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책에서 여러 차례 역시 언급하고 있는 앤 스위들러의 매우 영향력 있는 논문인 “Culture in Action” (Swidler, 1986)는 문화를 “연장통(toolkit)”로 보기를 제안한다. 스위들러는 논문 초반부에서 “빈곤문화 The culture of poverty” 담론에 대해 논하며, 빈곤문화론의 한계는 문화를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이 내면화한 어떤 특별한 행위의 목표(ends) 내지는 가치로 정의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빈곤층들 역시 다른 계층들이 지향하는 성공, 안락함, 가족적 가치 등을 부인하지 않고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를, 마치 전철수switchman처럼 행위의 방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어떤 ultimate goals나 value로 보는 대신, 행위 전략을 구성하는 데에 쓰이는 습관, 레퍼토리, 스타일 등으로 보는 관점이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스위들러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지방대생 역시 “수도권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성공이라는 가치를 공유한다.” 맞다. 그런데 한편 나는 이렇게도 지적하고 싶다. 역으로, 지방대생들이 수도권 학생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성공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을 비틀어, 수도권 대학생 역시 지방대 학생들처럼 가족의 안녕과 행복이라는 소박안 가치를 공유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스위들러가 말하듯이, “People profess ideals they do not follow, utter platitudes without examining their validity.” (ASR 51(2) p.280.) 미친 극한의 생존주의 뿐만 아니라, 소박한 행복과 안녕 역시 한국 사회에서 널리 공유되는 보편적인 가치이며, 사람들의 삶의 목표로 종종 언급하는 platitudes다.  

여기서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이를 추구하기 위해 행위를 조직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84) 

이에 대해서는 의심을 좀 많이 덧붙이고 싶었다. 적어도 과연 그들이 가용한 행위 스타일이 인서울 대학생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까, 라는 측면에서. 지방대 학생들 역시 토익을 보고,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휴학을 하고 영어 공부를 한다. 이것을 자기계발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책에 나오는 지방대생들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주체가 과연 아닌지, 반문하고 싶었다. 책에서 묘사된 지방대 고학년 재학생들 학생들이 취업 준비 등으로 했던 약간의 스펙 쌓기, 공무원 시험 준비가 흔히 말하는 인서울 대학생들과 얼마나 크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그리고 이는 바꿔 말해서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생존 경쟁에 쫓기는 대학생들의 상이 또한 실제로 얼마나 현실과 들어맞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방대 생활로부터 내면화되거나 습득하게 되는 행위전략 내지는 습관, 스킬이 아님을, 2부 4장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 같다. 2부 4장을 읽으면서, 최종렬 교수가 지적한 ‘적당주의’, 느슨한 스타일, 가족주의, 겸연쩍음은 지방의 구조적 여건에서 비로소 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지방에서는 일반 소규모 사업체에 취직하면 물론 어렵지만,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이 문제가 없는 직장들이 많다. “사회복지 법인, 영어학원, 대학 연구소, 사회적 기업, 시민단체가 그 예다”(264). 지방에서 “적당주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도 큰 무리”가 없는 이유는 “가족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267). 그러나 이런 가족 혹은 유사-가족의 뒷받침은 역으로 제약이 되기도 하는데, (유사)가족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자본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성장하며 습득한 아비투스 역시 영어와 같은 문화자본을 축적하는 데에 제약이 된다. 영어 공부를 한다고 휴학을 하지만 그것이 단기간에 되기 어려운 것이다(282). 그렇다고 지방대생들에게는 졸업장이라는 공인된, 제도화된 문화자본 역시 다른 자본으로 변환되기가 매우 어렵다. 지방대 졸업장 자체가 사징권력이 없고 legitimate하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방대 졸업생들에게 보이는 것은, “가족의 인정을 추구하는 집단주의와 자신의 감각적·쾌락적 경험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의 “혼재”이다(261). 둘 모두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스위들러 식으로 볼 때 (특히 settled time에서) 이런 ‘가치’는 어차피 모두가 중요하다고 일단은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열악한 객관적 조건”, “사회자본과 문화자본의 한계”(286)이다. 

이 책에 대해 여러 비판이 쏟아진 맥락은, 지방대생들의 ‘습속’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편견이 엿보인다거나 지나치게 ‘대상화’하는 것 같다고 우려를 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오히려 ‘지방대적’ “적당주의”를 발현시키는 것은(?), 혹은 적당주의를 존재케 하는 것은 가족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지방의 부족한 사회연결망, 사회자본과 문화자본의 한계라는 물적이고 구조적인 여건이 아닐지라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복학왕의 사회학』을 2부 전까지만 읽고 든 의문들 


# 신자유주의 통치성? 

(1) 
저서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란 개념은 무엇인지 갸우뚱해진다. 우선 책의 내용에 충실하자면,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만드는 것이고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금욕주의적 에토스를 갖고 삶을 통째로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합리적으로 구성하고 조직”하는 이다(85쪽). 그런데 이는 푸코나 푸코를 따르는 학자들이 논의하고 있는 주체들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에서 말한 행위자의 이미지에 더 가까워 보인다. 

과문하지만,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제시된 통치성 개념을 이어받는 논의들은 금욕하고 자신을 규율 속에 가두며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주체라고 이야기했다기보다는, 노동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고 생애에 있을 수 있는 리스크를 탄력적으로 관리하는 이들이 신자유주의 주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이 지금 시대에 “품행의 인도”로서 통치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자유주의의 통치성으로부터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의 이행 과정은 곧 복지국가의 축적 전략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자크 동즐로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회적인 것의 경제적인 비용 절감”을 위해 담론과 통치 테크놀로지들의 배열, 작동 방식이 변화한 과정인 것이고. 이런 점에서, 기존 연구들의 맥락을 따져 봤을 때 『복학왕의 사회학』 저자가 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왜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불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양보해서?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그냥 자기계발하는 주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꼭 거기서 통치성이라는 화두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통치성이라는 게 국가 영토 내의 인구 관리, 보건, 안전 보장, 리스크 매니징이라는 주제에 대한 푸코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개념인데 왜 자꾸 자기계발의 영역에서만 논의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통치 테크놀로지들을 논하지 않는다면 굳이 푸코 가져와서 쓸 필요 있나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창조성,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업가적인 노동자들의 상은 스튜어트 홀이나 데이비드 하비가 포스트 포디즘의 축적 양식 이야기하며 자주 들었던 것이기도 하고.) 


(2) 
한편, 책 속의 대구 지방대 재학생들의 인터뷰를 찬찬히 봐도 그들의 언술로부터 그들이 “동물” 혹은 “속물”(김홍중)이 아니라는 결론이 곧바로 따라나오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우선 책의 논의대로, “성찰성을 도구적으로” 쓰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워홀 가고 토익 준비하는 지방대 학생들을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도 그들이 속물이라거나 자기계발 주체라거나 성급하게 결론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보다 지방대 학생들과 인서울 대학생들과 서로 차이가 많지 않을 수도 가능성을 제안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마 저자라면 ‘성찰적 겸연쩍음’이나 ‘적당주의’의 에토스를 내세워서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적당주의 에토스는 실제로 지방대생들이 그런 걸 내면화해서라기보다는 교수와 대면하고 있는 연구 상황 자체 때문에 발현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인서울 대학생들과 인터뷰해도 비슷하게, 악착같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의 이미지가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통치성이라는 게 주체가 내면화해야 비로소 작동하는 것인지는 다른 이론적 논의가 되겠다.) 

김홍중을 끌어들여 더 이야기하자면, 그가 『마음의 사회학』에서 동물과 속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온 계기는 80년대 ‘진정성’의 소멸 이후 한국 사회를 설명하고자 하는 동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 그러니까 지방대생이 속물이냐 아니냐, 속물이라기에는 너무 가족과 유사-가족 관계의 사람들을 아끼고 소박하게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들 아닌가 하는 것들 이외에도 지방대생들이 어떤 80년대의 ‘진정성’이 아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질문이 있어야 온당하다고 본다. 


(3) 
다른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신자유주의 통치성과는 약간 무관하게, 자기계발과 ‘게임의 규칙’에 대한 지방대 학생들의 인식이다. 

예컨대 적지 않은 수의 지방대 학생 혹은 졸업생들은 군대에서 ‘고학력자’(SKY, 인서울 대학생을 칭한다)를 만난 경험을 life-changing experience로 들고는 한다. 이를테면 명문대생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잘난 이유는 꼼꼼해서라든가 비전이 있어서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들과 자신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그려진 청년들의 상과 비슷하게도 보인다. 더 파고들면 이야기할 거리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잘 다루어지지 않고 찾아보건대 오찬호의 위 책 인용도 한 번 정도에 그치는 것 같다. 비록 적은 수의 재학생이지만, 아무튼 인터뷰는 귀중한 경험이다. 기존의 청년 담론들을 좀 더 상세하게 살피고 인용했다면 더 중요하고 재밌는 것들을 물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