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에게 정치는 지나치게 사회화된 자아의 신경증과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었다. 루소는 개인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회적 계급 구조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 자신은 기존 질에서 결코 적응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루소의 자신감과 독선은 자신이 근대적 삶의 악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 대의와 종교적 신앙의 많은 개종자처럼, 루소는 고독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신은 타락한 환경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자신은 청렴결백하다고 확신한 까닭에 루소는 사회적 제약들로부터 해방된 고결한 존재라는 분위기를 풍겼고, 무력감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결국 피해자 의식을 떨쳐 내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루소는 오늘날 진부해진 ‘원한’의 변증법을 시행한 셈이었다. 

    오염된 사회보다 깨끗하고 순수한 영적인 삶,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 특권 계급보다 보통 사람들, 무신론과 무절제한 자유보다 종교적인 정서를 옹호하며, 루소는 힘 있는 엘리트보다 상처받고 모욕당한 사람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프랑스 대혁명의 ‘다정한 미소’가 ‘위선의 가면을 찢어 버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루소가 낳은 첫 번째 위대한 제자,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타락의 뒤덮인 허울을 뜯어내고, 그 뒤에 감추어진 민중의 훼손되지 않은 정직한 얼굴을 드러내려고’ 집착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142쪽) 


더욱이 우리는, 바쿠닌이 1948년 이후로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믿음, 즉 현실이 목적과 방향을 가진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주는 근본적인 낙관주의가 파괴된 현실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현실은 이상하리만치 잘 감지되고 있지 않다. 1994년만 해도, 바츨라프 하벨은 근대 사회가 강요한 탈정신화를 한탄하면서도 ‘새로운 신: 생산과 소비의 영구적 성장이라는 이상’을 들먹일 수 있었다. 오늘날 신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진보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앳된 얼굴의 밀레니얼 세대가 득실대는 실리콘 밸리를 제외하면 그 믿음이 더 이상 존속되지 못하는 듯하다. (3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