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글] 김경만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
김경만,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 -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 아카넷, 2015.
세미나에서 쓴 쪽글들.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김경만, 아카넷, 2016) 1-3장 쪽글.
요약
책은 (특히 이론가와 행위자가) 대화를 통해 생활세계나 삶의 방식의 변화가 유도될 수 있는가를 다룬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에 대한 것이다.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서론에서 하버마스와 로티 논쟁의 핵심적 문제를 설명한다. 하버마스 로티 논쟁의 핵심에는, 로티의 반플라톤주의를 과연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은 유효한 세계관인가 하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1장에서는 하버마스의 대화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하버마스 이론의 원류(源流)—루카치,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로 이어지는 비판 이론—를 설명한다. 2장에서는 하버마스의 이론을 설명한다. 3장에서는 로티의 이론을 설명한다.
토론
리처드 로티에게 있어, 새로운 언어를 통해 당연한 것을 당연시하지 않게 보게 하는 등의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업적(147쪽)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T1 시점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언어관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T1 시점에서 다양한 시인, 소설가, 언론인—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사적인 관심을 충족하기 위해 “생각하지 못했던 언어를 창조하고 제도화하는” 데에 골몰한다(147). 이들 중 일부의 언어들은 사람들에게 받아지고, T2의 시점에서 곧 우리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일부 변화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여기서 로티 이론의 난점은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T2의 시점에서, 사후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연유로 예술의 역사는 철저히 망각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김경만이 «담론과 해방»에서 이미 제기한 것이다. 어쨌든, 로티에게 있어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업적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파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과 다르게 아이러니스트 이론가는 단순히 사적 목표만이 아닌 공적 목표를 추구하는데 로티는 그 공적 목표—철학적 논증을 통한 정의 실현, 인류 해방—의 추구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세계를 변화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 쪽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의식적인 목표 추구를 통한 사회 변혁은 우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우리는 공론장에서 합리적 대화를 통해 서로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프로그램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능한 사회 변화의 힘은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길인데, 이는 그 자체가 ‘우연적’으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회 변화를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예측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선동가들의 언어는 어떠한가? 이들의 피끓는 수사는 사람들과 세계를 변화시키지 않는가?
한편 다른 문제로 ‘공적 목표’를 추구하는 이념들에 따라 어떤 가치를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문학가들이 존재한다. 참여 시인들을 생각해보자(일단 생각나는 것은 80년대의 박노해부터 지금의 송경동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들은 물론 합리적 논증을 통해 세계를 바꾸기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맑스주의 사회변혁 프로그램) 문학을 한다. 말하자면 개인의 사적 관심, 최종어휘를 만들어 내는 것에만 골몰해 있지 않는 문학가들이다. 그러나 물론 이들도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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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김경만, 아카넷, 2016) 4-5장 쪽글
1.
로티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을 통해 인간의 잔혹함과 고통을 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그러한 일반적인 이론적 검증—즉 화용의 보편적 구조가 충족될 수 있는 이상적 담화 상황이 현실화되고 제도화되었는가 혹은 아닌가의 검증—에 의해서는 무엇이 현재 해결되어야 할 잔인함이고 고통인가를 ‘찾아낼 수 없다.’ 둘째, 한 발 양보해서 그런 문제를 찾아내서 논쟁한다고 가정해도 논리적인 직접적 논증은 논쟁 당사자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를 결정해줄 수 없고, 다만 서로의 주장을 재묘사하고 재분류함으로써 논쟁을 무한히 이어나가게 할 뿐이다.”(178쪽)
여기서 첫째 반박을 주목하자. 로티가 말한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하버마스는 자신이 가정한 “‘공론의 장’ 안에 “이미 토의와 논쟁의 주제가 존재하고 있을 것””(182쪽)이라고 가정하는데, 로티는 토의와 논쟁의 주제는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로티가 보기에 토의와 논쟁의 주제를 테이블에 올리는 주체는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또한 그로써 “지엽적인 진리 기준이 더 포괄적인 진리 기준으로” 확장된다(183쪽). (물론 로티는 ‘토의와 논쟁’을 통해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버마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하버마스 논리 속에서는 토의와 논쟁의 대상인 주제를 부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가 토의와 논쟁의 주제를 제시한 예로 소설 ‹톰아저씨의 오두막›을 들고 있다. 흑인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라는 합리적인 주장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는 내러티브(192쪽)를 가진 소설을 통해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범위를 확장”(190쪽)한다. 이렇게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혹은 소설이 제시하는 새로운 내러티브에 동의하는—사람들의 수가 확장될 때 사회는 변화한다.
2.
로티의 주장은 설득력있어 보인다. 하지만 잠시 하버마스의 편을 들고 싶어진다. 로티는 ‘찾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왜 찾아낼 수 없을까?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은 현재 해결되어야 할 잔인함과 고통을 분별할 수 있다. (물론 그 잔인함과 고통은 일상 행위자들이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탓에 생긴 것이다.) ‘흑인과 백인은 다른 인간이며, 따라서 흑인들을 일부 사회의 영역에서 배제시켜야 한다’라는 명제가 있다. 하버마스의 프로그램에 따르면 비판이론가는 이 명제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타당성 주장이 제기되는 세 개의 분리된 영역을 얼마나 잘 구분하고 있는가를 따질 것이다. 그리고 분리된 세 개의 영역이 각각 요구하는 타당성 기준에 따라, 위 명제가 합리적인지를 가릴 것이다.
다만 하버마스가 가지지 못한 것은 더듬이다. 비판이론가들은 산적한 사회 문제 가운데 어떤 것이 현재 해결되어야 할 고통인지를 특유의 감지력(더듬이)를 통해 과연 찾아낼 수 있는가?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가? 인종차별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과연 인종차별을 해야 한다는 규범적 주장에 대한 비판이 공론의 테이블에 제기될 수 있느냐는 불투명하다. 물론 문제가 주어진다면 (하버마스적) 비판이론가들은 합리적 재구성을 통해 차별적 명제의 타당성을 가려낼 수 있다.하지만 비판이론가들이, 사회에서 뭐가 문제인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3.
하버마스라면 아마 이 문제를 비판이론가들이 가진 위치—‘가상적 참여자’—를 강조함으로써 돌파할 것이다. 이는 이론가들이 일상적 행위자들보다는 어느 정도 인식론적으로 특권적 위치에 있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로티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나는 로티가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을 하버마스가 상정한 이론가들의 위치와 똑같은 지점에 위치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 역시 무엇이 현재 해결되어야 할 잔인함이고 고통인가를 ‘찾아낼 수 없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이 특권적 위치를 점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 지금-여기의 중요한 문제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무엇이 문제인지는 말할 수 있지만). 그리고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작품은 그것을 수용하는 일상적 행위자들을 전제로 한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성공 여부는 일상적 행위자들이 폭넓게 작품을 수용하고,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만약에 읽히지 않는다면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작품들은 망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로티의 이론은 변화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은 세상의 고통과 차별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새로운 은유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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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김경만, 아카넷, 2016) 결론 쪽글.
요약
김경만은 결론 장에서 로티와 하버마스의 논쟁 요지를 다시 요약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버마스는 행위자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을 통해 그들의 인식이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지점을 지적하고, 이론가 역시 가상적 참여자로서 행위자들과 논쟁을 통해 합의로 나아간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이러한 기획에 대해 로티는 반박한다. 무엇이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는지는 하버마스처럼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절차적 규칙”에 의해 찾아질 것이 아니라, 소설, 시, 민속지, 리포트 등에서 세계의 고통을 찾아내고 묘사하는 언어 사용을 통해 찾아지는 것이다(225-7쪽).
하버마스와 입장을 같이 하는 매카시(T. McCarthy)는 모든 발화에는 보편적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정향되어 있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을 들어 로티를 반박하고자 한다. 하지만 로티에게 있어 그러한 보편적 진리에의 정향은 상대적이고 특수한 문화권—서구 문화권, 그곳에서도 대학이나 세미나 실—에만 통용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상대적인 문화권들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히틀러와 같은 타자들에게 그들의 어떤 발화가 틀렸음을 최종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227-33쪽).
로티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편적 진리의 추구로 얻어낸 “초문화적 타당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세계의 고통에 대한 재묘사라고 주장한다. 그것이야말로 “지배에 대한 최선의 저항 전략”이 될 수 있다(233-6쪽). 김경만은 여기서 로티의 철학에 대한 사회학적 판본인 제프리 알렉산더의 연행(performance) 이론을 소개한다. 알렉산더는 문화변동이 사회적 연행을 통한 예시와 설득의 과정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문화변동은 어떤 특정한 주장의 진리치가 타당하냐 타당하지 않느냐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연행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질 만하냐 아니냐에 따라 일어난다(241-50쪽).
논의
1. 제프리 알렉산더의 연행 이론은 보다 넓은 문화적 변동이 아닌, 제도를 통한 사회의 변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연행 이론은 김경만이 제시한 한국 결혼 문화의 변화에 대해서도 설득력이 있고, 지금 예를 들어보자면 퀴어들의 권리 확보도 사회적 연행의 성공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이미 연구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제도화된 경로를 통한 사회의 변화—입법운동 등—를 과연 연행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알렉산더는 문화적 변동이 우선 선행해야 그러한 제도적 변화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돌파할까?)
2.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로티 철학의 사회학적 버전인 연행 이론은 계급적 이해관심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 연행은 그 내러티브의 결론을 청중들이 진정성 있는 것(authentic)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고 문화적 변동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내러티브가 상층부 계급의 이해관심에 반한다면? 국가나 지배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사회적 연행은 과연 공적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어느 정도 대중들에게 진정성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곧 지배계급(자본)에 의해 기획된 대항적 연행에 의해 무력화되지는 않을까? 한편 국가(상부구조)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하수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일 때 어떤 사회적 연행이 성공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제도화로 귀결되지는 않지 않을까. (앞서 말한 서구에서의 퀴어운동의 성공사례는, 퀴어들의 권리보장이 곧 자본의 이해에 상당히 발을 같이 맞춰 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퀴어퍼레이드에 가보면 구글이나 러쉬, 아메리칸어패럴 등의 쟁쟁한 기업들이 부스를 차리고 후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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