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re Bourdieu. "Questions of Words." in Sociology is a Martial Art: Political Writings by Pierre Bourdieu. ed. Gisèle Sapiro. New York: The New Press. 2010. 


언어에 대한 물음
[각주:1]

- 저널리스트들의 역할에 대한 보다 겸손한 관점


제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것이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의 일종으로 취급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비판이라는 단어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뜻인, 특정 활동과 그것을 수행하는 당사자들에 대한 “공격”이라는 의미에서는요. 

제 의도는 저널리스트들이 스스로 수행하고 있는 자기성찰의 과정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성찰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다시 환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집단은 자신이 무엇이고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표상을 만들어 내기 마련인데, 이것은 특히 문화 생산의 전문적인 행위자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이 표상은 확실히,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태만하다는 우를 범하는, 그 표상을 만드는 이들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이해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사회 집단은 그들이 견딜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라고요. 사회 집단들은 회피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회피 전략은, 일상적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한계 상황과 관련된 극단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료 윤리 논쟁에서 예를 들어 봅시다. 안락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간호사들의 문제나 병원에서의 일상적 생활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여기서 제가 다루고 있는 집단들이 처한 위험에 경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물론 저널리즘적 자유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걸프 전이라는 상황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미약하지만 저널리즘적 자유가 그래도 존재하는 영역의 문제들을 다루기를 회피하게 됩니다. 윤리적 성찰을 위한 첫걸음은 행위의 진정한 책임과 가능성이 존재하는 자유의 영역을 정의내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모두가 아주 예외적인 문제들을 숙고하느라 주의가 팔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실천의 영역에 관한 논의를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실천의 영역에 관한 논의로 옮기어, 어떤 행위나 책임으로부터 정의상(定義上) 면제되기를 피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저널리스트들의 역할에 대해 보다 겸손한 관점으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입니다. 저널리스트들의 권력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들이 실제로 의지를 가지고 좌우할 수 있는 활동 가운데, 언어를 다루는 것(the handling of words)이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의 언어 사용을 통제함으로써 그들이 마구잡이로 행사할 수 있는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의 효과에 제한을 둘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상징 폭력은 무지(無知)한 사이에 그리고 무지를 통해 행사되는 폭력인데, 상징 폭력은 그것을 행사하는 이들이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또 상징 폭력을 경험하는 이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잘 행사됩니다.

이러한 정의는 상당히 추상적이니 구체적인 예시를 든다면 어떨까요? 오늘 아침, 저는 장-마리 카바다(Jean-Marie Cavada)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홍보를 들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홍보로, 마치 시대의 흐름이란 게 이렇게 단순히 정리될 수 있다는 마냥 일종의 성들의 관계에 대한 사회역사의 철학이라 할 것이 제출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성해방(sexual liberation), 1980년대에는 도덕주의(moralism), 1990년대에는 감정의 귀환(the return of sentiment)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의 것들을 들으면—“주체의 귀환”, “구조주의의 종언”, “민주주의로의 귀환”, “역사의 귀환”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듣곤 하는지는 신만이 알겠죠—저는 항상 이런 의문을 갖곤 합니다.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러한 상투어구들이 특히 잘 생산되고 재생산되고 퍼지는 저널리스트들의 세계에서 기이한 사실이라고 할 것은 아무도 그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누벨 옵세르바퇴르La Nouvel Observateur』의 1면에서 “감정의 귀환”에 대한 기사를 읽거나, 『코티디엥 드 파리Le Quotidien de Paris』의 헤드라인에서 “성 혁명의 종말”에 대한 기사를 읽곤 합니다. 이 미디어 군단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언어에 대한 쿠데타를 행사하는 셈이고, 그들이 바로 무의식 중에 그러한다는 점에서 이 쿠데타는 더욱 효과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역시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상징 폭력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상식의 직관에 과학적 공인의 외양을 씌우고 싶어하는 헛똑똑이들의 가짜 과학을 눈치채게 됩니다(이것을 “코프렘카 효과[Cofremca effect]”라고도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가짜 과학에서, 이 시대의 마술사들이 투영해내고자 하는 사회적 무의식을 그 기반으로 둔 유형들(typologies)은 그런 것들을 사주한 이들(사업가 또는 정치인)의 무의식, 그리고 그 사주를 수행하는 이들(저널리스트들)의 무의식을 연결짓습니다. 그리고 저널리스트들의 책임이란 바로 그들이 이런 무의식적인 것들을 사회에 널리 퍼뜨리는 데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상징적 효과들의 예시를 하나 들어보고자 합니다. 보통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논리적 오류 문장의 형태를 취하는데,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입니다. 누군가가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The king of France is bald)”라고 말했을 때, 이 문장에서는 동사 “-이다(to be)”의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의 왕이 존재한다’는 존재 명제(existential proposition)는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술어적 진술(predicative statement)에 의해 숨겨집니다. 현재 왕이 대머리라는 사실 자체에 주의가 집중되는 사이, 현실에서는 프랑스에 왕이 존재한다는 관념이 마치 자명한 것처럼 밀수되어 몰래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사회 세계에 대한 명제들을 수도 없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집합 명사를 주어로 취하고 있는 명제들이 그러합니다. “프랑스는 이제 질렸다”, “민중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사형제도를 지지한다” 등등. 그러한 집합 명사를 사용하는 설문 조사들은, 먼저 “귀하는 지금 현재 도덕적 위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고 나서 다시 “그것은 심각합니까, 매우 심각합니까, 아니면 기타 등등?”이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은 단순히 “현재의 도덕적 위기는 심각합니까, 매우 심각합니까, 아니면 기타 등등?”이라고만 질문을 받습니다.

가장 강력한 암묵적 가정들 가운데,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자 분류체계가 되는 원칙들(principles of vision and division)이 되는 이항 대립에 기반을 둔 명제들이 있는데, 예컨대 부자/빈민, 부르주아/일반인은 노동자들의 투쟁의 기반이 되어 왔고 이는 여전히 우리 대부분의 무의식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시 국민/외국인(nationals/foreigners), 원주민/이주민(indigenous/immigrants), 우리/그들이라는 대립 역시 강력한 암묵적 가정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자들에 대해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는데, 거기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원주민과 이민자라는 대립쌍이,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대립쌍으로부터 출발하는(그 분류 내에서도 물론 원주민과 외국인이 있을 수 있는데도) 다른 모든 종류의 대립보다 중요성과 우선성을 더 가진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견 속에 합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없는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부르주아지들의 꿈이 실현됩니다. 세계에서 오직 국민들만—부자든 빈민이든 한데 어우러져—존재한다는 관점에서는 적어도 부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갖춰진 상황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용하는 수많은 단어들, 특히 그 중에서도 형용사들의 짝패인 단어들은 우리들 인식의 범주(categories of perception)이자, 역사적으로 전승되고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자 분류체계가 되는 원칙들(principles of vision and division)입니다. 그 원칙들은 또한 사회 세계와 특히 갈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조직합니다. 정치적 투쟁이란 본질적으로 사회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강화시키거나 바꾸기 위해 이러한 원칙들을 유지하거나 변형시키는 데에 목표를 둡니다. 저널리스트들은 따라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담론 생산자들 중에서도 저널리스트들이야말로 담론을 유통시키고 사람들에게 보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하여 무엇이 보여져야 하고 믿겨야 하는지에 대한 상징 투쟁에서 특권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지식인들이 저널리스트들에 대해 모호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들은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고 싶어 하는 몇몇 지식인들에게, 아니면 라디오에 자주 나오고 싶어 하는 약간은 야심이 덜한 몇몇 지식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사회 세계에 대한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기를 바랄 텐데, 그들은 저널리스트라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장악하고 그럼으로써 일반 대중에 다다를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선 이들과 맞서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저는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강력한 부분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무의식적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무의식적 측면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소통하지만, 정작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소통하지는 않는”, 즉 우리의 논의를 가능케 하지만 그것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그 근본적 대립쌍들인, 커뮤니케이션에 잠재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것들의 소통인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무의식에 대해 소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그저 종교적 소망에 그치지 않고자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선을 넘는 이들을 (적어도 풍자와 웃음이라는 수단으로써라도) 제재하고 처벌할 수 있는 결정적 국면을 구상하고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제가 유토피아적 공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자들과 예술가들, 음악가들과 풍자가들을 한데 묶어줄 수 있는, 현란한 유행을 좇아 그만 상징 권력의 남용에 도취해버린 저널리스트와 정치가들, 그리고 미디어 “지식인들”을 풍자와 웃음의 시험대 위에 올려 놓는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상상해보고자 합니다.

  1.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가 조직한 컨퍼런스 자리에서의 발표. 다음 지면에 발표됨. Les Mensonges du Golfe (Paris: Arléa, 1992) pp. 27-3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