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3부 노트
“우리가 사회 세계를 생각할 때 갖게 되는 어려움과 위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전 구성된 것의 힘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즉 그것이 사물과 정신 속에 새겨져 있으면서, 정의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간과되는, 자명성의 베일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단절은 실제로 우리 시선의 전환을 요구하며, 입문 철학자들이 간혹 말했던 것처럼, 사회학의 가르침은 먼저 ‘새로운 안목을 부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적어도 ‘새로운 시선’, 사회학적인 눈을 생산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개종, 회심, 정신혁명, 사회 세계에 대한 총체적 시각의 전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397쪽)
393쪽에서 부르디외는 시쿠렐의 사례를 소개한다. 즉 그는 오랜 시간을 LA의 빈민 청소년과 어울리며 “비행의 공식적 표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르디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회학은 전성찰적인 “사회 세계에 대한 표상 생산과 그것의 조작 작업”을 폭로하고 그것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들이 여러 행위자들 - 정부, 여론조사 기관, 이익 단체들 - 에 의해 조작되어 있고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더욱 안 좋은 것은 우리가 그 언어들을 무비판적으로 ‘사회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 사용한다는 - 즉 그 표상이 어떤 것을 대표하는지 성찰하지 않는 - 데에 있다. 따라서, “범속한 상식, 혹은 범속한 형태의 학문적인 상식과 단절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단절의 수단들과도 단절해야 한다. 그것들은 스스로 그에 맞서 구성되었던 바로 그 경험을 부정하기 때문이다.”(396쪽)
따라서 부르디외를 받아들이자면 모든 사회학은 우선 지식사회학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물들을 “근본적 의심”의 태도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회학의 과업은, 무엇이 정당하고 공평무사한 것으로 여겨져 온 역사의 과정에서 파헤칠 수 있는 “특별한 상징투쟁”을 드러내고 끝내는 그 상징투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이데올로기가 패배당했다. 그들의 교의가 결국 환상임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한 예로,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점점 더 빈곤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었다 ; 그러다 어느 날 유럽의 노동자들이 모두 자동차로 직장에 나가는 것을 알고는 현실이 속임수를 쓴 것이라고 부르짖고 싶었다. 현실은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강했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마골로기가 현실을 능가했다 : 이마골로기는 현실보다 훨씬 강하며 게다가 현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인간에게, 모라비아의 한 마을에서 살며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던 나의 할머니에게 그것이 표상한 바를 표상하길 그만두었다: 즉 어떻게 빵을 굽는지, 집은 어떻게 짓고 돼지는 어떻게 잡아 어떻게 그것을 훈제하는지, 털이불은 무엇으로 만들고 신부님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생님은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등; 그리고 10년 이래로 그 지역에 몇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는지를 할머니는 매일같이 마을주민들과 마주치며 알았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현실을 자신의 개인적인 통제하에 두고 있었으며, 따라서 집에 먹을 양식이 없는데도 모라비아의 농사가 번성하리라는 생각은 절대 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같은 층에 사는 나의 이웃은 사무실에서 다른 동료 직원을 마주보고 앉아 하루 중 가장 밝은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기 위해 텔레비전을 켠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최근의 여론조사를 해설하면서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에게 안전에 관한 한 프랑스가 유럽 챔피언이라는 정보를 알리자(나는 최근에 이 여론조사를 읽은 바 있다), 매우 기뻐하며 그는 샴페인 병을 딴다. 그러나 바로 그날, 자신이 살고 있는 골목에서 세 건의 강도사건과 두 건의 살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여론조사는 이마골로기적 권력의 완벽한 도구이며, 이 권력이 대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여론 조사들 덕분이다. 이마골로그는 사람들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프랑스 경제는 어떻게 굴러갈까? 프랑스에 인종차별주의가 있는가? 인종차별주의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는? 헝가리는 유럽에 속하는가 폴리네시아에 속하는가? 세계의 모든 정치가들 중 가장 섹시한 이는 누구인가? 오늘날에 있어 현실이란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한 그런 대륙이므로, 여론조사가 일종의 상부 현실처럼 되어 버렸다; 달리 얘기하자면 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론 조사는 진실을, 더군다나 사상 유례없는 가장 민주적인 진실을 창출할 임무를 지닌 영구석을 차지한 국회이다. 진실의 국회와 대립 상황에 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에 이마골로그들의 권력은 진실 안에 영원할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인간적인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임을 알면서도 과연 어떤 힘이 이 권력을 깨뜨릴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밀란 쿤데라, 『불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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