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Social Theory 9장 하버마스와 비판이론 요약번역
2017. 8. 29. 09:35
Hans Joas and Wolfgang Knöbl, Social Theory, Trans. by Alex Skinn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9장 “Habermas and critical theory(하버마스와 비판이론).” 요약번역. pp.199-221.
도입 및 배경
탈콧 파슨스의 지배적 패러다임과 그것에 대한 대항으로 신공리주의, 해석적 접근, 갈등론이 등장한 이후, 사회학에서의 이론적 작업은 상당히 ‘유럽화’되어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미국 사회학이 상당히 높은 정도로 전문화됐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여러 가지 이론을 검증하거나 아니면 배타적으로 경험 연구에만 집중했다. 미국의 상황에서 사회학은 다른 인문학의 주제들과 절연하게 되었다(철학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유럽에서는 그런 분화가 심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철학적-사회학적 논의들의 연결끈을 가깝게 유지시키고 새로운 이론적 종합을 시도한 학자 중 하나이다.(199) 1981년의 주저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그러한 종합 작업의 대표 격이다.
하버마스는 1929년에 독일에서 태어났고, 히틀러 소년단 멤버였다. 제3제국의 몰락은 그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의 작업들은, 독일 역사의 암흑기를 받아들이고(coming to terms) 좌우측의 전체주의를 방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힐 수 있다. 그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이러한 활동이 그에게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룸에 있어 철학 학제 하나로는 충분하지는 않고 다른 학제들과 충분한 접점을 유지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것의 연장으로 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서 1950년 중반 research fellow로 활동하게 된다. (200)
하버마스는 1971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떠난다. 이는 특히 그가 급진적 학생운동—그가 좌파 파시즘이라고 비난한—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취직한다. 이 시기에 그는 magnus opus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작업한다. (201)
하버마스의 세 가지 지적 전통
하버마스의 사상을 형성한 배경으로 세 가지의 지적 전통을 지적할 수 있다.
1) 맑시즘. 1950-60년대 초까지—학생운동uprising 전까지—서독 학계는 맑시즘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버마스는 맑스를 다렌도르프보다는 좀더 오픈마인드로 받아들인다. 다렌도르프와는 반대로 하버마스는 맑스의 과학적, 철학적-규범적 논의, 사회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잠재능력을 활용하는 이론과 실천에 관심을 가졌다. (202) 맑스의 논의에서 철학적인 것을 삭제한다면 갈등은 언제나 넘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이는 현재의 사태를 넘어서는, 다른 실재를 상상하는 이론적 자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버마스가 맑스를 무비판적으로 읽은 것은 아니다.
(a) 그는 스탈린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포스트)스탈린 소비에트 체제가 실패한 프로젝트임을 숨김없이 인정한다. 그런 식으로 맑스를 읽는 것을 그는 비판했고, 또한 그 기반 위에서 공산당 간부들이 내놓은 정치적 결론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b) 그러나 이것이 그가 동유럽 반체제 인사dissidents들의 맑스 해석과 완전히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맑시즘은 순수한 철학으로 읽을 수 없다. 맑시즘은 반드시 정치, 사회적 분석과 같이 다뤄져야 한다. (203)
하버마스는 맑스의 노동가치론이 “가치의 가능한 원천으로의 기술적 생산력의 과학적 발달”을 무시한 한에서 더이상 옹호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강조한 것도 더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복지국가가 시장에 강하게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의존성은 더이상 자명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버마스는 맑시즘이 자본주의에서 사회 진보의 가공할 위력을 간과했다고 봤다. 적어도 서유럽에서 물질적으로 빈곤한 계급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맑시즘에서 보이는, 어떻게 집합행동이 일어나는지 경험적 연구가 없는 어떤 거대한 주체의 존재를 상정하는 논의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인다. 즉 그는 맑시즘에서 경험적 연구를 강조한 것이다. (204)
2) 독일적 전통에서의 해석학. 해석학은 이해Verstehen의 기술이다. 하버마스의 작업은 베버나 짐멜이 이해의 문제를 다룬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행위이론을 구성함에 있어 그는 이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버마스의 논의 스타일은 해석학적인 특징—이전의 저자들과 텍스트들과 씨름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구성하는—으로 가득 차있다. 하버마스는 서구 역사의 철학적 문젲 전영역을 이해하려고 한 해석학적 노력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3) 시작부터 그는 서구 자유민주적 사상 지향적이었다. 이는 그의 생애적 특징에 기인한다. (206) 그는 언제나 연구의 자유라는 가치를 강하게 의식했고 민주적 제도 시스템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비판이론
하버마스에 대한 이차 문헌들은 그가 다른 중요한 지적 전통—즉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의 전통에 서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에 회의적임을 밝힌다. 그렇다면 비판이론이란 무엇인가? 비판이론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가 만든, 특정한 형태의 맑시즘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비판이론의 지지자들은 서구의 정치경제사회적 위기를 맑시즘의 이론적 자원을 가지고, 하지만 ‘혁명적 주체’는 상정하지 않은 채 돌파하려고 했다. 사민당의 개혁을 지지하거나 나치즘을 지지한 독일 노동자들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탈린 공산당, 소비에트 맑시즘과도 거리를 둔다. (207) 비판이론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1940년 초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공저 『계몽의 변증법』이다. 이 철학적 서적은 극한으로 합리화(베버적 의미에서)된 세계가 결국에는 폭력적 야만성에 굴복해 버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비관적 관점을 견지한다.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의 비관적 특징을 공유하도 않으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초기 저작을 잘 알지도 못했다. 하버마스가 초기 비판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느 정도 의식하지 않은 채 초기 비판이론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옳을 듯하다. 1960년에 와서야 하버마스는 비판이론의 핵심 인물로 인식되었다.
언어
하버마스가 영향 받은 세 가지 지적 전통은 서로 연관이 잘 안 된다고 누군가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 의사소통의 특별한 본성’이라는 전-과학적인 직관이라는 아이디어로 뭉쳐지고 결합된다. (208) 비록 전과학적인 직관으로 파악되는 것이지만 하버마스는 인간 의사소통에 관한 자신의 설명을 명확히 하고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는 왜 합리적 논증이 논쟁 당사자들에게 특유의 압력을 행사하는지, 왜 그리고 어떻게 더 좋은 논증이 합의에 이르게 하고 행위의 조화coordination—폭력이나 시장을 통한 조화보다 더 우월한—를 이루게 하는지 설명하는 데에 굉장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기술-도구적 합리성의 폭정을 경계하고 반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판이론과는 입장을 같이 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비관을 공유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언어에는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할 수 있는 종합적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지적 여정
하버마스가 이론적 종합에 이르는 길은 매우 길었다. 우선 하버마스는 첫째로 여러 연구를 통해 의사소통의 사회학적 실현가능성과 생산성을 검증하고자 한다.
1) 1962 포닥 논문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것은 부르주아 시대(18-19세기)의 공론장과 그 제도를 역사사회학적으로 연구한 논문이다. 오직 공론장에서만 사람들은 그들의 관심interests을 합리적 토의에 부칠 수 있다—그들의 관심이 변할 수 있고 그리고 합의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210) 본 논문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언어의 효과와 중요성을 탐구한 그의 첫 번째 시도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역점이 하나 있다. 그가 18-19세기의 공론장을 마치 그것이 실제로 현실상에서 실천에 부쳐진 것처럼 너무 이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2) 1963년 에세이 모음 『이론과 실천(Theory and Practice)』. 여기서의 에세이들은 맑시즘을 다루고 있고, 하버마스는 맑시즘을 “실천적 의도를 가진 경험적 역사 철학”(Between Philosophy and Science, p.212)으로 간주한다. “그가 그 자신을 이해했던 것보다 맑스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ibid.) 이 에세이 모음집에서 하버마스의 논의가 실천praxis이라는 개념에 매우 영향받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안토니오 그람시를 비롯한 동구권의 망명 학자들은 맑스의 초기 철학적-인류학적 저작과 그 속의 실천 개념에 매달렸다. 여기서 실천이란 단순히 도구합리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집단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예술의 세계로부터 얻어진 것이나, 혹은 창조적인 자기표현, 혹은 선good의 실현과 도리에 맞는 삶을 실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버마스 역시 1960년대 초기 이러한 개념에 깊게 몰두해 있었고, 이것은 즉 이때 언어적 분석이 그의 이론적 체계 안에서 약했고 그가 실재를 분석할 적절한 도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12)
이 에세이 집에서 그는 언어적 분석이 아닌 초기 맑스의 개념으로, 자본주의에서의 기술적 합리성(technological rationality)의 증진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는 멈추지 않는 과학과 과학-기술적 합리성의 진전이 공동체 생활의 합리적 규제에 관한 정치적인 이슈들의 토대를 침식하고, 그것을 단순히 기술-합리적 문제로 바꾼다고 보았다. 이는 그에게 즉 정치적 논쟁을 전문가들의 지배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3) 1961년 독일 사회학계에서는 실증주의 논쟁이 있었는데, 주인공들은 포퍼(K. Popper)와 아도르노였다. 저자들이 평가하기에는 이것은 실패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아도르노는 사회학의 양적 방법으로의 강한 경향을 경계했다. 그러한 경향 역시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배에 정향된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의 노예화를 불러온다고 본 것이다. (213) 한편 하버마스는 이러한 극단적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원칙적으로는 아도르노가 던진 해방적 과학의 이상을 그 역시 옹호하지만 하버마스 역시 특정 목적을 위한 사회과학에서의 양적 방법 사용에는 동의한다. 이 논쟁에서 혼란스러운 점은 포퍼가 전혀 실증주의자positivists가 아님에도 실증주의자로 딱지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간과된 것은 사실 (하버마스와 포퍼 사이) 의견의 불일치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이다—하버마스는 몇 년 뒤 포퍼의 과학적 이념에 가깝게 이동하게 된다.
4)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68) 이것이 미국 실용주의 논의를 크게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과도기적 작업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증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하버마스는 여기서 과학을 포함한 어떤 지식도 현실을 완전히 진공 상태에서 재현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모든 지식은 그 뿌리에서는 인류학적 관심interest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정신분석학과 유물론적-혁명적 사상은 억압과 지배에 대해 인류를 해방시키는, 해방적-비판적 관심에 영감을 받은 지식임이 주장된다. (214) 하버마스는 포퍼의 과학관이 다른 두 가지의 인류학에 뿌리를 둔 인식관심—의미의 맥락의 설명과 관련된 것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에 관련된 것—을 무시한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합리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후에 하버마스는—적어도 비판적-해방적 관심의 존재에 대한 그의 테제에 관해서는—이러한 입장으로부터 벗어난다. 어떤 특정한 학문이 혁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린 것이다. 그는 종래의 실천 개념에 작별을 고하고 “노동과 상호작용”이라는 이분법을 받아들인다. (215)
5) 1967년의 에세이 “Labour and Interaction: Remarks on Hegel’s ‘Jena Philosophy of Mind’”에서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버마스는 유적 존재로의 인류의 형성이 왜 ‘노동과 상호작용’이라는 두 형태의 행위 사이의 불화와 interplay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아마도 아렌트(Arendt)의 『인간의 조건』(레퍼런스를 붙이지는 않았지만)과 미드의 이론을 참조한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맑스와는 전면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맑스가 성급하게 노동-상호작용 행위를 뒤섞었다는 점을 하버마스는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인류가 생산력의 발전만으로 진보한다는 특정 맑시즘을 비판한다. 명백히 그는 노동과 상호작용을 구분하고, 상호작용적/의사소통적 행위와 도구적/혹은 도구합리적 행위를 구분한 것이다. (216) 이러한 구분은 그의 지적 생애에 있어 매우 깊은 영향을 끼친다—그는 이 구분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문제도 있다. 맑스의 초기 노동 개념—여기서 노동은 단순한 도구합리적 행위가 아니라 표현적 행위의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은 노동과 상호작용의 이분법에서 애매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6) 1969년의 (재판된) 에세이 “Labour and Interaction”에서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자본주의가 그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특징짓는 근본적 구조변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테크노크라틱 이데올로기가 정당화시키는 수사(legitimizing troupe)가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버마스는 여기서 맑시즘적 생산력-생산관계의 변증법과 단절하고 다른 변증법을 상정한다: 즉 체계system과 생활세계life-world 사이의 변증법. 각각의 구분은, 노동 혹은 도구합리적 행위와 상호작용 내지는 의사소통 행위와 상응한다. (217)
하버마스는 고전적 야경국가와 복지국가를 비교한다. 후자에 와서 국가는 단순한 상부구조적 현상이 아니게 되었다. 역시 후자에 와서 자유방임에 대한 고전적 정치경제학 이론도 그 힘을 잃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한 교환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이데올로기를 대체했는가? 하버마스는 그것이, 대중의 충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라 보았다. 동시에 복지국가가 정치에 부정적 이미지를 가득 채워 넣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복지정책은 기능장애dysfunction만을 다루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 관계를 다시 합리적으로 조정할 새로운 이념과 같은 정치의 실천적 내용들은 싹 씻겨 나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즉 대중들은 그 결과로 탈정치화되고 전문가들에 의해 통치되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218) 그는 1960,70년대의 ‘technocratic spirit’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맑스 역시 비판한다. 하버마스에게 있어 계급투쟁 개념은 더이상 현재 사회에 있어 더 이상 명성을 누릴 수 없다. 복지국가에서 투쟁은 끝났거나 진정되었기 때문이다. 계급적 적대의식은 잠재적 형태로만 남는다.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의 이분법이, 현대 사회가 직면한 위기—기술적 문제와 실천적/정치적 문제가 뒤섞이는 것—를 분석하는 데에 맑스의 변증법보다 적합한 이론적 도구임을 역설한다. (219)
하버마스의 이러한 에세이는 두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a) 왜 테크노크라틱 이데올로기는 1970년 중반에 쇠퇴했는가? 환경, 반핵 운동의 결과로 테크노크라틱 컨센서스는 빠르게 끝이 나 버렸다. 한편으로 복지국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자유주의 체제(대처, 레이건)이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테크노크라틱 컨센서스는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론과 시대 진단은 이러한 예측을 수행하지는 못 했다.
(b) 정치적 진단보다는 추상적 이론적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하버마스의 목적합리적 행위의 하위체계(subsystems of purposive-rational action) 개념은 너무 단순하다고 지목될 수 있다. (220) 과연 우리는 모든 행위가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의 영역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버마스는 한편 경제적 하부체계 전체가 오로지 목적합리적 행위로만 형성된다고 보았다. 파슨스의 경우에도, 그는 시장이 어느 정도는 규범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이러한 난점을 잘 알고 있었고, 후에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행위의 유형과 행위체계의 유형을 구분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나가며
후기 1960년대까지 하버마스의 작업의 발전을 추적해 왔다. 그렇다면 이제 1970-80년대 그는 어떤 방향을 택할 것이고, 또 탈콧 파슨스 이후 사회학에서 중요한 이론적 종합synthesis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게 될 것인가? 1960년 후반까지 하버마스의 영향력은 사회학에만 제한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하버마스를 서구 맑스주의자—비록 매우 혁신된 것이라도—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파슨스 이후의 갈등론, 상징적 상호작용론, 신공리주의론 등의 이론적 논의들을 맑스주의적 접근으로만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음 장에서는 무엇이 그의 이론적 종합을 이루게 만들었는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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