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인용들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드물게라도 가끔 관광객이 되어보는 것은 정말로 영혼에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 좀 울적하고 착잡한 눈길로 ‘그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그것을 다룰 길을 찾자’ 하는 방식으로 유익하다. 내 경험상, 국내 여행은 시야를 넓혀주거나 긴장을 풀어주는 경험이 아니었다. 장소와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정신에 이로운 효과를 발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행은 나를 극단적으로 위축시키는 경험이었고,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겸손함을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내가 어엿한 개인이라는 환상을, 내가 어떻게든 이 현실을 벗어나거나 초월해서 살고 있다는 환상을 위협하는 경험이었다. ... 내가 단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곧 어엿한 현대 미국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고, 무지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늘 욕심을 내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늘 실망하고 마는 미국인이. 그것은 내가 애초에 경험하겠다고 찾아갔던 훼손되지 않은 무언가를 얄궂게도 그런 내 존재로 훼손하는 일이다. 내가 없다면 경제적 측면 이외의 모든 면에서 오히려 더 좋고 더 진실된 장소가 될 곳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다. 기나긴 줄, 답답한 정체, 반복되는 흥정을 겪으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직시하는 일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랍스터를 생각해봐 Consider the Lobster」 313쪽 각주 7번.
요컨대, “고전으로 추앙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정말로 낯선 요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장애물을 처치해야 한다. 생소한 요소들이 더 이상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것을 충분히 공부하든, 아니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우리가 다른 19세기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종주의적/성차별적 요소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처럼) 잠깐 찡그린 뒤 계속 읽어나가든.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그리고 이 점은 틀림없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어떤 예술은 온갖 장애물을 넘는 추가의 노력을 들이고서라도 감상할 가치가 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단연코 그런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서구 고전문학을 압도하는 거물이라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과 필수 교과로 추앙됨으로써 오히려 가려지는 사실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할뿐더러 재미있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의 소설에는 거의 늘 좋은 플롯이 있다. 강렬하고 복잡하고 철저하게 극적인 플롯이 있다. 살인과 살인 미수와 경찰과 문제 있는 집안의 반목과 스파이가 나오고, 터프 가이와 아름답고 타락한 여인과 간지러운 사기꾼과 소모성 질환과 뜻밖의 유산과 반드르르한 악당과 흉계와 창녀가 나온다. (352쪽)
요컨대, 도스토옙스키는 정말로 중요한 것들에 관해서 소설을 썼다. 그는 정체성, 도덕적 가치, 죽음, 의지, 성적인 사랑 대 영적인 사랑, 탐욕, 자유, 집착, 이성, 믿음, 자살에 관해서 소설을 썼다. 게다가 자신의 인물들을 대변인으로 격하시키거나 자신의 책들을 팸플릿으로 격하시키지 않고서도 그 일을 해냈다. 도스토옙스키의 관심은 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어떻게 진짜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저 유달리 약삭빠른 능력으로 자신을 보전할 줄 아는 동물이 아니라, 가치와 원칙에 영향 받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355쪽)
프랭크의 전기를 다 읽은 미국의 진지한 독자/작가는, 왜 현재 우리의 소설가들이 고골이나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 주제 면에서도 얕고 가벼우며 도덕적으로 빈곤한지를 골똘히 생각해보게 도리 것이라고. 프랭크의 전기를 읽은 우리는 절로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예술이 심오한 신념이나 절실한 질문으로부터 늘 어느 정도 아이러니한 거리를 두도록 만들까? 그래서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런 신념이나 질문을 우스개 취급한다. 설령 다루더라도 텍스트간 인용이나 부조화스러운 병치 따위의 형식적 장난으로 위장하여, 진짜 절박한 내용은 무슨 다면적 낯설게 하기 전략 따위의 쓸데없는 짓으로 별표 사이에 가둬두곤 한다. (365쪽)
「조지프 프랭크의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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