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외의 삶과 성장의 불가능성: 존 치버 읽기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도시화는, 핵가족들이 낮은 밀도로 모여 사는 자동차에 기반을 둔 주거 단지인 교외(suburb)와 주로 산업 생산과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를 담당하는 내부 도시(inner city)로 분화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 후 중산층들이 개인의 집을 소유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든 미국 경제의 호황과, 고속도로와 같은 인프라를 수반한 완전한 자동차화(complete motorization), 단독 주택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게끔 발전한 주방 시설과 세탁기, 현대적 부엌 같은 가정 인프라(household infra-structure)의 발달 등에 기인한다.[각주:1]

교외의 삶은 이전과 다르게 중산층 가정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집과 자동차, 마당, 차고의 소유, 그리고 대량 소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메가 쇼핑몰들. 평일,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자동차나 통근 열차로 한 시간을 달려 교외의 단독주택에 도착한다. 집에는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강아지들이 반겨주고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현대화된 주방, 혹은 개인 가정부 덕에 가사노동의 부담은 그리 심하지 않다. 주말에는 자가용을 끌고 쇼핑 센터에 나가 원하는 물건을 사거나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으리라. 실제로 이러한 자유와 안락함이 그동안 미국 중산층들의 이상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교외는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교외는 미국 백인 중산층들의 정치적 보수주의의 근원지로 지목되고는 한다. 휴버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교외의] 삶의 물질성을 볼 때-집 소유주가 자가용을 몰고 사기업으로 일을 하러 떠나는-교외화가 “적대적 개인주의”의 정치를 낳았음은 전혀 놀랍지 않다.” 도시 공간의 특별한 배치가 사람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형하는 것이다. 교외는 역동적인 도시 내부와 비교해 활발한 공적, 정치적 활동이 이뤄지지 않는 “적대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이다.[각주:2]

사적 소유에 의해 보장된 자유는 폐쇄적이며 절연(絶緣)과 도피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외의 공간이 제공하는 자유는 예측하지 못한 관계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성장 서사는 자아와 외부 세계의 관계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의 분투를 다룬다. 이를테면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성장은 에바에 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일부 순응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성장,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관계의 실패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이러한 타인과의 상호작용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강제 자체가 사실은 성장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외부 세계 혹은 타자와의 관계맺음에 대한 실패에 대응해야만 하는 몸짓 자체가 성장인 것이다. 소비와 안락함의 공간인 교외는 노동과 상호작용의 공간인 도시와 대비되며, 우리는 이러한 교외의 폐쇄성이 성장을 어렵게 한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존 치버의 소설은 교외와 내부 도시의 공간적 대조를 통해 교외에서의 ‘성장의 불가능성’, 즉 중산층 가장들의 실패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치버의 소설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일상을 교란하고 위협하는 존재들에 대해 도피하며 자신의 집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의 슬픔(The Sorrows of the Gin)」은 유능한 관찰자인 딸 에이미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화이트 칼라 가장 교외 거주민인 아버지의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새로운 요리사 로즈메리가 어린 소녀 에이미에게 로즈메리의 알콜중독 동생 이야기를 거론하며 “네 아버지 술병을 수채에다 비워버린다면”(68) 어떨까 넌지시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이미는 그녀 가족의 삶이 공허함을, 그것은 의례적인 사교 모임에서의 연기로도 채워질 수 없음을, 그리고 역설적으로도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단정해지고 더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79)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그 공허함의 중심에는 알코올이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제 아빠가 타고 다니는 특별 열차는 그에게 남은 생애의 허례허식과 단조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에이미가 술을 버렸기 때문으로 추측되는, 요리사 로즈마리의 음주와 해고 이후 “끔찍한 술”에 대한 직감은 확증이 된다. 아마 로즈마리는 교외가 아닌 도시 내부의 거처로 떠났을 것이다. 에이미는 그 뒤에도 술을 여러 차례 버리고, 이는 다른 요리사와 가정부의 해고를 낳는다. 이후 에이미는 보모 헨라인 부인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술을 훔쳐 마셨다는 혐의를 제기받고 말다툼을 하게 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사건 후 그녀는 집을 떠날 준비를 한다. 

에이미는 그녀의 행위가 불러온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어른들 세계의 가련한 타락을 감지”할 뿐이다. 이는 어린 에이미의 위치가 교외 생활자인 부모보다는 교외의 ‘이방인’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는 부모에게 묻는다. “그러면 나는 누가 봐주느냐고?”(74) 에이미의 감정적 유대는 중산층 부모보다는 교외 바깥의 (아마도 도시의 슬럼에서 출퇴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도우미들과 더 깊게 관련되어 있고, 그녀가 진을 개수대에 버리는 것의 동기는 아마도 떠난 로즈마리에 대한 감정이 강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말이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어른들 세계의 타락을 “감지”하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볼 때 에이미의 떠남이라는 사건은 자신의 부모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 알람이다. 그들의 교육은 실패했으며, 당신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가출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기타 모험 소설의 가출과 닮아 있지 않다. 소설에 잠시 언급되는 동화 ‘푸른 수염’이 암시하듯이, 그녀는 어른들 세계의 장막을 들추어 보고 난 후 탈출을 결심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발신한 경고 메시지는 무사히 부모에게 도착하여 해독될 수 있을까? 발신의 측면에서, 역장은 소녀의 뉴욕행 편도 티켓 구매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부모에게 연락한다. 

그러나 에이미의 경고는 해독되지 못하는데, 나는 이것이 성장이 불가능한 교외의 삶을 예증하는 치버의 한 문학적 스케치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아버지는 아이와 여행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 아이는 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고, 그리고 실은 그도 여행이 매일매일 똑같은 소비의 연장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는 사람이다. 소설 말미의 탁월한 묘사처럼, 그는 뉴욕으로 떠나고자 하는 딸의 행동이 피부를 조여들게 하는 하나의 메시지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적어도 역사 안에 앉아 있는 그의 딸은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러 온 사도에 가깝다. 그는 딸의 말에 처음에는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딸의 경고는 일종의 계시처럼 “구렁소리, 북소리, 신호 폭죽들이 터지는 소리, 음계종이 울리는 소리”를 그로 하여금 듣게 하고, 잠시 해방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는 짐짓 딸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다고 생각하는 체한다. “그는 어떻게 해야 그 아이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90) 그는 자신의 안락한 주택으로 다시 돌아오는 셈이다. 

우리는 비슷한 회귀를 「다섯시 사십팔분」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블레이크는 그의 여비서인 덴트와 성관계를 맺은 후 그녀를 해고하고, 그 해고 때문에 교외 셰이디 힐 행 통근열차에서 그녀로부터 권총 위협을 받게 된다. 통근열차 속에서 그는 극도의 긴장을 겪게 되며, 거주지의 이웃들인 콤프턴 부인 등은 그에게 있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섯시 사십팔분」에서 교외와 도시의 공간적 특성은 비교적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외는 가정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고, 가장은 가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을 갖는다. 통근열차에서 내리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차는 일터에서 가정으로의 진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다. 일터가 있는 공간인 도시에서 가장은 이러한 안정의 책임으로부터 손쉽게 일탈할 수 있는데, 도시와 대비되는 거주 공간으로서의 교외는 일탈으로부터의 복귀를 쉽게 약속하는 셈이다. 

그들이 관계를 맺은 경위는 모호하지만 블레이크가 비서의 지위와 그녀의 불안하고 유약한 성격을 이용하여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고 버리고자 한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덴트는 왜 블레이크와 관계를 맺고자 했을까? 이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그녀는 어떤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평생 원한 건 약간의 사랑뿐이었어요.”(183) 통근열차 안에서 이뤄지는 그녀의 고백을 감안할 때, 「다섯시 사십팔분」의 덴트는 「진의 슬픔」의 소녀 에이미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가 블레이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억측이지만, 그녀와 블레이크의 관계는 블레이크에게 있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될 수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쉽게 배반당했는데, 사실 하룻밤의 관계는 블레이크에게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는 ‘일탈’과 다를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그녀는 그녀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블레이크를 위협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를 잠시 인질로 삼으며 그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고지하고 싶어 한다. 그 메시지는 수수께끼 같아 쉽게 해석되지도 않고 수신인인 블레이크에게 쉽게 도착하지도 않는다. 그는 메시지를 해석하려 애쓰는 대신 자신에게 무심하게 다가오는 교외의 풍경, 열차 바깥의 플랫폼을 바라본다. “플랫폼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외로워 보였다.”(181) 덴트가 아닌 교외 집이 자신에게 어떤 구원이라도 될 수 있는 마냥. 

소설의 말미에서 덴트는 블레이크를 풀어 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애초에 그를 죽일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블레이크가 그의 삶에 침입한 이방인인 덴트라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하지만 덴트가 그를 포기한 후 셰이디 힐에서 그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느낄 뿐이다. 

“당신은 셰이디 힐에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182) 물론 그는 셰이디 힐에서 도망칠 수 있으며, 그녀가 그를 풀어주었으니 어느 정도는 도망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전해 보이는 도피처로서의 교외는 기실 그의 반성적 삶의 가능성을 좀먹는다. 문제는 셰이디 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아닐까?

  1. Herbert Gans. 1962. “Urbanism and Suburbanism as Ways of Life,” pp. 625-48 in A.M. Rose ed., Human Behavior and Social Processes. Boston: Houghton Mifflin. [본문으로]
  2. Matthew T. Huber. 2013. Lifeblood: Oil, Freedom, and the Forces of Capital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p. 92-9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