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과 정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짧은 글은, 1996년 3월 부르디외가 콜레주 드 프랑스 대중 강연의 일환으로 진행했고 역시 TV에 방영된 “텔레비전에 대하여On Television”라는 강연의 프롤로그 격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강연은 역시 『텔레비전에 대하여On Television』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저널리즘과 정치”라는 글은 영역본에는 존재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에는(『텔레비전에 대하여』, 현택수 옮김, 동문선, 1998)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은 비록 분량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 장의 작동 구조에 대한 생생하고도 신랄한 묘사를 통해 이후 강연에서 더 깊이 있게 전개될 미디어 비판을 응축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텍스트를 저본으로 해 영문으로부터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Pierre Bourdieu. 1998. “Journalism and Politics.” in On Television, trans. P. Ferguson. New York: The New Press. pp.1-9.


곧 차례로 다른 모든 문화 생산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저널리스트들이 처해 있는 숨겨진 제약들을 밝힌다는 것이 곧 책임 있는 자들을 비난하거나 죄인들을 손가락질하려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각주:1] 대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당사자들이 의식적 노력을 통해 억압의 메커니즘의 손아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려는 것이자, 또한 어쩌면 예술가들과 작가들, 학자들, 그리고 저널리스트들, 즉 정보 전파의 수단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이들에게 공동 행동의 프로그램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공통된 노력을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연구가 이룩한 가장 보편적인 성취물을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가능해질 것이고, 또한 실천적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으로의 접근 조건들을 보편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가장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들이 이 책[『텔레비전에 대하여On Television』]의 분석을 두고 격노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각주:2] 물론 이것은 책임을 부인하려는 시도이지만, (적어도 글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람들이나, 동업자들이나 비슷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 사람들을 제외하면) 본인들이 저격을 당했다고 느낄 리는 없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의 고결한 분노는 “전사(轉寫) 효과(transcription effect)”, 즉 옮겨 씀으로 인해 톤, 제스처, 얼굴 표정 같은 비언어적 표현들이 삭제되는 효과에 기인하는 것일 테다. 공평한 독자라면, 무엇이 서로의 이해를 위한 건설적 토론과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들이 읽어낸 비난들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분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들이 왜 분노했는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저널리스트적인 시각에 전형적인 몇몇 특징들(몇 년 전 나온 책 『세계의 비참La Misère du monde[각주:3]』을 쓰는 강한 동기가 된 바로 그 특성)일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보통 “폭로”라고 부르는 것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경향이다. 그것은 사회 세계의 가장 뻔한 요소들만을 강조하고, 개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특히 무엇을 잘못하는지에만 집중하고, 성급하게 비난하거나 고발하려는 자세이다. 이 모든 경향들은, 개인의 행위와 사고에 영향을 끼치는 보이지 않는 구조와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우리를 분노에 찬 비난이 아닌 공감적 몰입(sympathetic indulgence)로 이끄는 이해—를 가로막는다. 다른 한편, 저널리스트적 시각에는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된 방법보다는 분석가의 (추정된) “결론”에 초점을 맞추는 성향이 있다. 내가 10년 간 행한 연구의 결과이자 요약인 『국가 귀족: 권력 장의 엘리트 학교들The State Nobility: Elite Schools in the Field of Power』의 출판 이후, 나는 한 저널리스트가 나에게 그랑제콜(Grandes Écoles)에 대한 토론회를 제안한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거기서 그랑제콜 졸업생 연합의 회장은 그랑제콜에 찬성하는 입장이고 나는 반대하는 입장일 터였다.[각주:4] 그 기자는 내가 왜 거절을 했는지 이유조차 모를 것이다.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내 책을 훑은 저널리즘계의 “큰손”들은 그냥 간단하게 내 방법론(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장으로서의 저널리즘 분석)을 괄호 쳐 버렸다.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도 못한 새에, 그들은 내 책을 성급한 독설과 분노로 점철된 낡아빠진 정치적 견해들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하지만 그 방법론이야말로 정확히 내가 여기서 다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오해가 또 생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저널리스트 장이 어떻게 정치 장에 대한 특수한 시각—장 속에서 그리고 장에 의해 생산된 저널리스트들의 특수한 이해관심과 저널리스트 장의 구조에 기반을 둔 시각—을 생산하고 사람들에게 부과하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자칫 지루해지면 안 된다는 공포와 어떤 수를 써서라든 즐겨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정치는 매력이 없는 것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황금 시간대로부터 가능한 한 배제되어 있어야 할 것이 된다. 그러므로 정치가 만약 미디어에서 다루어져야만 하는 한에서는, 이 그다지 재밌지도 않고 사실 우울감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광경은 흥미로운 것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이런 필요는 왜 유럽과 미국에서 진지한 논평가와 탐사 보도를 하는 리포터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토크 쇼 호스트들이 꿰차는 경향이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것으로 역시 왜 진짜배기 정보, 분석, 심층 인터뷰, 전문가들의 논의, 그리고 진지한 다큐멘터리들이 순전한 엔터테인먼트에 밀려나는지, 특히 어째서 서로 교체되어도 분간을 못 할 것 같지만 “출연이 공인”되었다는 출연자들끼리 지껄이는 멍청한 토크 쇼 잡담에 밀려나는지 설명이 된다. (뒤에서 나는 예로 들기 위해 그들 중 몇몇의 이름을 언급하는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 것 같다.) 이 무대 위의 “대화들”에서 무엇이 말해지는지, 그 중에서도 특별히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인들이 “패널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선발되는지의 과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 패널리스트들은 언제나 토크 쇼에 즉시 출연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고—이는 그들이 단순히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게임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그들은 질문이 얼마나 멍청하거나 엉뚱한지에 상관 없이 저널리스트들이 묻는 모든 것들에 답하곤 한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는 곧 현안들에 간여할 수 있거나 아니면 “미디어”에서의 유명세가 줄 수 있는 직간접적 혜택—미디어 세계에서의 명성, 강연을 돌면서 받을 수 있는 목돈 등등—을 받을 수 있는 한, 그들은 (논의 중인 주제나, 다른 참여자들이나, 기타 등등에 대해) 어떤 양보든 타협이든 거래든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덧붙여, 특히 미국과 유럽의 방송 프로듀서들이 행하는 선발 면접에서, 방송 출연 후보 패널리스트들은 그네들의 입장을 복잡하지 않게 명료하게 확 와닿는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그들은 복잡한 지적인 숙고가 가져다 줄 수 있는 난처함을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금언이 있지 않은가.)

저널리스트들은 대중들이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돋움으로써 정보를 전달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방송의 민주적인 목표와는 아주 상반되는) 이런 선동적인 단순화를 정당화한다. 그렇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성향과 시각을 대중들에게 투사(投射)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지루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논쟁보다 충돌을 선호하고, 엄밀한 논증보다는 비난을 선호하고, 그리고 서로의 갈등을 촉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주장들에 맞서는 것이 아닌 그 사람들 자체(특히 정치인들)에 맞서는 것을 선호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논쟁에서 무엇이 실제로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는지, 즉 예산 삭감이 문제인지 세금이 문제인지 보호 무역이 문제인지 등을 캐묻지 않는다. 저널리스트 본인들이 기자로서 능력이 있다는 전문성의 근거가 그들의 관찰이나 탐사의 객관성에 기반한 것이 아닌, 내부 정보(심지어 루머나 질 나쁜 가십들)에 대한 접근과 같은 정치 영역 내부자들과의 깊은 교류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은 자기들의 앞마당에 들러 붙어 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실제로 사건의 핵심 대신 게임과 플레이어 자체에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들의 관심사이자 전문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의 내용보다는 정치의 전략에만 관심이 있으며, 정치 연설과 정치 장(political field)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치인들의 책략(연합, 동맹, 혹은 개인들끼리의 갈등 등)의 의미보다는 그것들이 만드는 정치적 효과에만 집중한다. (저널리스트들이 이슈를 만들어 내지 않을 때에도, 이런 것들이 있다. 예컨대 1997년 프랑스의 선거에서 있었던 질문, 좌파와 우파의 경쟁이 사회당의 당수인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과 보수파 총리인 알랭 쥐페(Alain Juppé) 사이에서 일어날지 혹은 네 명의 정치인, 좌파 편에서는 조스팽과 그의 공산당원인 동맹 로베르 휴(Robert Hue) 그리고 우파 편에서는 쥐페와 중도파 동맹 프랑수아 레오타르(François Léotard)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날지 질문이 있었다. 겉보기에 중립적인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질문의 강조점은 좌파 측에서 있을 지도 모르는 분열에 초점을 주어 보수파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저널리스트들은 정치 세계에서 모호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들은 굉장히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지만 정치 세계 내에서 훈련받은 구성원들은 아니다. 이런 위치 덕분에 저널리스트들은 (현재 인맥과 연줄이 저널리스트들과 그들이 낸 책에 호의적인 리뷰를 보증하는 출판계를 제외한다면) 보통은 그들이 스스로는 얻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지원(symbolic support)을 정치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저널리스트들이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모두를 모함하고 “중상모략 말고는 하는 말이 없는(argues nothing but scandal)” 추하고 비겁한 “수다쟁이(thrower of words)” 테르시테스처럼 세상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5] 대체적으로 저널리스트들은 속류 회의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가장 정직한 신념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추구치 않는(disinterested) 정치적 입장마저도 정치 장 내부에서의 특정한 위치와 관련이 있는 이해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이 모든 요소들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주장이나 인터뷰 질문지에서도 나타나듯이 저널리스트들은 정치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정치란 신념은 없지만 정치판의 경쟁 구도와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명료히 간파하고 있는 야망에 가득 찬 사람들로 들어차 있는 결투장(arena)과 같은 것이다. (그런 식의 노골적으로 계산적인—꼭 냉소적일 필요는 없지만—정치 마케팅으로 정치인들을 돕는 정치 컨설턴트와 조언가들에 의해 저널리스트들은 이런 태도를 갖도록 요구받는다. 이제 점점 더 정치적 성공은 저널리스트 장의 요구에 얼마나 순응하느냐에 달려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저널리스트 장 역시 정치인들을 “띄우고” 그들의 이름값을 높이는 일을 책임지는 “코커스(caucus)”가 되었다.) 이렇게 정치의 “소우주(microcosm)” 및 그에 따른 사건들이나 결과들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저널리즘은 대중들과 단절되기 마련이다. 적어도 사람들의 삶과 사회 전반에 대해 내리는 정치인들의 입장들로 인해 가장 심대한 영향을 받는 대중들과는 괴리가 생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절은, 특히 유명한 TV 스타들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그들의 높은 경제적·사회적 지위로 인한 사회적 거리 때문에 더욱 배가되고 살며시 강화된다. 1960년대 이래로 미국과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미디어 스타들이 이미 높은 연봉을 받고 있지만서도(유럽에서는 보통 십만 달러나 그 이상, 그리고 미국에서는 수백만 달러를 받는다[각주:6]), 거기에 더해 그들이 토크 쇼에 출연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정기적으로 신문에 기고를 하거나, 다양한 “거래들”(특히 연례 컨벤션이나 전문가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터무니 없이 과도하다 싶은 사례금을 챙긴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 되었다. 저널리스트 장으로 분배되는 권력과 특권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음은 이 때문이다. 몇몇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의 상징 자본을 보전하고 늘려야만 하는 삼류 자본주의 기업가처럼 행동하는데, 왜냐하면 미디어에 자주 나와야 강연장에서 더 높은 페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불안정한 직업 상황 때문에 자기검열에 빠지게 된 준프롤레타리아(subproletariat) 저널리스트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각주:7]

이 책에서 더 논의되겠지만 저널리스트 장 내부의 경쟁으로부터 비롯한 여러 요소들도 언급이 되어야겠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특종”에 대한 집착이나, 혹은 얻기 힘들거나 가장 최신인 정보에 대한 무비판적인 선호. 혹은 가장 교묘하고 기묘한 해석(보통은 가장 냉소적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비롯된 과장하려는 버릇. 아니면, 현재 진행 중인 사건들을 집단적으로 망각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예측하기 게임(the predictions game). 그런 예측들이나 시대 진단은 (스포츠 게임에 베팅하는 것처럼) 그저 내리기 쉬울 뿐만이 아니라 틀려도 전혀 비난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세상 사건들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저널리스트들의 보도들이 쉽게 잊혀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의 예측은 안전하게 보호받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단 망각은 왜 1989년의 몇 달 동안 전 세계 저널리스트들이 멋지게 수립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들을 칭송했다가 그 다음에는 유럽에서 일어난 끔찍한 민족 학살을 비난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앞에서 묘사한 메커니즘들은 서로 합해져 탈정치화라는, 아니면 더 정확하게 말해 정치의 탈주술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정치가 중요한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지루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질 때, 엔터테인먼트만을 좇는 프로그램은 스펙터클한 광경이나 스캔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만을 끌고자 하기 때문에 시사 현안에 대해서는 침묵만이 감돈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시사 현안”들은 흥미를 끄는 사건에 대한 열띤 설명으로 축소되는데, 보통 이것은 인간 극장(human interest story)이나 버라이어티 쇼 사이 어딘가의 무엇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O.J. 심슨의 재판이 있다.) 결국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그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한데 모이는 시작도 결말도 없는 사건들의 장광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산 삭감 안건 바로 다음에 터키에서 일어난 지진이 보도될 수 있고, 살인 사건 재판과 함께 챔피언십을 딴 스포츠 팀이 보도될 수 있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대에 텔레비전에서 보도되는 것은 그저 선행 원인과 결과라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사건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실상 부조리극의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저널리즘은 미묘한 세상의 변화나, 혹은 대륙의 이동처럼 당시에는 지각될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영향을 끼치는 과정들에 대해 명백히 무관심하다. 그런 미묘한 변화에 대한 무관심함은, 저널리스트들의 그날그날만 수습하는 사고방식(day-to-day thinking)과 가장 최신 속보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속보 경쟁으로 인한 구조적인 망각을 반복하고 강화시킨다. 일상 생활의 날품팔이 노동자인 저널리스트들은 세계를 서로 관련 없는 스냅사진들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부족, 특히 관심과 정보의 부족을 고려할 때(연구 및 참고 자료들은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을 읽는 형식으로만 소개된다), 저널리스트들은 사건들을 (학교 폭력이 증가했다고 해 보자)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전달하는 데에 필요한 일들을 수행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사건들을 그것들이 속해 있는 유관한 관계들의 네트워크 속으로 (학교 폭력은 가족 구조와 연관이 되어 있는데, 가족 구조는 또 노동 시장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노동 시장은 역시 정부 고용 정책의 영향을 받는다, 등등) 재삽입할 수 없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저널리스트들은 정치인들의 영향, 특히 정부 관료들(이들은 다시 정치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의 영향을 받아 지금 그네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정치인들과 관료는 그들이 내리는 의사결정의 단기적 영향을 강조하고 싶어 하고, 또 그걸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극적인 “한 방”은, 시간이 지나야만 그 효과가 눈에 보이는 행위들을 경시하는 환경을 만든다. 

이러한 시각은 탈역사화된 것인 동시에 탈역사화하는 것이며, 파편화되는 것인 동시에 파편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전형적인 표현 양태는 TV 뉴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는 국가들이 차례대로 행진을 이룬다. 그 부조리들은 종국에 가서는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도 없게 될 것이며,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맥락 설명도 없이 나타났듯이 해결책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오늘은 자이르 공화국(Zaire), 어제는 보스니아, 내일은 콩고인 식으로. 어떠한 정치적 행위의 필요성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이런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은 끽해봤자 막연한 휴머니즘적 관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어떤 역사적 시각도 뒷받침되지 않은 채 그저 도매금으로 나열되는 서로 연관이 없는 이 비극들은, 역시 뉴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토네이도, 산불, 홍수 사건과 같은 자연재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다루기 쉬운 간단한 사건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제 거의 저널리즘적 의례가, 아니 확실히 저널리즘적 전통이 된 것처럼 보인다. 뉴스에서 다뤄지는 희생자들은 기차 탈선 사고나 다른 사고에 나오는 희생자들만큼이나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시청자들은 진정한 정치적 연대와 저항을 불러일으킬 요소들로부터 차단되게 된다.

정리를 해 보자. 특히 저널리즘 장에서 일어나는 경쟁의 특별한 형태의 결과로서, 또한 저널리즘 장이 부과하는 일상적 행위와 사고 방식들로 인해, 저널리즘 장은 역사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고 불가해한 자연재해의 연속들이라는 관점으로 세계를 재현한다. 저널리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계는 민족 분쟁과 인종 차별, 폭력, 범죄로 얼룩진 공간이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계는 혼란스럽고 이해가 불가능한 위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로부터 한 발을 빼고 있어야 한다. 시사 논평가들이 (특히 아프리카나 슬럼가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보통 그렇듯이) 자민족 중심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경멸을 쏟아낼 때, 저널리즘이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은, 범죄와 폭력이 어디에나 만연하다다는 오해가 안전에 대한 강박과 공포를 강화하는 것처럼, 제노포비아적 공포를 강화할 뿐 사람들을 동원하고 정치화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세계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해 바깥에 놓여있는 세계이다. 정치가 마치 운동 선수와 관중들로 양분된 스포츠인 것처럼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관념은 이와 연관되어 있다. 특히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인(apolitical) 태도를 띠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널리즘적 세계관은 명백히 현상 유지에만 기여하는 운명론적이고 무관심적인 태도를 더욱 촉진시킨다. 어떤 “포스트모던 문화 비판”은, 사고방식이나 노동 조건 그리고 지향점—무언가 “팔릴 만한” “엄청난 것(extra something)”을 보여줘서 최대한 많은 시청자를 끌겠다는 목표—이 점점 광고 업자들이나 다름 없어지는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냉소주의에 대해,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적극적인 냉소주의(cynicism)를 통해 대항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채널 서핑이 그 예시가 된다고 한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하려면, 그들은 평범한 개인들의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한된) “저항”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문화 비판의 장기인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너가 알고 있음을 나는 안다(I know that you know that I know)”는 식의 비판은 모두에게 가능한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프로듀서들과 광고 업자들이 냉소적으로 만들어 낸 미디어의 메시지에 대해 “아이러니하고 메타-텍스트적인(ironic and metatextual)” 독해를 세련되게 전개하는 것 역시 모두에게 가능한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가장 변태적인 아카데미적 현학성의 포퓰리스트적 버전에 그저 투항해온 것에 다름없다. 

  1. (녹음된 인터뷰나 인쇄물들이 그대로 출판될 때 자주 나타나는) 손가락질이나 희화화를 피하기 위해 나는, 아마도 그대로 있었다면 내 주장의 힘을 그대로 실어주고 독자들에게 평범한 분석들이 놓치기 쉬운 몇몇 예시들을 환기시킬 수 있었던 몇몇 문서들을 누락시켜야만 했다—원주. [본문으로]
  2. 『텔레비전에 대하여』는 몇 달 동안 광범위한 논란을 낳았고 일간지와 주간지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에 이르기까지 매우 유명한 저널리스트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이 책은 베스트 셀러였다—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3. Pierre Bourdieu et al., La Misère du monde (Paris: Seuil, 1993), trans. P. Ferguson et al. (Cambridge: Polity Press, forthcoming) [영역본은 The Weight of the World라는 제목 아래 1999년 Polity 출판사에서 간행. 한국어 역본은 『세계의 비참』, 김주경 옮김, 동문선]. 이 책은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이루는 개인들에 대한 70여 건의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고, 이 인터뷰들은 인터뷰어가 의도한 이론적, 역사적, 정치적, 개인적 맥락 속에서 배치되었다. 이 작업은 부르디외와 그의 연구진들이 행한 다면적인 민족지적(ethnographic), 사회학적 연구임에도, 동시에 이 작업은 경이로울 정도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매우 우울할지는 몰라도) 삶의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의 비참』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4.  The State Nobility: Elite Schools in the Field of Power, trans. L. Clough (Cambridge: Polity Press, 1996). 그랑제콜은 국가에 의해 지원되는 대학은 아닌 명문 학교이다. 그랑제콜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데, 공학을 가르치는 그랑제콜은 에콜 폴리테크니크(the Ecole Polytechnique),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곳은 에콜 노르말 쉬페리에르(고등사범학교; the Ecole Normale Superieure), 행정학은 국립행정학교(the 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그리고 경영학은 파리 경영대학 (Hautes Etudes Commerciales). 바칼로레아 시험을 거쳐 학생들을 받는 일반 대학과 다르게 그랑제콜은 매우 어려운 입학 시험을 거쳐 학생들을 선발한다—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5. Iliad, trans. R. Lattimo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2:212-256.—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6. 다음을 보라. James Fallows, Breaking the News: How The Media Undermine American Democracy (New York: Vintage, 1997)—원주. [본문으로]
  7. 다음을 보라. Patrick Champagne, “Le Journalisme entre précarité et concurrence,” Liber 29 (Dec. 1996)—원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