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가토 노리히로,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도서출판b, 2008의 제4장 “비평의 노년—가라타니 고진과 백낙청”의 6, 7절(각각 ‘비평의 충돌 A: ‘문학’을 둘러싸고’, ‘비평의 충돌 B: ‘민족(nation)’을 둘러싸고’)에서는 영향력 있는 비평가이자 지식인, 운동가였던 백낙청과 일본 지성계의 관계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아래는 책을 따라 관련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우선 가라타니 고진은 1997년 제4차 한일문학심포지엄 참가에 겸해 창작과비평사에서 우카이 사토시와 백낙청, 그리고 최원식과 토의를 했다고 한다(114). 이것은 단순히 심포지엄을 겸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지적 관심사가 통해 의도적으로 기획된 만남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생산적이지 못했다고 한다(115). 

그 모임에 대한 평가가 6절에서 이루어진다. 가라타니는 우카이, 백낙청, 최원식과의 토의에서(백낙청, 최원식, 우카이 사토시, 가라타니 고진, 「韓国の批評空間」, 『批評空間』(II-17), 1998) 본인의 관심사인 ‘문학의 종언’과 ‘비평’ 운동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즉 “소설과 시에 창작하는 비평이 아니라 그로부터 자립한 비평이” 문예 잡지에서 나타나지 않냐는 것이다(122). 그런데 이에 대해 백낙청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123). 그러다가 다른 얘기를 좀 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 가라타니는 다시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문학가의 위상 차이와 문학의 종언에 대해 최원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124). 최원식은 오히려 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쪽은 민족문학 진영을 공격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8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은 형식의 차이는 있어도 근본적 정신이나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126-7). (조영일은 이에 대해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으니 누가 옳았다고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2000년대 후반의 상황을 다시 음미해보자고 제안한다. 단순하게 말해 80년대 이후 한국의 문학에도 어떤 근본적 변화가 일고 있다는 가라타니의 감각은 옳았다는 것인데, 요약보다는 본문을 참조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책 128-31쪽을 참고.) 

문학의 임무 등의 주제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민족(네이션)이라는 문제가 대담에서 언급되는데 이 쪽도 흥미롭다. 가라타니는 백낙청의 ‘민족’ 단어 옹호론을 두고 그것은 다케우치 요시미와 비슷한데 그 논의는 “그[다케우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위험하고 양의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132). 책에서 이 내용이 자세히 다루어지지는 않으니, 나중에 참고를 해야겠다. 아무튼, 백낙청의 ‘민족’ 옹호론은 쉽게 말해 민족 개념이 갖는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고 그 개념을 우익 국가주의자들이 오용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낙청은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운한 것은 오히려 기시 수상으로 대표되는 우파 민족주의자든 공산당과 같은 좌파 민족주의자든 그들의 입장에 단순히 반대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일정한 민족적 특성과 민족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다수 대중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대안을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주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韓国の批評空間」, 15頁,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133쪽에서 재인용.) 

가라타니는 이에 대해 바로 비평하지는 않지만,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에서 제기된 주장을 비판하며 우회적으로 백낙청과의 입장 차이를 표명했다고 한다. 가토 노리히로는 일본인의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먼저 일본 전사자를 애도해야 한다고 했는데, 가라타니는 이에 대해 “나는 [일본인이] 분열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이런 분열감정에서 오히려 장래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아메리카인도 베트남전쟁 후에는 분열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걸프전쟁으로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그것이 ‘보통 국가’라고 한다면, 나는 일본은 ‘보통’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韓国の批評空間」, 22頁,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134쪽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은 일본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헌법 제9조(평화헌법)을 일본인이 스스로 재선택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고 한다(평화헌법은 강요된 것인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쪽은 이토 나리히코,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 강동완 옮김, 행복한책읽기, 2005; 다른 비평적 맥락으로는 가라타니 고진, 「죽음과 내셔널리즘」, 『네이션과 미학』을 참고). 가토를 비판한 다른 지식인으로는 “다카하시 데츠야, 고모리 요이치, 우에노 치즈코, 이효덕, 오코시 아이코, 요네야마 리사 등이 있으며 이들의 글을 모두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137쪽, 각주 55번). 고모리 요이치, 다카하시 데츠야 엮음, 『국가주의를 넘어서』, 이규수 옮김, 삼인, 1999; 우에노 치즈코, 『내셔널리즘과 젠더』, 이선이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9; 다카하시 데츠야,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0. (다른 맥락이지만,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 넘어서기 주장은 서경식과 다카하시 데츠야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도 한다. 이 부분은 또 찾아봐야 할 문제.)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백낙청은 왜 가토의 편을 들었을까? 「韓国の批評空間」, 22-23頁에 백낙청의 답변이 실려 있는데, 백낙청의 문제의식 핵심은 앞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더 나은 공동체(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이며, 거기에는 네이션이라는 구체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39). “사실 바로 이런 네이션(역사주체)에 대한 집착이 백낙청으로 하여금 가토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토 역시 네이션이 없으면 사죄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139). 

백낙청의 호의적 평가는 이후 창작과비평사에서의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 한국어판 출간으로도 이어졌다. 가토 역시 그 책 한국어판 서문에서 백낙청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누가 옳은지를 따지기 이전에, 조영일은 이러한 의견 차이가 “가라타니와 백낙청, 또는 『비평공간』과 『창작과비평』 사이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평한다(140). 그리고는 더 나아가 “한국비평은 자신의 시야를 네이션 바깥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회고한다(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