 굴드너는 파슨스적인 (유사quasi)-실증주의적 기능주의의 몰락과 보다 성찰적인 사회학의 부상을 예견했다. 물론 1970년에 와서 파슨스주의 사회학은 죽음을 맞았고 사회학은 가장 신나는 시대에 돌입했다. 앨빈 굴드너, 젊은 마티 립셋, C. 라이트 밀즈, S.M. 밀러, 리 레인워터, 피에르 부르디외, 데이비드 록우드, 랄프 밀리반드, 클라우스 오페, 젊은 랄프 다렌도르프 (그 당시에는 경Lord이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이 신선한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사회학을 제기했다(당시 사회주의였던 동유럽의 몇몇 인물들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스체크 콜라코프스키, 유고슬라비아의 Praxis 그룹 등). 1960년대와 70년대의 작업들은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을 매료시켰는데,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 우수한 학생들도 끌어들였다. 당시 굴드너가 사회학의 위기를 예고했을 때 위기는 끝난 것처럼 보였고, 사회학은 구조기능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사회학은 번성했으며 급진적인 학생들의 메카였다. 그리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급진적 경향이 있는 학생들은 보통 똑똑하기 마련이었다. 


사회학 입문 과목(Sociology 101)은 원래 이해할 수 없고 경험적으로 검증도 안 되는 개념들이 꽉 들어찬 전화번호부 같았으나 이제 그것은 정치적 동원의 장이 되었다. 갑자기 수강생이 확 늘은 것이다. 1950년과 1972년 사이 사회학 전공 수강생의 수는 거의 350%가 늘었다. 그것이 정점을 찍은 1971-72년, 100개의 학사 학위 당 사회학 학위 수는 4개 정도였다. 현재 수준보다 거의 두 배인 것이다. (도표를 보라).


세기의 전환기 즈음 위기는 도착했다. 경제학으로 시작해 그 뒤 정치학이 뒤따른 사회과학은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신고전파 경제학, 합리적 선택 이론, 그리고 실험적 연구 디자인은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고 사회학자들은 여전히 그것에 응답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학생들은 급진적 이론에 관심을 잃었다. 많은 이들은 보수적으로 되었고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인지 연금은 어떻게 될지를 보다 더 걱정하게 되었다. 사회학 학과는 교수진의 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전공생을 받으려고 자주 분투했고, 또 충분한 수강생을 확보하기 위해 자주 "섹시한"—보통 별로 수강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강좌들을 열었는데 그 강좌들은 사회학의 중심적 문제였던 것들과 모호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이슈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사회학을 경제학이나 정치학과 비교한다면 사회학은 삼중의 위기를 겪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회학은 정치적 어필(그리고 급진적인 사명)을 잃었다. 경제학과 합리적 선택 이론으로부터의 방법론적 도전에 사회학은 아직까지 적절한 응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학은, 사회학이 공통의 이론적인 핵을 가지고 있는지(어떤 책이 모든 사회학자들이 친숙해야만 하는 "위대한 책"인지)에 대해 엄청난 혼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며, 심지어는 그런 중심적 핵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지 논쟁하고 있다. 


정치적 위기 


1960년대 중후반기와 1970년대 초중반기 사회학은 급진적인 교수진과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만약 급진적 개혁이나 혁명에 관심이 있다면 사회학은 "해야 하는 것thing to do"이었다.


1976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의 플린더스 대학교에서 사회학의 Foundation professor로 임용된 후, 개혁적 성향의 법무장관인 피터 던컨이 그의 오피스로 나에게 방문을 요청했다. 그는 포르투갈에서의 "혁명"을 상기시켰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대에 의해 수행된 혁명이었다. "음, 호주의 군대가 혁명군이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냥 잊어버려요", 그는 계속했다. "그러나 저는 국가의 공무원입니다. 저는 그들을 플린더스로 보내 사회학 전공을 하도록 시킬 것이고, 당신의 임무는 그들에게 혁명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은 일어났다. 나는 사회학 입문 강좌에 가장 큰 강의실에 앉을 수 있는 것보다 세 배는 많은 지원자를 받았고 실제로 첫 해에 많은 학생들은 급진적 개혁가였으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 신념이 있었다. 음, 1977년 노동당은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선거에 졌고, 피터 던컨은 따로 로펌을 차렸으며 그것은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의 급진적 개혁의 끝이었다(그리고 플린더스에서 "카리스마적인 사회학의 리더"로서의 내 커리어의 끝이기도 했다). 


모든 사회학 교수들이(젊은 사람들조차도) 학생들의 급진적 변화와 발을 같이 할 수는 없다. 나는 165년 봄 버클리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았다. 마티 립셋과 같이 강좌를 수강했고, 내 지도 교수는 네이선 글레이저(참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이었는데, 둘 모두 학생들의 급진화에 대한 반응으로 보다 보수적이 된 전(前) "좌파lefties"들이었다. 간단히 말해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의 교수진들은, 학생들은 좌익 급진주의자였지만, (특히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다(아니면 적어도 보수파 혹은 "신자유주의자"로 변했거나). 나는 플린더스에서 선배 동료들에 대해서 불만감을 학생들과 상당히 공유했는데, 이것이 내가 학장이나 부총장으로 승진하는 것을 막았고 내가 1981년 미국으로 가게 만들었다. 오늘날 상황은 정반대이다. 우리는 1960년대의 급진적인 교수진들을 상당히 많이 갖고 있으나, 학생들이 교수진보다 더 보수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보수주의자라면 대체 왜 경제학이나 합리적 선택 정치학 말고 사회학을 전공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매우 급작스럽게 우리의 문제는 사회학을 전공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리를 찾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 강의실을 채울 학생들을 우리가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변했다. 이것이 내가 "정치적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양쪽에 적용된다. 우리는 충분한 수의 학생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고, 사회학은 점점 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의 시나리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