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서 읽은 책들 (1) - The Reasons of Love
2019. 3. 16. 01:09
일본 갔을 때 심심하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책을 가져가기로 했다.
책을 가져가는 기준은?
- 가벼울 것. (짐을 싸야 하니까)
- 내용이 전문적이지 않고 일상적일 것. (전공 관련한 것이면 재밌다고 읽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행 온 느낌도 있는데 그런 거 읽기는 좀 그런 것 같아서.)
- 평소에 읽고 싶었던 것일 것 (그래야 읽겠지?)
그래서 고른 책.
1. The Reasons of Love (Harry Frankfurt.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으로 유명한 해리 프랭크퍼트의 책이다. 책을 알게 된 경위는 친구가 읽고 있길래. 씨아이알이라는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어 있었다. (『사랑의 이유』)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굳이 영어 판본을 가지고 갔는데 왜냐하면 솔직히 국역본은 두껍고 무겁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뭐랄까 분석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글을 쉽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또 여행 가서 책을 오래 읽고 싶은데 국역본으로 가져가면 너무 빨리 읽어버릴까 싶어서 일부러 제동장치를 거는 느낌으로 영어 책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좀 웃긴 얘기지만 9시 출발 비행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했고 (여섯 시 반 정도?) 체크 인을 정말 빠르게 했다. 그래서 할 일도 없으니 사람 별로 없는 김포공항 카페 티아모에서 커피 마시면서 책 읽다 보니 일본 도착하기도 전에, 책은 영어 판본으로 백 쪽 정도 되는데 30쪽까지 읽어버린 것이다. 이런 페이스로라면 며칠 안에 다 읽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서는 일본 생활이 바빠서 한 이 주일 정도 못 읽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흥미도 떨어졌다. 3부 The Dear Self까지 읽다 말았고... 나머지 3장은 한국 오면서 틈틈이 읽고 다 반납했다.
제목은 사랑의 이유인데 연애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냥 알랭 드 보통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보살핌(caring), 관심을 기울이기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사랑은 보살핌의 최고의 단계인데,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잘 될 수 있는 것(flourishing)을 무사(無私)하게 바랄 수 있는 것이 곧 사랑이다. 이러한 의미의 사랑이 예화되는 가장 흔한 경우로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자주 거론되고는 한다.
암튼 사랑은 중요하다. 어떤 대상이 잘 되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바랄 때에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언적으로 바란다고 해야 할까?) 세상은 의미로 충만해지기 때문이고, 이 문제는 도덕적, 규범적 판단의 영역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삶의 한 부분이다. 이런 사랑의 정의에 기반해 저자는 여러 가지 얘기를 하다가 종국에는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식이 자기애(self-love)라고 주장하기까지 이른다. 사실 자기애를 논하는 제3부가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으며, 저자가 일상인이 흔히 쓰는 언어 감각과 유사한 의미로 사랑을 쓰지 않고 비교적 엄격한 정의를 유지하고자 한 이유를 3부를 읽을 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부를 읽으면 독자는 이 책이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흔히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 논하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 역시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어떻게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사랑이라는 개념적 스캐폴딩을 활용해 설득하고자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책 내용이 기대와 부응하든 그렇지 않든 프랭크퍼트 같은 저자의 간명한 문장을 음미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는 암시적이지만 그렇다고 헷갈리게 글을 쓰지는 않는다. 주제--사랑--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구불구불 논의를 펼치지만 글쎄 그런 논의에 이끌려 가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긴 했다.
다른 도덕철학자들이 도덕철학에서 다루지 않는 가치의 영역이라 해야 할까? 여튼 그런 것에 대해 말한 에세이가 또 있으면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프랭크퍼트가 말미에 글을 마무리하며 언급한 모 여성 비서와의 사담(私談) 내용은 쉽게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독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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