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글] 김경만, 『담론과 해방』(궁리, 2005)
2017. 8. 28. 17:15
아래는 세미나에서 쓴 쪽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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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담론과 해방»(궁리, 2005) 3장 쪽글
요약
«담론과 해방» 3장에서, 김경만은 부르디외의 비판이론이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참여자들이 그의 과학적 분석을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분석을 … 일종의 주제넘은 참견으로 생각”(117)하는 사태에 대한 부르디외의 정신분석학적 돌파가 그르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성찰적 사회학을 통해 장 내 참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일루지오를 폭로할 수 있으며, 이것이 참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오인(misrecognition)”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역시 참여자들이 그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으로 보답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 역설적이게도 부르디외는 그러한 저항이 부르디외 분석의 “진리성”을 강화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참여자들의 저항은 “집단방어기제”(프로이트)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만은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오로지 일종의 해석 체계를 제공해주는 것일 뿐 결코 진리의 입증 혹은 “과학적 발견”(131)이 될 수 없기에 이러한 부르디외의 돌파가 잘못된 것이라 주장한다.
둘째는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 체계에서 일루지오 개념이 가지고 있는 모순성이다. 즉 부르디외가 자신을 ‘일루지오’에서 벗어난 인식론적 객관성을 확보한 학자라고 상정하지 않는다면, 부르디외 역시 일루지오에 사로잡혔고 또한 자신이 참여하는 (사회학 학술) 장 속에서 경쟁을 통해 상징자본을 확보하며 “사회적 일루지오를 생산하는 사회학자들 중 한 명이기 때문에” 그의 인식론적 객관성은 흔들리게 된다. 그렇다고 부르디외는 자신의 이론의 객관성을 입증할 독립적인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루지오 개념의 모순과 관련해 김경만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일루지오의 상호 불침투성은 부르디외의 사회학이 사회적 지배의 억압으로부터 일상인들을 해방하는 데 요구되는 환류회로의 설정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배제한다.”(128)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다. 부르디외 이론에 따르면 A장의 참여자는 B장에서의 고유한 목표와 상징투쟁에 관심이 없다(B장 및 그곳의 아비투스에 의해 만들어진 일루지오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 아비투스를 체화하지 않고, 사회학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르디외 이론에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Topic: ‘일루지오’ 개념이 모순적이라는 김경만의 비판에 맞선 부르디외 변호
정신분석학이 객관성을 결여한 비과학임을 받아들인다면, 김경만의 첫 번째 비판은 수긍할 만하다. “집단방어기제”를 운운한 부르디외의 논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찰적 사회학에 대한 행위자들의 부정적 반응이 집단방어기제 때문이라는 근거는 타당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의 성찰성, 그리고 실천성을 생각해 볼 때, 김경만의 두 번째 비판은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김경만의 두 번째 비판에서, (1) 부르디외가 “자신의 발목을 죄고 있는 일루지오의 족쇠를 깨는 방법을 알지 못”(132)했다는 것은 부르디외 이론 체계—적어도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 사회학 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 혹은 비판이론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지점이 있다. 우리는 ‘학위를 받고 학술적 활동에 참여하는,’ 즉 아카데미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사회학 장의 참여자로 상정할 수 있을까? 학술적 비판을 제기하거나 논문을 출판하지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일반인들이 사회학 장의 참여자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일반인들은 비판적 사회학의 일루지오를 일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학교에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하는 동아리가 있다고 해보자. 여기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심층에 어떤 공모와 권력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파헤쳐 보려는 ‘일루지오’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실제로 부르디외를 위시한 학자들의 비판이론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7-80년대 대학에서 이뤄졌던 맑시즘에 대한 관심과 탐독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 청중에 대한 부르디외의 답변 내용 중에서 “친근하고 우호적인 방법”(130)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물론 “친근하고 우호적”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소박하다. 하지만 요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사회학자들의 일루지오를 일부 공유할 수 있으며, 결국 그렇게 일루지오의 공유를 확산시키는 것은 구체적인 운동 방법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우회한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난점은 여전히 존재한다(아마 김경만도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1) 일반인들이 어떻게 부르디외의 난해한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차피 일반인들에게 전달되는 사회학 이론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된 것이다. 일반인이 어떻게 복잡한 사회학 이론을 이해하는가? (2) 일반인들은 ‘정식적인’—굳이 말하자면—학술적 장의 참여자가 아니므로, 사회학계 내에서 부르디외 이론에 대해 “인식론적 권위를 부여”(128)할 수 없다. 결국 부르디외 이론에 인식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카데미 장 내의 참여자들이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암시한다. 왜냐하면 결국 일반인들이 부르디외 이론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 타당성과 권위를 존중해서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타
119쪽에서, 김경만은 “부르디외가 설정한 개념들의 연결망 밖으로 나오면 상징자본의 증대를 위해 투쟁하는 개인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찰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그의 이론은 개념들의 연결망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실재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구성한 이론적 세계와 조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비단 부르디외 뿐이 아닌 모든 사회학 이론에 적용되는 것 아닐까? 이런 식의 비판에 따르면 모든 추상적 개념을 활용한 이론들은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규명하는 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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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담론과 해방»(궁리, 2005) 4장 쪽글
1. 기든스 비판에 대한 의문들
1) “따라서 자기준거적인 사회적 실천이 변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 요소가 내재한다. 첫째는 특정한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현재의 개념적용 방법을 변화시키려는 행위자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요구 또는 관심이 존재해야 하고, 둘째는 이전의 개념적용 방법을 변화시키려는 일련의 투쟁이 결과적으로 새로운 개념적용 방법의 제도화로 귀결되어야 한다.”(164)
2) “… 우리를 ‘더 옳은’ 혹은 ‘더 합리적’인 결혼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가정되는 외적 준거를 우리가 수용했기 때문이[sic] 결혼관행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 관행의 변화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형성된, 현재의 관행을 바꾸려는 압력에 의해 촉발되는데, 현재의 관행이 도전받는 이유는 그런 관행이 (인식론적으로)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169)
위의 인용구를 토대로 볼 때, 김경만은 행위자들이 어떠한 관행을 고치려는 노력의 기저에는 ‘인식론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려는 동기’가 아닌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을 고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행위자들이 언어게임 혹은 사회적 관행의 변화를 추구할 때 도덕적 불만족만을 동기로만 하여 움직이는 것일까.
‘사회(제도)가 어떠어떠한 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발화는, 하버마스를 빌려서 말하자면 규범적 측면의 타당성을 요구하는 규제적 발화이다. 그런데 규범적 측면의 타당성은 특정한 종류의 논증을 전제로 한다. 즉 규범은 개인의 취미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규제적 발화를 한 후 대화의 참여자들에게 그 타당성의 승인을 요구할 때, 우리는 특정한 윤리적 체계를 설정하며 우리의 당위적 주장이 그 윤리적 체계에 부합함을 논증할 것이다. 물론 다른 대화의 참여자들도 우리의 당위적 주장이 우리가 설정한 특정한 윤리적 체계에 부합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를 꼼꼼히 가려가며 우리의 주장을 판단할 것이다. 1
이를테면 (전통적인) ‘여성성’이라는 사회적 규범(혹은 제도)을 생각해 보자. (내재론적 관점에서) 한국 사람들은 여성성, 여성적인 행동이라는 것의 객관적 개념을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공감하며 배려할 줄 알고,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고 성적(性的)으로 정절을 지키는 따위의 행동을 ‘여성적인 행동’, 혹은 여성이 실천해야 할 행동이라고 “실천감각을 체화”(162)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여성성 관념은 물론 도전받고 있는데, 과연 글에서 제시된대로 “‘좀 더 나은’”(169) 여성성을 위해 사람들이 투쟁하고 있다고만 정리할 수 있을까? 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페미니즘 인식론에 준거해 그러한 여성성 관념이 왜 억압적인지를 논증하고, 사회 구성원들은 그러한 논증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고 변화에 동참한다. 여성주의자들은 나름대로 ‘더 옳은’, 혹은 ‘더 합리적’인 여성성에 대한 외적 준거들을 제시하고 우리들은 그것을 수용한다.
기타
* 사회학이 다루고 있는 쟁점들—주로 빈곤, 불평등, 젠더 부문의—은 대개 역사적으로 언제나 규범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폭풍우치는 사회변화의 격랑 속에서 방향을 정해야만 할 때 (실제로 그게 가능하든 아니든) 어떤 편에 서는 것이 인식론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우선 가늠하게 된다. 보통은 규범적 문제에 대해 “좀 더 옳은” 것을 추구하지 “좀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데올로기는 인식론적 우월성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 자잘한 의문: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럽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일까? 도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규범의 총체이다. 도덕은 개인의 미적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불/만족스럽다’는 술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단 문맥상으로 볼 때, 행위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규범에 사회적 관행이 맞지 않다고 생각할 때를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럽다’”고 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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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담론과 해방»(궁리, 2005) 7장 쪽글
1. 낸시 프레이저(7장 말미)에 대하여
1) 낸시 프레이저의 지식인 역할론 논평
낸시 프레이저는 지식인의 역할을 레닌주의적이고 전위주의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레닌주의·전위주의적 관점은 지식인을 “초연한 과학적 관찰자”로 보며, 비레닌주의적이고 비전위주의적 관점은 지식인을 “사회집단의 성원으로 급진적인 정치에 참여하게 한다.”(277) 하지만 역시 낸시 프레이저는 “지식인들을 사회적 노동분업 속에서 정치적으로 유용한 직업적 기술을 획득한 사람들, 따라서 문화변동을 위한 투쟁에 그러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277)
그러나 위의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낸시 프레이저 역시 레닌주의-전위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낸시 프레이저는 지식인들이 인식론적 우월함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는 듯하다. 물론 그러한 인식론적 우월함은,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이나 지식인들이 속한 공동체가 “자유롭게 떠다니는”(277; 이는 칼 만하임의 용어를 빌린 것 같다) 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사회 분업 속에서 유용한 기술을 획득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지식인의 자유부동(自由浮動)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업 속에서 지식인이 일상적 행위자들보다 더 나은 “문화변동을 위한 투쟁”에 사용할 기술 즉 이론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는 당연히 직업적 활동가 즉 전위당의 필요를 역설한 레닌을 떠올리게 한다. 요컨대 사회과학 이론의 오류성과 비토대주의를 전제한다 하더라도 프레이저의 지식인 역할론의 전위주의는 온존한다는 것이다.
2) 지식인=활동가? 낸시 프레이저의 딜레마
프레이저의 이론은 정확히 하버마스가 범하고 있는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프레이저에게 사회과학, 여성학 이론은 비토대주의적이며 오류성을 전제한다. 그는 여성주의 이론이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여성이론은 그것이 고통을 겪는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의 위계 속에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지금까지 당연시해온 믿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279) 하지만 프레이저의 여성주의는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생활세계 내에서 이론가들이 이른바 여성억압이라든가 가부장주의라고 칭하는 것들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프레이저의 이론은 하버마스의 공언(公言)—자신의 합리적 재구성이 반증을 허용하며 변증법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이 공언(空言)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에게 지식인은 활동가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문화변동 투쟁에 유용한 기술을 가지고 있고, 또 사회집단의 성원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에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 집단들이 여성주의가 가지고 있는 기존 전제들을 거부할 때, 혹은 그와 상반되는 생활세계를 이루고 살아갈 때를 생각해 보자. 실용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면 여성주의 이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화변동 투쟁에 유용한 기술을 가진 활동가로서의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통해 이론을 폐기하거나 이론에 전면적 수정을 가할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사회적 분업을 통해 다른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이론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든스와 같이 일방적인 ‘설득’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이론을 재조정할 수가 없다. 전위적 활동가로서 운동할 수밖에 없다(설령 설득한다 하더라도 이는 활동가의 입장을 종국에는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적 설득이다). 이때 지식인은 활동가의 역할을 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비성찰적) 활동가가 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정확히 이 지점에서 여성주의 이론의 비토대주의는 공수표가 되어 버린다.
3) 프레이저에게 여성 집단은 단일한가?
“이런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여성이론은 그것이 고통을 겪는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의 위계 속에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지금까지 당연시해온 믿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277)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여성들은 단일한 집단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전선 속에 살고 있다. 사회 성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나 가치관에 맞추어 그것을 정당화할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끌어온다(혹은 취사선택한다고 하는 편이 더 명확할 수도). 여성주의 이론은, 모두 알고 있듯이, 이념의 전선 속에서 좌파의 편에 속해 있다. 우파적, 보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여성은 물론 여성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 여성주의 이론은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가? (이는 비단 여성주의 뿐만 아니라 맑시즘 등 다른 이론체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파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여성들이 여성주의를 거부한다면 프레이저는 그것을 여성주의 이론의 실패로 받아들일 것인가?
2. ‘이론적 각성’과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ctor) 모델
‘이론 → 행위자의 수용 → 인식의 해방(이론적 각성)’ 따위의 모델은 합리적 행위자의 가정에 기반해 있는 듯하다. 김경만은 이론적 각성은 “억압받는 여성이 현재 거론되는 다양한 여성주의 이론들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하는 이론들 각각의 상대적인 장점을 평가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해야만 한다”(278)고 말한다. 이는 물론 프레이저의 여성주의 이론 뿐만이 아닌 기든스의 ‘설득’ 따위에도 모두 적용된다.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행위자 모델은 행위자들의 비합리적인 행위나 행위자들 사이의 정보의 불평등(well-informed and poorly informed)으로 인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에 기반한 비판이론들의 ‘이론적 각성’에 대한 기대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 아닐까. 대안적 이론들은, 김경만이 부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첫째 “‘이론적 이해를 하기 전에’ 사회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어떤 개혁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306)에게 수용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둘째, 이론이 ‘힙’하기 때문에 유행에 따라 소비되는 측면도 있다. 이렇게 이론이 이론가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위자들에게 소비·수용되는 것을 연구한 경험연구가 있는지 궁금하다.
- 다른 생각: 하지만 166쪽의 각주1번을 주의깊게 봐야 한다. 우리가 특정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그 특정한 판단이 객관적인 윤리적 이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소박하고 순진한 것일 수 있다. 두 가지 이상의 경쟁하는 이론적 설명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옳은’ 것을 제시하는 외적 준거를 수용해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우리가 두 가지 이상의 경쟁하는 이론 중 상대적으로 더 타당한 이론을 확증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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