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헛간을 태우다」에서 목도할 수 있는 것은 지독한 상실의 풍경이다. 그런데 주의 깊게 읽지 않는다면 독자는 「헛간을 태우다」에서 하루키가 대체 상실을 그리고 있는지 또는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짐작하기 어려울 수 있다. 거기에는 하루키의 트릭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상실은 중요한 테마로 쓰이지만 그의 소설은 상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척한다. 여기서 부정의 제스처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대개 그는 정경(情景)의 구체적 묘사로 상실의 서정을 해소해 버리거나, 선문답과도 같은 비유 같은 장치를 사용해 소설의 향방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상실의 서정을 애써 감춘다. 바로 여기에 하루키 소설의 중요한 한 특징—흔히 ‘쿨하다’라고 칭하는—이 있다. 그런데 단순히 ‘쿨하다’고 그의 소설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상실을 짐짓 대수롭지 않게 외면해 보이는 그의 소설은 사실 능숙하고 정교한 기교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헛간을 태우다」의 구성은 A-B-B’-A’의 형태다. 이를 액자식 구성이라고 불러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A라는 바탕이 되는 서사체는 B를 경유해 종국에 있어 어떠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 변화라 함은 상실의 자각이다. A는 ‘나’와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기혼 남성이지만 팬터마임(무언극)을 배우는 여자아이와 진솔한 대화를 함께 하는 모종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도,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 관계는 ‘모종의’ 긴밀한 관계라 칭할 수 있는데, 그러한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장치는 ‘귤껍질 까기’이다. 귤껍질 까기는 그녀의 단순함이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특정한 상황을 칭한다. 그리고 그녀에 따르면, 그러한 귤껍질 까기는, 모순이지만,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54쪽)버림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 
    여자아이가 즉흥적으로 북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고 남자 애인을 일본에 데려옴으로써 서사는 A에서 B의 국면으로 전환된다. 이따금 ‘나’는 병적으로 사과가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그런 10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와 즉흥적으로 여자아이 커플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자아이는 마리화나와 취기 탓에 일찍 잠들고 남은 ‘나’와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A에서 중심적 인물은 나-여자아이였다면, B에서 중심적 인물은 나-남자가 된다. ‘나’는 슈트라우스를 듣다가 갑자기 초등학교 학예회 때의 새끼 여우 연극을 생각하는데, 이때 불쑥 남자가 자기는 헛간을 태운다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자는 종종 헛간을 태우곤 한다. 여기서 헛간을 태우는 것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일단은 무의미하다(남자는 헛간을 태우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말장난에 불과하다). 헛간을 태우는 것이나 귤껍질을 까는 것은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선문답 같은 상징이라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고, 또한 플롯에서 수행하는 기능도 유사하다. 헛간을 태우는 것은 소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어떤 기능만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내부가 텅 빈 상징이라 할 수 있다(반면 귤껍질 까기 상징은 소설의 전체적 내용을 암시한다—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물론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이것을 하루키 소설의 일종의 트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남자가 헛간을 태운다는 얘기를 들은 후 ‘나’는 집 주변에 있는 헛간을 모조리 찾아 헛간이 불탔는지 체크하는 겸 매일 아침 조깅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 달이 넘도록 불탄 헛간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는 남자를 만난다(B’ 국면). 사실 헛간은 이미 타올랐다. ‘나’는 못 봤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분명 놓치셨어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죠. 너무 가까워서 놓쳐버리는 거예요”(78쪽). 여기서 화제는 여자아이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 화제는 남자가 꺼낸 것이다. ‘나’는 여자아이를 그후(마리화나를 피운 날) 본 적이 있냐는 물음에 못 만났다고 대답한다. 이에 남자는 ‘나’가 그녀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잊혔던 ‘나’와 여자아이의 관계가 다시 의식 위로 부상하게 된다(A’). 물론 여자아이는 찾을 수 없다. 
    남자가 태운 헛간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가 의식할 수 없었다.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남자기 때문에 결국 헛간은 여자아이의 존재에 대한 은유로 읽어도 타당할 것이다. 마리화나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남자가 헛간을 태운다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종국에는 여자아이가 사라져 버린 상황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어쩐지 섬뜩해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그런 상상은 접어두고 귤껍질 까기와 헛간 태우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앞서 보았듯이 귤껍질 까기는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음으로써 수행 가능해진다. 실제로 귤은 존재하지 않는다. 헛간 태우기는 소설 플롯 상 귤껍질 까기의 방법론을 수행하게끔 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헛간 태우기에서도 실제로 태워진 헛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나’가 헛간에 대해 골몰함으로써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독자들도 소설의 말미에 와서야 ‘나’와 독자가 그녀의 부재를 망각했음을 깨닫는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망각의 흐름이 이미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나’는 새끼 여우 연극을 생각한 바 있다. ‘나’는 남자가 헛간을 태우는 얘기를 듣고 난 후 잠을 자고 일어나서야 새끼 여우에 대한 생각을 했음을 기억해 낸다. 새끼 여우 연극의 뒷부분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여자아이는 어디로 간 것인가? 남자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하듯이 ‘나’와 그녀의 관계는 어딘가 각별한 것이었다. 그녀의 정식 남자친구가 ‘나’를 질투하기도 했다는 진술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가 헛간 태우기라는 주제에 골몰했기 때문에 ‘나’와 여자아이의 구체적인 관계의 변화는 소설에서 결락된 부분으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여자아이의 부재는 결국 ‘나’-여자 사이의 관계맺음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계맺기의 미숙함에 대해서는 여자아이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단순함이라는 매력에 의지해 남자들을 매혹한다. 그러한 매력의 발현은 귤껍질 까기라는 비유로 상징된다. 귤껍질 까기는 지극히 얄팍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주관이 비존재(귤-없음)의 존재(귤-있음)를 가정하거나 의식하는 것이 아닌 주관이 비존재의 비존재성을 그저 잊어버림으로써 이뤄진다. 
    중요한 것은 ‘나’ 또한 단순하게도 헛간 태우기에 대한 생각을 거치며, 귤껍질 까기의 메커니즘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녀를 잊었다는 데에 있다. 그녀의 없음을 망각한 것은 결국 남자가 그녀의 존재를 귀띔할 때 비로소 자각된다. “주로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권했다”(54쪽). 이러한 적극적인(?) 나의 태도가 남자와 헛간 일화를 거친 후 달라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와 여자아이의 구체적인 관계 변화는 소설에서 결락된 부분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자들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나’와 여자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제3자인 독자들은 무언가 두 사람의 관계에 어떤 삐걱거림이나 실패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뿐이다. 혹은 헛간에 대한 몰두 그 자체가 관계의 실패로의 귀결일 수 있다.
    남자에게 있어 도덕의 유지는 ‘동시 존재의 균형을 인정’함으로써 이뤄진다. 그 동시 존재의 균형이란 풀어 말하자면 내 속의 서로 충돌하는 여러 자아들을 의식하는 행위이다. 내 속에는 헛간을 불태우고 싶은 자아도 존재하며 그것을 꾸짖고자 하는 자아도 존재한다. 남자는 헛간을 태움으로써 그 균형을 이루고자 한다. 여기서 실제로 헛간 태우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남자가 헛간을 태움으로써 자기의 평형을 유지하고 자기가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리화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은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 행위지만, 동시 존재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용인될 수 있다. 그래서 남자의 도덕은 실은 매우 유아(唯我)적이다. 헛간을 태운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이중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헛간 태우기에 대한 골몰도 결국에는 여자아이의 망각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서술자는 ‘나’이기 때문에 여자아이와의 관계에 있었던 실패는 은폐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마지막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는 서술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는 (실패한) 관계의 대상인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 실패(여자아이의 부재를 잊기)를 망각하게 해 준 헛간에 대해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헛간을 태우다」가 단순한 환상소설이 아니며, 제3자인 독자가 ‘나’와 여자아이 사이 관계의 실패를 추론할 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지독한 상실의 풍경으로 비친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오후의 마지막 잔디」, 『중국행 슬로보트』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