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서평: 김시덕의 『서울 선언』
김시덕. 『서울 선언』. 열린책들. 2018.
저자 약력을 보면 조금 의아할 수 있다. 문헌학자가 왜 굳이 서울 답사에 대한 책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도시 연구자도 아니고 기행문을 주로 쓰는 작가도 아닌 연구자의 정체성을 가진 저자가 왜 이런 책을 냈는지 궁금해지는 게 있다.
해답은 출판사 책소개에 있지 않고 책 첫머리(“여기도 서울인가?”)에 있다. “서울에 대한 책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서울을 테마로 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 한국을 떠나기 전에 서울에 대한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죠.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를 몰아내려 한 직장 내 일부 세력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2017년 3월이었습니다.” 글에서 언급하는 사건은 『한국경제』의 이 글에 소개되어 있다. 이것 말고도 책 맨 뒤의 후기를 보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그동안 안 팔릴 만한 책을 많이 냈으니 이번에는 팔릴 만한 책을 출판해보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요새 이런 류의 답사문이 잘 나가나 하는 의문은 뒤로 넘겨두자.)
따라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서울 지역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서는 아니다. 서울에 애정이 있는 저자가 문헌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울 내에서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장소들--공간적으로는 사대문 밖에 위치해 있고, 역사적으로는 주류 담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에 대해 답사하며 느낀 지점이나 지역들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들을 조합해 가볍게 쓴 에세이라고 하는 게 제일 옳을 것 같다. 하여 책이 다루고 있는 서울 내 공간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자 하는 독자는 이 책을 발판삼아 다른 연구들을 참고하는 것이 더 좋을 테다.
문헌학 연구자라는 저자의 특성이 잘 살려진 챕터는 제3장 “서울 걷기 실전편”이다. 이 장에서는 청계천, 남산·삼각지·용산 일대, 양수리에서 영등포까지의 한강 이남 일대, 흑석동과 청계천, 구로 공단 등이 다른 서울 답사 서적에서는 주로 다뤄지지 않는 고문헌들이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야기된다. 나는 특히 제3장 마지막의 시흥 부분이 제일 좋았다. 시흥을 다룬 절은 사대문 바깥의 서울 지역이 어떻게 대한민국 건립 이후 급속한 개발 과정에서 정체성을 상실해 왔는지를 간결하게 보여 주는데, 시흥이 겪었던 운명은 몽촌동이나 청계천 같은 동네들이 밟았던 변모 과정의 핵심들이 추려져 들어가 있는 아이디얼한 사례가 아닌가 싶어서.
대일본 맥주 주식회사의 일본 본사는 조선의 영등포에 자회사인 조선 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광복 후에 이 회사는 크라운 맥주, 뒤이어 하이트 맥주가 됩니다. 영등포역에서 서남쪽에 위치하던 대일본 맥주 공장 자리에는 현재 대우 푸르지오 아파트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편, 대일본 맥주의 경쟁사였던 쇼와 기린 맥주 공장은 영등포역 동쪽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해방 후 오비 맥주가 되었다가 지금은 영등포 공원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182쪽)
영등포 서쪽에 자리한 문래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에 조선 주택 영단이 소형 영단 주택을 건설한 곳입니다. 그 후 이곳은 영단 주택 단지의 공간 구조가 유지된 상태로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서 지금까지도 작은 공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최근 십여 년 사이에는 이런 분위기를 좇아 예술가들이 들어와서, 옛 영단 주택 단지와 그 주변은 일부 예술가들의 창작 거점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2017년 10월에 옛 영단 주택 단지 일대를 답사했을 때에는 창작 공간들과 함께 현대식 카페가 이곳저곳에 들어서 있었고, 영단 주택 단지 사방을 고층 아파트 단지가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문래의 옛 영단 주택 단지가 언제까지 공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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