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넘,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 Making Democracy Work』 요약
로버트 퍼트넘. 2006 [1994].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Making Democracy Work)』. 안청시 외 역. 박영사.
이탈리아는 제도의 성취를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는 역사적으로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19세기의 통합 이후로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이러한 중앙집권제는 1970년대 이후로 깨지게 되고 지방정부체제가 자리잡게 되는데, 각 지역별 정치의 효율과 정치에 대한 효능감은 큰 차이를 나타낸다. 마치 다른 기후에서 자라나는 생물 종들을 구하는 것이 유용한 것처럼, 서로 다른 역사적·문화적 전통을 가진 지역들이 다시 새롭게 자치적인 지방정부를 가지게 된 이탈리아의 환경은 제도 연구에 적합한 ‘실험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퍼트넘은 이 책에서 제도가 역사의 경로에 의해 많은 부분 형성되고, 그런 제도가 정치를 틀지운다는 제도주의의 전제를 받아들인다(8-9). 하지만 이러한 전제를 부분 수정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제도주의는 제도의 개혁이 정치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잘 관찰할 통제된 경험적 대상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26-27). 따라서 그는 실질적인 제도의 성취는 그것이 자리잡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는, “제도 연구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진” 전제를 추가해(8), 1970-90년대 이탈리아의 지역정치를 연구 대상으로 “강하고, 반응성 있고, 효율적인 대의 기구를 창출하는 조건”을 탐구하고자 한다(6).
구체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제도의 변화는 정치 행태에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가? 2장은 이러한 질문을 탐구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 지방은 강한 지역적 정체성을 가졌다(27). 1860년대 이탈리아를 통일한 민족주의자들의 과업은 새로운 통일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강력한 중앙정부가 만들어졌고,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정치는 이탈리아에 특유한 “정치적 타협주의”와 지방의 엘리트들의 존재라는 조건들 때문에 “타협적이고 분화된 중앙통치체제”를 파시스트 레짐 내내 유지되었다(28-29).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상황은 변화를 겪는데, 지역자치에 대한 요구--주로 민주주의·분권화에 대한 열망과 중앙정부의 비효율에 대한 비판으로 촉발된--가 증대하여 제도가 변화한 것이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방정부의 권한과 예산은 매우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36-37). 이러한 새로운 지역정치제도는 이전까지는 매우 이념적이었고 분극화되었던(polarized) 의원들의 정치 스펙트럼을, 관용적이고 협력적이고 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쪽으로 중도화시킨 것으로 보인다(50-53). 또한 이러한 새 정치제도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양가적인 결과를 불러왔는데 첫째는 새 제도가 시민들에게 더욱 잘 다가갈 수 있는 긍정적인 정치 문화를 만들고 것이고 둘째와 셋째는 새 제도가 행정적 효율을 낳지는 않았다는, 그리고 새 제도가 남북 지역의 불균형을 악화시켰다는 부정적인 것들이다(82-83). 이탈리아의 경험은 (제도주의의) 도식적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데, 앞선 남부와 북부의 성취의 차이라는 부정적인 결과와,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지방자치의 실제 성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나 지역개혁 원칙을 지지하는 “동조적 비판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77).
이탈리아 지역의 역사를 비교하고,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때 우리는 기존 제도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2장의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이탈리아 북부는 활기찬 시민의 참여의욕이 있지만, 남부는 수직적인 정치, 파편화된 공동체와 불신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 초기 이탈리아 남부지역에는 하나의 강력한 군주제가, 중북부지역에는 “몇 개의 독특한 공동체적 공화국들”이 수립되어 있었다. 토크빌의 고전 『미국의 민주주의』의 설명처럼, “능동적이고 공익 지향적인 시민상, 평등주의적 정치 관계, 신뢰와 협조의 사회적 구조로 특징지워진” 시민 공동체는 제도 성취를 설명하는 핵심적 요인임을 볼 때(20), 이러한 이탈리아 남북부 지역의 역사적 차이가 지역의 시민성의 질 차이를 불러왔고, 그렇게 각 지역의 다른 시민적 공동체가 제도의 성취의 영향을 주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시민성이라는 것이 효과적이고 반응적인 정부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 것인가. 그리고 시민적 전통은 어떻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가. 합리적 선택 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상호 이익을 위한 협력에 자주 실패하며, 특히 죄수의 딜레마 같은 예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기적인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그룹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는 행동이 아닌 차선의(suboptimal) 이익을 보장하는 행동을 선택한다. 그런데 합리적 선택 이론의 비관주의적 시선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협력이 꽤 자주 일어나는데(278), 이는 거래비용 등을 감소시키는 제도의 존재 때문이다(279). 그렇다면 제도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신제도주의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해소시키는 공식적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지 썩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사회적 자본, 즉 공동체와 신뢰라는 개념을 도입할 때 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발적 협력은 호혜성의 규범과 시민적 참여의 네트워크 등의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축적된 공동체에서 더 쉽게 달성된다”(281). 왜냐하면 자발적 협력 자체가 사회적 자본에 의해 촉진되기 때문이다. 계(rotating credit association)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 자본이 풍부할 때 개개인은 자신의 신뢰 자산을 “담보”로 맡김으로써 계(=협력)에 새로이 참여할 수 있다(284).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자본은 선순환과 악순환의 고리 중 하나를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운명에 처한 자본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자본은 기본적으로 공공재이며 신뢰는 “자기충족적”(285)이기 때문이다. 2 그런데 계는 대면적 관계가 지배적인 작은 공동체에서의 신뢰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러한 신뢰가 비대면적이고 간접적인 큰 사회로 전이될 수 있을까? 퍼트넘은 사회적 행위는 외부성(externalities)을 발생시켜 규범을 만들고 포괄적인 호혜성을 낳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3 포괄적인 호혜성을 낳는 규범은 수직적 네트워크보다는 느슨한(weak) 수평적 네트워크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이어진 사회에서 형성되고 지속되기 쉽다. 성공적인 협력을 경험하지 못한 공동체는 시장이나 권위적 정부와 같은 “수직적 대안”을 찾기 마련인데 의무는 비대칭적이고 관계성은 종속적인 수직적 관계에서 서로의 책임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렇게 협력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수평적 관계에서 정보의 전달과 의사소통은 원활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상호신뢰가 증가될 수 있고, 신뢰의 배신자가 지불할 비용(즉 제재)은 또한 증가될 것이다. 4 5 즉 사회에서 참여자들의 상호이익을 최대로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은 협력이고, 이런 자발적 협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적 자본이다. 사회적 규범과 네트워크는 사회 속에 배태된 개인의 행동을 맥락지우고 협력 쪽으로 유도할 것이다. 6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지방자치제도의 실험은 남북부의 부정적 격차와 여전히 비효율적인 행정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지만 탈분극화된 정치 문화에 기여했으며 지방분권화 경향 자체에는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했다(2장). 새로이 생긴 지방자치제도들을 공간적으로 비교할 때 역사적으로 시민적 참여 전통이 강한 북부가 더욱 효율적인 지방자치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3-5장). 이론적으로 탐구할 때, 역사적으로 형성된 북부와 남부의 서로 다른 집합행동의 딜레마 해결 방식--북부는 보다 평등적이고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남부는 홉스적인 수직적 권위와 통제로--이 제도가 잘 기능할 수 있을지 조건짓는 토양인 사회적 맥락을 형성했다.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북부와 그렇지 못한 남부. 전자에서 제도는 효과적으로 기능했고 후자는 비효율적으로 기능한 것이다(6장).
- 이렇게 사회적 자본의 개념을 사용해 합리적 선택 이론과 역사주의를 결합해 제도의 성취에 대한 더 나은 제도주의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목표이다. [본문으로]
- 신뢰는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이를 경제적 자본에 비유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이르는 것은 적절하다. 경제적 자본의 경우와 똑같이 사회적 자본은 더 축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규범의 발생의 필요조건이 외부성(externalities)이라는 테제는 J. Coleman, Foundations of Social theory에서 정식화된 것이다. [본문으로]
- 이에 따라 시민사회가 잘 조직된 사회에서 국가의 능력은 약화될 것이라는 맨슈어 올슨(Mancur Olson) 같은 일부 합리적 선택론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295쪽. [본문으로]
- 이러한 문화와 구조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닭과 달걀의 문제와 같다는 반박에 대한 퍼트넘의 응답은 301ff. 참조 [본문으로]
- 이론적 맥락을 고려해 다시 정리하면 사회적 자본의 존재는 왜 협력이 자주 일어나고, 협력 자체가 자기강화적인 속성을 갖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한계를 가졌던 합리적 선택 이론을 극복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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