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별, 『IMF 키즈의 생애』 읽고 생각
중계동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북서울미술관에 들렀다. 전시는 다소 실망스러웠고, 윗층에 미술 관련 서적이 있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들러 보았다. 예술 관련이 아닌 책들도 다양하게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들어와서 펼쳐 보았다. 그런데 약간 놀랄 만한 이름이 나와서, 도서관에 들르면 책을 빌려서 다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사실 이 책은 제목을 『IMF 키즈의 생애』라고 지으면 안 됐다.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한영인 씨의 글을 잠시 가져와 본다.
“물론 저자가 의식하듯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사건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런 ‘결정론’에 붙박일 필요는 확실히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사건과 개인 사이의 상호 조응하는 측면까지 무시해도 좋다는 건 아니다. 이 책은 ‘IMF 키즈’라는 도발적인 개념을 내걸었지만 사회-문화-경제적 변동을 가져온 거시적 사건과 그 토대 위에서 펼쳐온 개인의 삶 사이의 조응관계를 설득력 있게 구조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이 책은 실패인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IMF 키즈라는 개념에 굳이 얽매일 필요가 없다면 이 책은 내 또래의 개인적 역사와 삶의 고민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통찰과 깨달음도 적지 않다. 이 글의 제목을 “‘IMF 키즈’는 아니지만 괜찮아”라고 단 이유다.”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들의 가정이 IMF 금융 위기에 대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가정은 아니라고 술회하고 있다. IMF로 가정경제의 상황이 크게 변화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는 아주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생각해도 이들을 IMF 키즈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역시 이들은 IMF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변동을 체험한 세대일까.
책 앞에 실려 있는 밥 제솝(Bob Jessop)의 말이었던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관련 책을 쓴 지주형의 말이었던가. 정확히 인용하기는 어렵지만 위기의 시기 대응의 전략은 이후 사물이 움직이는 방식을 오랫동안 규정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기에 이 책은 IMF 이후 사물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진단과, 사물들의 새로운 배열은 개인의 미시적 생애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그 평가에 대해 그다지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IMF는 공통의 세대 경험인가?
그럼에도 이 인터뷰집은 성실하게 몇몇 공통의 세대적 경험을 희미하게 그려낸다. 포착한다고 표현하기는 조금 주저되는 것이, 별로 방점이 찍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잠깐 생각나는 것은 90년대 이후 다양해진 교육의 기회이다. 이를테면 ‘황광우 키즈’였던 김남희 씨. 잠시나마 열린 어떤 가능성의 공간으로서의 민족사관고등학교. 그러고 보면 하자센터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교육 공급의 창구가 다양해지고 논술이든 주산이든 각자 학원들이 소비자들에게 저 나름의 이유로 호소하던 것에 보통의 학부모들이 기민하게 발맞추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저 좋다니까 보내거나’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학원이라는 레퍼토리), 아이들이 한다니까 보내거나. 돈 없어서 못 시켜주겠다는 것은 좀 그렇고 어쨌든 공부(교육)은 시켜야겠으니 아이들 요구는 들어줘야하는 그 상황이 몇몇 사람들 삶의 분기점이 된 것 같아 자못 흥미로웠다.
눈여겨본 부분은 특히 김남희 씨와 김괜저 씨의 인터뷰이다.
‘’정치 운동’이라는 경력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능력과 경력은 다른 세계로 좀처럼 호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운동’에 방점을 찍고 한정된 일을 불안정한 상태로 계속하기보다 ‘정치’에 방점을 찍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그가 말한 ‘우클릭’을 내 식대로 풀어 써보면 이렇다. (161쪽)
‘호환’이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본다. 적실한 말인가? 좋은 표현인가?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와닿았다. 우선 일반적으로 보면 호환되지 않는 경험들이 많기 때문에 다들 실패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도전은 안전한 것들에 국한된다. 토익 점수라거나 한국사 자격증이라거나…
그럼에도 정치 활동이나 운동에 대해서만 본다면, 그런 류의 활동들은 그 영역 바깥의 사람들에게 자주 에누리되어 평가되는 경향이 또 있는 것 같다. 사실 운동 경험이야말로 이것저것 다 해볼 수 있는 실무 경험임에도 말이다.
그다음 숫자로 제일 두드러지는 건 법대나 의대를 노리고 한국에 들어오는 경우예요. 처음에는 그런 현상이 되게 실망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각자의 케이스로 보면 각자 결정인 거니까 실망스러울 일이 아닌데, 전체적으로 봤을 땐 실망스러운 결과. 그런데 저 역시도 나름의 고민을 거치고 친구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듣고 하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각자의 입장에선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 거죠. 어쨌든 각자가 다 나름대로 타고 있던 궤도가 있을 것이고 거기서 그 결정을 하기까지 뭘 거쳤을지는 (타인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인데, 나는 그저 ‘실망스러운 결과다’ 하고 있었으니 스스로가 되게 미웠어요. 그래서 요즘은 정말 진심으로 여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않아요. 그렇게 진로를 바꾸었던 본인들도 예전과 지금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몇 년 전에는 의대나 법대, 경영대에 들어간 친구들이 절 불러내서 “넌 재밌는 거 하는 애니까 네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어” 이랬는데 이제는 그런 게 진짜 없거든요. 각자 분야의 전문가로 만나니까 훨씬 좋아요. (215-16쪽)
다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직장을 얻는 기회를 미국 정착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214쪽) … [미국에 정착한 친구를 만나며] 이 친구는 조국의 미래고 뭐고 하는 압박을 다 털어낸 줄 알았어요. 난 그냥 미국 왔으니까 여기에 동화돼서 살 거야, 이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별 갈등 없이 거이에 필요한 것만 하며 살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만나보니까 이 친구도 같은 갈등을 했고, 결정만 달랐던 거예요. (216쪽).
흥미로운 지점. 왜 민사고 학생들은 미국에 가서 정착하고 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미국에 남아서 생활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민사고 학생들은 ‘모두의 기대를 받아’ ‘광명성처럼 쏘아올려졌다’고 김괜저 씨가 글에서 쓰지 않았던가? 학교가 되었든, 지역사회가 되었든, 파스퇴르 기업이 되었든, 아니면 가장 넓게는 민족(네이션)이 되었든, 사회의 지원과 기대 속에 가장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사실 나고 자란 공동체에 대한 완전한 절연(絶緣)인 미국에 정착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흥미롭다. 가서 남는 것이 능력 입증과 민족 중흥의 길이라면,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이들은 누구일까? 어떻게 민사고 몇몇 학생들은 그 기대를 내면화했을까?
2000년대 초의 성장 서사
“2학년 때인가? 학교에 ‘모둠일기’라는 수행평가용 사이트가 만들어졌어요. … 거기에 그때쯤 이해찬 식 교육의 영향도 있고 해서, ‘입시가 다원화된다’ ‘논술 비중이 높아진다’ 이런 식으로 학교에 설득을 하기 쉬웠을 것 같아요.
… 그리고 그 주에 잘 쓴 일기를 수업시간에 같이 읽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약간 매체처럼 된 거죠. 그때 제가 대박이 난 거죠. … 쓰다 보니 재미도 있고 조회 수도 판타지 연재할 때보다 훨씬 높고.
… 그런 동기가 있으니까 가끔은 수행평가 기준을 넘겨서 심할 때는 하루에 한 번씩 정말 일기처럼 쓰기도 하고. 그게 저한테 가장 큰 게 됐어요. 선생님들도 저를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고. 또 평소에는 서로 이야기를 안 했는데 모둠일기 사이트를 통해서 알게 되는 친구들이 생겼죠. … 그때 외로움이 많이 해소됐어요.” (299쪽)
읽으며 웹툰 여중생A가 생각났다.
“연평도로 부대를 옮긴 뒤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해진 시기에 알게 된 ‘책마을’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 공개 커뮤니티가 아니라 군의 인트라넷 비공식 게시판이었고 기본적으로 서평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 무엇보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어쩔 수 없이 군복과 부자유에 매여 있을 뿐 실은 전혀 다른 배경을 지닌 ‘고수’들을 만난 것이 제대 후까지도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정말 글 잘 쓰는 친구들도 많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책마을은 단순히 병장 시절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제대 후의 새출발에 앞서 자신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영화 일에 필요한 ‘공부’에 대한 적극적인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315쪽)
책마을은 공군 인트라넷 게시판으로 나는 알고 있다. 학교 동아리에서 예전에 조영일 비평가 초청 강연을 열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동아리원 아닌 어떤 분이 오셨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일화를 들었다. 공군에 있을 때 누군가 책마을에 조영일 비평가와 김영하 소설가의 인터넷 상 논쟁을 올려서 그걸 열심히 읽었는데 알고보니 그거 올린 분이 당시 동아리원 K였다나. 디테일은 좀 다를 수도 있는데 아무튼. 내가 알기로는 박가분 씨도 책마을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링크 http://weekly.khan.co.kr/khnm.html?artid=201104141053261&mode=view) 2011년 초인가에 폐쇄되었다고 하는데, 위에 얘기한 사람들의 학번을 감안할 때 그 뒤로도 몇 번 살아남았던 것 같다. 지금은 있으려나?
'독서 일반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경식, 『난민과 국민 사이』. (0) | 2019.08.04 |
---|---|
준 카르본·나오미 칸, 『결혼 시장』. (0) | 2019.08.02 |
사진의 어떤 역사 (크로스·프록터,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 (0) | 2019.07.11 |
교육공동체벗, 『그런 자립은 없다』 (0) | 2019.07.10 |
마틴 라이언스, 『책, 그 살아 있는 역사』. (0) | 2019.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