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Social Theory 11장 니클라스 루만의 급진적 기능주의 요약번역
2017. 9. 4. 12:15
Social Theory 11장 “Niklas Luhmann’s radicalization of functionalism(니클라스 루만의 급진적 기능주의).” 요약번역. pp.249-280.
도입 및 배경
니클라스 루만 역시 독일 사회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그만의 방식대로 새로운 이론적 종합을 했는데, 여기서 종합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루만은 하버마스처럼 해석학을 통한 고전 이론들을 종합했다기보다는, 서로 경쟁하는 이론적 학파들의 중요한 관심들을 방기evade하거나 재정식화reformulate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애초부터 기능주의적 분석 방법을 사용했고, 점진적으로 ‘거대이론super theory’으로 변하게 된다.
루만의 생애
그는 중산층 가족에서 태어났고, 그의 세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국가사회주의(나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종전과 제3제국의 붕괴에 대한 그의 경험도 사뭇 달랐다. 이런 것이 후에 사회-정치적 사건에 대한 그의 ‘거리를 두는distant’ 애티튜드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법을 공부하고 처음에는 고위공무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질리기 시작했고, 하버드 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게 된다. 여기서 탈콧 파슨스를 만나고 제대로 아카데믹 커리어를 시작하고자 결심한다. 루만의 첫 책은 조직사회학에 대한 대규모의 연구이다. 주목할 만한 그의 저작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데, 보수적 사회학자 헬무트 셸스키(Schelsky)의 도움으로야 1966년 한 해만에 박사-포닥 자격을 받고 빌레펠트 대학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그가 연구 프로젝트 내용을 제출하길 요구받았을 때 그가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회 이론; 기한: 30년; 비용: 없음.
1960년까지 그는 조직, 법사회학자로 보였고, 1971년 하버마스와 논쟁하며 이는 바뀌게 된다. 그는 하버마스의 대항자로 이름을 날리고 1970년대 많은 독일 사회학자들이 루만 캠프나 하버마스 캠프에 합류하게 된다. 루만은 후에 독일에서 많은 영향을 확보하게 되고(아마도 사회학계에서는 하버마스보다 더?) 다른 사회학 이론가들과는 다르게, 그의 이론적 관심을 다루는 ‘Soziale Systeme’ 저널이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창간된다. 루만은 1980년대에 있어 국제적 명성을, 특히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얻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좋은 번역가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둘째로는 그의 매우 추상적 이론 빌딩이, 매우 전문화되고 경험적 경향이 있는 미국 사회학계에서 의심쩍은 눈초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80-90년대에 루만은 일종의 이론의 팝스타가 된다.
루만의 지적 전통
1) 탈콧 파슨스가 결정적이다. 루만은 파슨스의 초기 행위이론에는 관심이 없었고, 후기 기능주의 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루만은 파슨스의 이론에서 하위 체계들이 존속을 위해 혹은 상위 체계를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기능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의 문제는 사회과학이 경험적으로 체계가 어떤 생존 요건을 가지고 있는지 검증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구조를 분석 대상의 첫 번째로 놓고, 기능을 두 번째로 놓는 이러한 구조기능주의적 접근에 불만족한 루만은 파슨스의 분석적 전략을 거꾸로 세워보게 된다. 그는 파슨스적 ‘구조기능’ 체계이론을 ‘기능구조’functional structural 이론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252) 그가 보기에 구조기능주의 이론은 구조 그 자체를 문제화하고 구조 형성의 목적을 탐구하거나 체계 형성 그 자체를 탐구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능의 개념을 구조의 개념 앞에 놓음으로써 위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Luhmann, ‘Soziologie als Theorie sozialer Systeme’, p.114)
이로써 루만은 파슨스와 크게 세 측면에서 달라지게 된다. 첫째, 파슨스에게는 중요했던 ‘질서’의 문제가 루만에게는 더 이상 사회학의 주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슨스 후기 이론의 규범주의적 측면은 하위 체계들이 ‘잠재적 유형 유지latent pattern maintenance’ 기능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만은 이론적 측면에서 이와 결별하고, 또한 경험적 측면에서도 그는 현대 사회에서 가치와 규범이 더 이상 통합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별한다. 둘째, 파슨스와 달리 체계가 체계의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구체적 요소들로 정의되지 않고 그의 규범주의적 측면도 사라졌다면 루만에게 있어 체계는 실제로 매우 추상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루만은 생물학—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해 유기체가 자신을 적응시키는—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끌어오게 된다. 그에게 있어 사회 체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른 행위들과 경계지어진 서로 관계가 있는 행위들interrelated actions delimited from other actions”로 정의한다. 체계—사회 체계를 포함한—는 환경과 구분되는데, 여기서 환경environment이란 단순히 생태학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체계의 부분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킨다. (253) 이런 관점에서 체계의 안정성stability은 변하지 않는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체계와 환경과의 관계로, 그리고 변하는 환경에 관한 체계 구조와 체계가 가진 경계의 상대적인 불변성을 가리키게 된다(Luhmann, ‘Funktionale Methode und Systemtheorie’, p.39). 이로써 루만은 조직의 내부 목표나 내부적 가치가 조직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한다는 전통적인 조직 이론의 가정과 결별할 수 있게 된다.
셋째로 루만은 사회 체계들의 기본적 문제들은 존재하는 구조들에 의해 완전히once and for all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기본적 문제들은 언제나 임시적으로 어느 정도만 성공적으로 해결될 뿐이고, 그런 문제들은 아주 다양한 형식과 구조들에 의해 임시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루만은 체계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식별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파슨스와 결별한다. 루만은 그의 기능주의를 ‘등가기능주의equivalence functionalism’라고 이름 붙인다. 즉 체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등한(등가적인) 해결책은 언제나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조건은, 체계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정도로 요구되는 자기변이를 허용할 수 있게 조직되고 제도화institutionalized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54)
이런 식으로의 전통적 기능주의와의 결별—그리고 등가기능주의로의 이행은 전통적 기능주의에 가해진 비판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기능주의가 인과를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떤 가설이나 묘사만을 할 수 있다는 비판. 루만은 기능주의가 실제적 인과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인정한다. 루만은 기능주의가 인과적 설명을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가 아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만은 등가기능주의가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등가기능주의는 실제로 일어난 특정한 기능적 성취보다는, 체계가 그 가능성을 통해 환경에 대한 외부적 경계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매우 많은 가능성들—즉 등가적 성취들—을 지목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능주의의 인과적 설명을 할 수 없음은 약점이라기보다는 강점이 되고, 휴리스틱heuristic 모델이 된다.
2) 루만은 역시 생물학적 연구에 영향받았으나, 루만이 생물학 개념을 자주 끌어오게 되는 건 그의 후기 저작에서이다. 루만이 영향받은 중요한 다른 지적 전통은, 매우 독일적인 학제인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이다. 20세기에 이와 관련한 중요한 사상가는 막스 셸러와 헬무트 플레스너(Helmuth Plessner)가 있다. 그리고 아놀드 겔렌(Arnold Gehlen)도 언급되어야 한다. 그의 저작 Man: His nature and place in the world는 1940년에 쓰여졌는데, 여기서 인간은 Mängelwessen, 즉 결함(lack)이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256) 겔렌은 인간이 동물과는 다르게 본능과 충동을 결여(lack)했다고 본다. 이러한 본능과 충동의 결여로, 인간은 단순히 환경에 대해 생존만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세계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행동’을 취하게 된다. 즉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겔렌이 보기에 이러한 특징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매우 큰 부담을 준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인간은 습관과 루틴을 이용한다(=Entlastung). 이러한 부담을 줄인다(Entlastung)는 개념이 루만의 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간만이 부담을 줄이기 위해 루틴과 습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전통 또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257)
Entlastung을 루만의 체계 이론의 어휘로 번안하자면 그것은 ‘복잡성의 최소화reduction of complexity’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번안은 겔런의 개념과는 조금 달라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겔런에게 있어 분석의 출발은 인간 존재, 그리고 인간 존재의 행위였다. 그러나 루만은 행위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루만은 체계의 목적, 체계의 자기생산의 목적이 바로 복잡성의 최소화라고 본다. 제도, 안정적 구조나 체계는, 특정한 상호작용의 형식을 제공하며, 상호작용하는 당사자집단들에게 열려 있는 옵션의 폭을 제한한다. 그리고 이로써 개인의 행동의 안정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의 질서 잡힌 행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효율성을 늘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복잡성의 최소화는 체계를 환경으로부터 구분지어준다. (258)
3) 마지막으로 루만이 영향받은 것은 후설Husserl의 현상학이다. 루만은 그의 지가그이 심리학에 대한 연구를 끌어들인다. 후설은 지각이 의식의 능동적인 성취achievement에 의존적임을 밝혔다. 후설의 현상학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지향성’, ‘지평선’, ‘세계’, ‘의미’인데, 루만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회 체계로 적용시킨다. 체계 혹은 사회 체계는 세계의 무한한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기능적 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준거점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복잡성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종류의 환원으로야 의미가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체계는 후설에게 있어 개인을 지각하는 것처럼 구조화된다. 후설에게 있어 지각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으며, 개인은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어떻게 의미가 생성되는지 파악할 때에만 그들의 내적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루만에게 있어 체계도 그렇다. (259)
우연성
루만의 위와 같은 종합은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첫 커리어인 관료조직에서의 경험을 활용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공식적 조직이나 행정조직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문제들이 그의 다양한 경험적 분야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 영향을 많이 끼쳤기 때문이다. 이는 하버마스와 루만의 다른 차이점을 보여준다. 루만은 하버마스와는 다르게 비-규범적이다. 사실, 루만은 지극히 반-규범적이다. 루만은 사회비판에 전혀 연루되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 1945년의 그의 경험에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연성contingency'에 대한 그의 개념이다. 루만에게 있어 우연성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제임스는 모든 정치적 행동은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적인 결과를 불러오며, 그러므로 반유토피아적인 개혁주의를 주창했다. (260) 이러한 우연성의 개념은, 루만이 명확한 인과적 명제를 주장하는 것을 삼가고 등가기능주의적 방법을 쓰는 것을 정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루만의 논의 ‘스타일’에마저 영향을 주었다. 사회적 질서란 언제나 우연적인 것—필연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성이란 언제나 특정한 효과를 필연적으로 불러 일으키는 특정한 행동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루만의 논의 스타일은 ‘낯설게 하는’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물론 정치성을 의도한 브레히트의 희곡과 루만은 다르다). 루만은 규범, 가치, 종교 등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마치 카메라 바깥에 있는 것처럼 말을 한다. 이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태도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261)
루만 이론의 발전 단계
루만의 저서가 매우 많기 때문에, 그의 작업 전체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종합적으로 여기서 모두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본서에서는 중요한 저서 중심으로 루만의 사상을 간략하게 개관하고자 한다.
A) 1960년대 루만의 저서는 대부분 조직, 법, 정치사회학 주제에 관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초기 작에서도 그의 이론적 관점이 드러나 있다. 나중의 거대이론을 만들기 위한 발판이 된 셈이다. (262)
Funktionen und Folgen formaler Organisation은 기존 전통적 조직사회학의 핵심 가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다. 베버와 미헬스Michels는, 조직의 목적과 도구합리적 해위모델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고 가정했다. 루만은 이러한 가정에 의문을 표한다. 루만의 경험적 연구는 관료제 조직 안에서의 비공식적인 관계가 상당한 역할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런 것들은 보스와 비서 간 신뢰 있고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다. (263) 베버의 관료적 이념형에 있어, 공식적 조직과 관료제에서의 비공식 채널 내지는 비공식 절차는 장애물밖에 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이런 통찰은 상징적 상호작용론적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루만은 한발짝 더 나아가, 조직의 분석에서 ‘목적’이란 역할을 행사하지 않거나, 아니면 미미한 역할을 행사할 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9장에서 본, 하버마스가 루만의 논의 중에서 중요하다고 간주한 것과 같다.) 루만에게 있어 조직이나 체계의 유지에는, 공식 목표의 설정보다 더 나아간 것이 요구된다. 조직이나 체계가 하위 단위로 분화되는 것은 오로지 최상위 목적에서 파생된 것은 아니다. 모든 체계는 그것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 말고도, (환경에 대한) 자기보존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즉 체계는, 목적의 달성과 같은 단일한 기준 하에서 합리화될 수는 없다. 체계는 다기능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루만은 그의 첫 번째 중요한 저서에서 행위 이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조직이나 관료제의 영역에서만 수단-목적 카테고리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행위자의 수준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겔렌을 인용하며, 행동은 목적의 실현으로 이해되는 것보다는, 특정 목적이 없는—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는 베버나 미헬 류의 관료제 모델에 대한 비판을 열어 준다. (265) 베버와 미헬스는 거시수준에서의 관료조직의 이념형에서 도구합리적 행위를 중심에 놓았고, 이는 루만이 보기에 관료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실재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들었다. 루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곧바로 체계이론으로 ‘개종convert’한다.
루만은 그의 저서 Zweckbegriff und Systemrationalität에서 듀이와 같은 미국 실용주의자들을 인용하며, 그들의 목적론적 행위 모델에 대한 비판을 흡수한다. 듀이는 인간 행위의 흐름을 인과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즉 어떤 특정한 원인이 행위를 유발시킨다는 관점을 버린 것이다. 루만도 이에 동의하나 그는 수정된 목적론적이지 않은 행위이론을 전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는 곧장,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목적이나 가치가 충족시키는 기능이 뭔지 묻는다. (266) 루만은 그것을 묻는 것이 인과를 명확하게 식별할 수 없는 사회과학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이 행위에 대해 목적이나 가치를 자꾸 참조하는 것은, 그 목적과 가치가 단순히 행위자에게 있어 복잡성을 감소시켜주기 때문이라고 루만은 대답한다. (267)
만약 목적이나 가치 같은 개념이 행위를 구조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논의들이 우리에게 기존의 행위 이론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제시한다면,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개념적 도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Zweckbegriff und Systemrationalität (The concept of ends and system rationality)이라는 제목을 우리는 도구적 합리성 vs. 체계합리성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도구합리적 행위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곧장 행위를 체계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행위와 행위자의 준거점은 그저 커뮤니케이션을 구조화하는 것이며,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인성적 체계나 사회 체계의 것으로 귀착시키는 것이다. 즉 루만은,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계이론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파슨스의 경우 그의 체계이론에서 컨트롤 센터의 위치(위계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은 Latent Pattern Maintenance 체계이다. 왜냐하면 파슨스의 후기 체계이론은 사회가 가치에 의해 통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만은 이와 전혀 다르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대 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이는 위계적으로 상위에 있는 어떤 체계나 가치를 가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민주정치나 법 체계에 대한 분석에서 명확히 논증하고자 한다. 루만에 따르면, 민주선거나 사법절차는, 정의나 진실과 같은 어떤 궁극적인 가치에 매여 있지 않다. (268) 정의나 진실이니 하는 담론은, 루만이 보기에 그저 복잡성을 감소시키는 특정 기능을 충족시킬 뿐이다. 정당성(legitimacy)이란 정치나 사법 체계 그 자체 안에서 생산된다. 선거나 사법 같은 절차들은, 정의나 진실 같은 이슈들을, 그 절차에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학적 승인’에 관한 것으로 변형시킨다. (269) 체계의 안정성과 동학을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하위체계의 특정 절차나 로직이다.
B) 1970-80년대, 루만은 매우 다양한 이론적/경험적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펴낸다. 원래 관심사인 법과 조직에 대한 책을 펴내는데, 1981년의 연구 “Political Theory in the Welfare State”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때 루만이 지식사회학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의 중요한 연구는 1982년의 낭만적 사랑의 의미에 대해 논한 저서 열정으로서의 사랑(Love as Passion: The Codification of Intimacy)이다. 루만이 처음으로 이론적인 혁신을 꾀한 건 1980년 초이고, 이는 저서 Social Systems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루만은 여기서 체계이론을 더욱 급진화한다. (270) 루만은, 파슨스 등의 저서에서 드러나는 ‘체계’란 오직 실재에 더욱 잘 접근하기 위한 분석적이고 이론적인 도구라는 관념을 버리게 된다. 그는 체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이해한다. 체계는 실재적이며, 즉, 사회 현상들은 실제로 특징상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체계이론에서는, 체계이론에 관한 진술은 실제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다.”(Luhmann, Social Systems) 여기서 루만은 체계이론이 보편성을 담지한 ‘거대 이론supertheory’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루만은 그의 체계이론을 새롭게 정초한다. 그는 자신의 체계이론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왔다고 적고 있다. 첫째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로, 체계를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부정확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증명됐다. (271) 둘째는 체계를 부분-전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체계-환경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루만이 1960-70년대에 견지했던 입장이다. 그런데 이제는(셋째 단계), 루만이 주장하기에, 생물학과 신경생리학에서의 발전이 체계이론 안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는 체계-환경 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하며, 체계를 ‘자기준거적 체계’로 이해해야 함을 가리킨다고 한다.
즉 생물체를 그것이 대하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operational autonomy를 중심 문제로 둘 때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체는 환경으로부터 특정 물질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생물체들이 그런 물질을 처리하는 방식은, 완전히 체계 내적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논리는 환경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는 두 칠레 신경생리학자 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의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그들 자신만을 준거로 삼는 자기생산적 체계로서 기능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를 자기생산적(autopoietic) 체계라고 불렀다. 자기생산적 체계는 조직적으로 닫혀 있는 체계이며, 체계 내의 성분들이 체계 자체 안에서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자율적인autonomous 것이다. (272)
루만은 이러한 생물학에서의 발견을 사회 체계에 적용한다. 물론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그들의 이론이 사회과학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에 회의를 표했다. 루만은, 심리학적/사회적 체계를 자기생산적 체계로 간주한다. 그는 이를 체계이론에서의 ‘두 번째 패러다임 전환’으로 부른다. 루만이 보기에 기능적으로 분화된 하위 체계는, 그들의 내적 논리만을 따른다. 그러한 하위 체계는 외부로부터 방해받기만 할 따름인데, 하위 체계들이 그러한 방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그 체계들의 특정한 프로그램에 달려 있다. 따라서 루만에게 있어, 사회를 전체로 간주하고 계획하는 개념은 불필요하다. 루만은 경제에 개입하려는 정치적 시도들을 비웃는다. (273) 다른 체계를 계획하거나 통제하려는 개념은 루만에게 있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위)체계는 진화evolve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기능적 분화의 우위에 대한 루만의 접근은 소위 ‘자기생산적 전환 autopoietic turn’ 이후 더욱 급진적이어졌다. 물론 자기생산적 전환은 루만의 체계이론의 단순한 급진화 말고도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루만은 자기생산적 전환의 흥미로운 이론적 결과로, “성분elements의 개념에 대한 급진적 시간적 한정화radical temporalization”을 든다. 즉 체계를 구성하는 성분들은 지속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것을 담고 있는 체계에 의해 꾸준히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Luhmann, Social Systems). 이러한 자기생산적 모델을 사회적 문맥에 적용함에 따라, 루만은 체계이론이 주체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인 유럽적인 관념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274) 이는 즉 사회 체계는 인간이나 행위에 기초해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사회 체계는 커뮤니케이션에 기초해 구성된다. 루만은 인간이 사회 체계의 구성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에 이른다. 사회 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하는 인간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이다(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이로서 사회의 개념은 확장될 수 있다. 사회적 체계—가장 확장적인 사회 체계는 사회들societies인데—는 멈추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으로 정의될 수 있다.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이 끝나는 곳에서 끝난다. (275) 즉 현대 시대의 사회를 민족국가에 국한해 보는 것은 루만에게 있어 완전히 오도된 것이다.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범위가 확장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사회global society’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C) 이미 논의했듯이 루만은 사회 현안에 대해 아이러닉한 태도를 견지한다. 루만은 사회 현안에 대해 진단하는 글을 매우 제한적으로 썼을 뿐이다. 예외라 하면 Ecological Communication이라는 저서이다. 이 책은 1970년대 이후로 매우 중요해진 환경운동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루만의 논의는 매우 도발적이다. (276) 루만은 현대사회의 기능적 분화를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현대사회의 하위체계들은, 말하자면 ‘이진법’을 사용하여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예컨대 과학이라는 하부체계에서는 진실/거짓이라는 이항대립이, 정치라는 하부체계에서는 정부/야당이라는 이항대립이라는 식이다. 여기 중에서 어떤 하위체계도 다른 것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없고, 다른 것을 조종할 수도 없다. 여기에 더해 각 하위체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코드code들이 다른 체계로 쉽게 번역될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사회체계가 자기생산적이며 언제나 내적 논리를 따라 기능하고 환경에 의해서는 방해받을irritated 따름이라는 루만의 논리는, 체계에 대한 계획이나 규제가 가능하리라는 전망을 애당초부터 배제한다. 따라서 루만은 현대 사회가 생태학적 위협에 대해 적응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표한다. (277) 루만이 보기에,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이나 집단이 전체적인 ‘사회’에 대해 환경적 위험들을 경고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시점은 없다. 루만이 보기에 환경주의자들이 점한 도덕적 우위는, 이민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항의에 대한 것만큼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루만에게는 두 스탠스 모두 멍청하고 거만한 것이다. 그런 식의 운동이나 저항은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기능적 분화를 해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환경운동에 대한 루만의 비판은 이론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그는 특정한 형식의 기능적 분화에 대한 생태학적 경고를, 기능적 분화 자체에 대한 경고와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 버린다. 마치 그는 생태주의자들이 근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한다. (279)
마치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70-80년대에 있었던 중요한 이론적 종합을 개괄했다 (루만, 하버마스). 그러나 이론적 종합의 시도는 다른 곳에서도 이뤄졌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앤서니 기든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것이 다음 장의 주제이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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