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개략적으로 알고라도 있어야 하는데 기회가 없어서 정말로 '귀동냥'한 것 말고는 이해가 없는 철학자 혹은 사상가들이 있다. 내게는 헤겔이 그렇다. 철학 전공자들보다는 덜한 빈도겠지만 사회학 이론 논문이나 인문사회 교양서를 읽을 때 가끔 등장하고는 한다. 물론 지나가는 식으로 인용되는 철학자들이 모두 그렇듯 글의 맥락을 파악하고 있으면 아주 크게 독서에 방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상가의 체계나 사상의 요지를 간략하게나마 알고 글을 읽는 것과 그것을 거의 모른 채 글을 읽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누군가가 마르크스에 대해 아예 모른다고 해 보자. 물론 상식이 아주 없는 사람은 드무니까 이 사람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다루는 수준으로 마르크스를 공산주의의 옹호자이며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역사의 발전 단계를 제시했다, 정도까지만 안다고 해 보자. 그래도 이것은 사상가를 거의 모르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사회과학 책을 읽는데 여기서 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아주 일반적인 상식보다는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정리되고 주로 교양서 독자와 학계에서 공유되는 마르크스의 기획과 그 비판에 대해서 미리 개괄적으로라도 숙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교유서가에서 출간된 [헤겔]은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로 헤겔을 일반적 상식 수준에서만 알았기 때문이다. 철학사를 따로 공부해본 적도 없으니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논리 체계로서의 변증법, 인정 이런 걸 강조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사실 그 개념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몰랐다. 정치철학에 관련해서는 가족과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분했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물론 이게 헤겔의 사상 안에서 어떻게 관련이 되고 절대정신이랑 국가는 또 뭐가 있고 하는 거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정말로 막연한 인상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헤겔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사람에게 좋다. 이 책은 입문서이며 옥스포드 출판사의 VSI 시리즈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 원서로는 아마 백여 페이지 남짓일 것이며 한국어 판본으로도 본문은 170쪽 정도로 아주 짧다. 제1장은 헤겔의 시대와 생애를 다루고 있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 피터 싱어는 헤겔을 거의 모르는 독자를 위해 헤겔 철학을 설명할 때 우선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제2장은 역사철학--헤겔이 세계사의 발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을 다룬다. 헤겔은 세계사를 두고 자유 의식이 발전하는 과정으로 생각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읽으면 나온다. 구체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설명이 그렇게 난해하진 않다. 

 

헤겔의 [역사철학]을 간략히 설명하고 제3장은 정치철학을 다룬다. 이 장은 주로 헤겔의 [법철학 Philosophy of Right]에 대한 설명인데, 사실 여기서 피터 싱어의 쉽게 설명하는 솜씨가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나는 헤겔을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 이 사람이 맞게 설명하는지 틀리게 설명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피터 싱어가 활용하는 유비(analogy)와 사례들은 정말로 도움이 된다. 얼마 되지 않는 분량에서 헤겔이 말하는 '자유'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극적 자유(이사야 벌린의 구분)가 아닌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이게 또 칸트에 대한 비판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가 윤곽이 잡힌다. 제4장은 그 유명한 [정신현상학]을 다루고, 제3장에서 발휘된 싱어의 설명 솜씨는 여기서도 여전하다.(다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조금 난해하지만. 그리고 분량 때문인지 제4장에서 설명되는 [정신현상학]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제5장에서 설명되는 변증법에 대해서는 다 읽고 난 뒤 이것은 그래도 헤겔 사상의 일면만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워낙 변증법이 난해하며 이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까.) 

 

헤겔 철학에 대한 윤곽을 빠르고 쉽게 잡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더 알고 싶다면... 찰스 테일러의 [헤겔] 정도를 읽는 식으로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