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1부 “콩브레” 감상 


 

 

1. 마들렌에 대하여

 


사람들은 흔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들렌을 먼저 꺼낸다. 어느 하루 홍차와 마들렌을 함께 먹은 순간 그 감각 자체가 지난 시골 마을에서의 유년 기억을 솟아오르듯 불러왔으며 이것이 곧 수천 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시작이 되었다는 내러티브는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은 사람이나 읽지 않은 사람이나 『잃어버린 …』을 두고 관례적으로 마들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의 1권 “스완네 집 쪽으로”를 시작하는 1부‘콩브레’는 어떤 물질이 순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향수가 아닌 잠 못 드는 어느 하룻밤의 상념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그러니까 마들렌은 (민음사 판 기준으로) 80여 쪽을 읽어야 겨우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 ‘콩브레’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해 어느 잠 못드는 밤의 상황에서,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 어머니의 저녁 키스를 받기 위해 그것이 가망 없는 시도임을 알면서도 하녀 프랑수아즈를 시켜 어머니에게 쪽지를 보낸 한 일화를 기록한다. 그런데 이런 기억은 콩브레에서의 기억의 아주 작은 국면만을 재생시킬 뿐이다. 즉, “이처럼 오랫동안 한밤중에 깨어나 콩브레를 회상할 때면, 마치 벵골의 섬광 신호등이나 조명등이 건물 한 모퉁이를 선택해서 비추면 다른 부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처럼, 콩브레는 언제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잘린 빛나는 한 조각 벽면으로만 떠올랐다”는 것이다(83쪽). 


그렇다면 위와 같은 ‘분간할 수 없는 벽면’과 대비되는 콩브레에 대한 기억들이 2장(92쪽 ~ 1권 끝)에서 나타날 것이다. 화자 마르셀의 의식이 어머니의 존재에 집착하곤 했던 여러 밤들의 경험에 비교적 집약적으로 지향되었던 1장의 서술 양식과 2장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마들렌이다. 화자는 1장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켈트족의 신앙을 인용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은 식물이나 무생물에 갇혀 있어서 “그 영혼의 감옥인 물건을 손에 넣는 날까지는 …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85쪽)는 것이다. 마르셀에게 잃어버린 영혼은 홍차와 프티마들렌 한 조각에 갇혀 있었다. 화자가 어느 정도 성장한 어느 날—시간이 지났고 상황이 변했기에 유년기의 콩브레를 더이상 찾을 수 없는—화자는 어머니가 권한 홍차와 마들렌을 우연히 마시고, 이것은 화자에게 유년기 콩브레에서 일요일마다 레오니 아주머니와 먹었던 콩브레에 대한 회상을 불현듯 이끈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85쪽). 


 

2. 프루스트의 글쓰기

 


2장의 서술 방식은 1장의 서술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어떤 대상이 의식의 지각에 불러일으키는 연상들을 집요하게 다방면적으로 서술하려고 하고 여러 예술 작품들을 동원해 가며 그것에 대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장황한 프루스트의 서술은 1장에서나 2장에서나 모두 같다. 하지만 다음의 문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90쪽).  


문장이 난해해 그렇게 쉽지는 않지만, 1장의 구조는 비교적 명확하다. 조금 장황하지만 프루스트는 스완 씨의 콩브레 집 방문과 어떤 날 스완 씨 때문에 저녁에 어머니의 키스를 받지 못해 안절부절했던 한 경험을 비교적 전통적인 서사 구조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위의 문장에서 말한 ‘단지 그 잘린 벽면뿐’만을 말하는 것 같다. 2장부터 콩브레의 모습은 굉장히 중층적인 시간 속에서 어떤 단일한 사건의 서술에만 얽매이지는 않은 채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으로 나타난다.


중층적인 시간 속에서 단일한 사건에 얽매이지 않고 콩브레의 모습이 펼쳐진다는 말을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이렇다. 이를테면 110쪽부터 124쪽까지는 화자가 본 콩브레의 성당이 길게 묘사된다. 콩브레 성당의 묘사는 프랑수아즈와 레오니 아주머니(=옥타브 할머니)에 대한 회상 이후, “아주머니가 프랑수아즈와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부모님을 따라 미사에 갔다”(110쪽)는 일과 속에서 시간의 연결고리에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약 14쪽 정도 성당에 대한 긴 설명을 하는 동안 화자는 콩브레 성당에 얽힌 일화나 자신의 인상들을 자유롭게 오가고, 심지어 묘사의 마지막 부분에는 현재 글을 쓰는 화자의 시간까지를 불러들이고 있다(“오늘도 지방 대도시나 파리의 잘 모르는 거리에서 길을 묻는 나에게, 한 행인이 … 수도원 종탑이나 병원 탑을 마치 무슨 표지처럼 가리켜 보일 때, … 나는 하던 산책이나 해야 할 심부름을 잊어버린 채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서서는 …” 123-4쪽). 


다른 예를 들어보자. 130쪽부터 가족의 점심 식사를 묘사하고 프루스트는 콩브레에서 점심을 먹은 후 으레 어머니가 관습적으로 식사를 다 했으면 밖에 나가거나 방으로 올라가서 책을 읽으라고 말한 어느 날을 회상한다. 소설 서사는, 일과 속의 시간의 연결고리(점심을 먹는다 -> 산책을 가거나 책을 읽는다)를 순순히 따르는 듯하면서도 콩브레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뒤섞여 있는 화자의 기억 속에서 잠깐 길을 잃는다. 그 어느 날에서 화자는 “정원 한구석 라일락 그늘 아래 등받이 없는 벤치”(130쪽)에 가서 앉았는데, 예전에는 사실 밥을 먹고 나서 정원에서 머무르기보다는 아돌프 작은할아버지의 휴게실로 들어갔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아돌프 할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146쪽까지 이어지고 그 뒤로는 프랑수아즈와 부엌 하녀, 스완 씨와 지오토 그림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다. 


화자 마르셀과 그의 가족들이 콩브레에서 자주 산책을 하는 것처럼 2장에서 소설은 마치 산책하듯이 서술한다. 그것도 무정형으로. 화자의 회상은 어느 특정한 날(d1)의 일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책을 읽다 보면 화자가 이야기하는 어떤 날이 과연 특정될 수 있는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화자의 기억은 여러 날들(d1, d2, d3 …)을 종합한 일반적인 나날들의 국면들을 이것저것 종횡무진 서술하고 있다. 2장에서의 기억들은 그 공간적 배경이나 다루는 인물들, 사건들이 모두 다르고 오직 콩브레에서의 유년기라는 느슨한 구심점만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3. 소재의 종합, 순환적 구조

 


그러나 2장을 다 읽으면, 비록 소설이 종잡을 수 없는 유년기의 이런저런 단상들을 이리저리 모아놓은 것 같아도, 진행이 무르익으면 게르망트 부인과 스완 양에 대한 사랑, 그리고 화자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라는 소설의 핵심 주제가 아름답고 탁월한 방식으로 정리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237쪽부터 화자는 콩브레 주변의 두 산책길 즉 ‘메제글리즈라비뇌즈’(스완네 집 쪽)와 ‘게르망트 쪽’을 묘사한다. 스완네 집 쪽으로 산책을 나간 어떤 날 화자는 스완 양을 마주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 경험을 회상한다. 256쪽부터는 우연히 목격한 뱅퇴유 양의 레즈비언적 관계에 대한 회상을 한다. 286쪽부터 본격적으로 게르망트 쪽과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묘사가 시작된다.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화자의 사랑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화자는 게르망트 집안으로부터 어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풍취, 무언가 전설과 같은 느낌(주느비에브 드 브라방)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게르망트 부인이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시의 주제에 대해서도 말하”는 몽상을 한다(299쪽). 게르망트 쪽은 화자의 글쓰기에 대한 꿈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날 이후 내가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을 갈 때면 내겐 문학적인 재능이 없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유명한 작가가 되기를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나는 예전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307쪽).


화자가 작가가 되기를 단념한 것은 철학에 대한 소질이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절대적이고 무한한 의미를 지닌 주제를 찾으려고만 하면, 금세 내 머리는 작동하기를 멈추고 내 주의력 앞에는 허공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내게 재능이 없거나, 뭔가 뇌에 병이 생겨 재능이 가로막혔다는 생각이 들었다”(299쪽). 화자는 베르고트라는 작가의 철학을 좋아했다. 베르고트를 읽으며, “그때 갑자기 나는 내 소박한 삶과 진실의 왕국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기조차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치 되찾은 아버지 품에 안기듯이 작가가 쓴 페이지 위에 신뢰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173-4쪽). 재미있는 것은 스완 씨가 베르고트와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화자에게 충격을 안겨주며 스완 양(=질베르트)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도 이어진다(179쪽). 


그런데 게르망트 쪽을 지나며 화자는 어떤 강렬한 인상을 받고, 이것은 그가 마차에서 마르탱빌의 종탑을 보며 그 인상을 기록하는 행위로까지 이어진다. 이 인상이 전해주는 희망은 화자가 “장차 소설가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돌려줄 수 있는 그런 인상은 아니었다. 그러한 인상들은 항상 지적인 가치가 없고 추상적인 진리와도 관계 없는 어떤 특정 대상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308쪽). 즉, 도식적으로 따지면 화자는 베르고트가 표상하는 것처럼 ‘진리의 거울’이 되어 사물의 본질을 비출 수 있는 추상적 글쓰기와, 지적인 가치가 없고 추상적인 진리와 관계 없는 특정 대상에 대한 인식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현상학적 글쓰기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지 긴장하고 있다. 어느 날 게르망트 쪽에서의 마르탱빌 종탑 관찰은 마르셀이 후자 방식의 글쓰기에 전념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글이 나를 종탑과 종탑 이면에 숨겨진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준 것 같아, 마치 나 자신이 암탉이 되어 이제 막 알을 낳기라도 한 것처럼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313쪽). 결국 1부의 마지막에 가서, 마르탱빌의 종탑을 등지고 프루스트는 자신이 왜 이렇게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한 셈이다. 


콩브레의 유년 기억에 대한 화자의 종합적인 묘사는 해가 질 무렵의 아름다운 종탑 묘사로 끝을 맺는다. 종탑은 “서로 바짝 붙어 하나씩 미끄러지면서 아직 분홍빛을 띤 하늘에 매력적이지만 체념한 듯한 검은 형체 단 하나를 남기고는 마침내는 어둠 속으로”(312쪽) 사라지는데, 이 어둠은 2장의 시작 부분에서 낮이었던 콩브레가 시간이 흐른 후 저녁과 밤을 맞이한다는 당연한 수순을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시간적 측면 외에도 어둠이란 공간적으로 화자에게 침실과 어머니의 부재를 의미한다. “우리가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을 하러 가는 날이면 보통은 저녁 식사가 늦어지므로 … 어머니는 손님이 있을 때처럼 식탁에 붙잡혀서는 내 침대로 저녁 인사를 하러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가 이제 막 들어선 이 슬픔의 지대는, 마치 하늘의 분홍빛 띠가 초록빛이나 검정 빛 띠에 갈라지듯 조금 전에 내가 기쁨으로 뛰어 들어갔던 지대와는 너무도 달랐다”(313쪽). 이러한 방식으로 2장은, 아침(낮) - 저녁(밤)의 순서를 거쳐 1장의 배경과 상황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다. 작가의 의식은 유년기 속 다양한 나날들의 여러 의식과 기억들을 콜라주하는 식으로 배치하지만 소설 구조상으로 볼 때 그 기억들은 콩브레 마을의 여러 공간들을 경유하며, 낮에서 밤으로, 다시 1장의 첫 장면이라는 순환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장에서 마들렌의 감각으로 촉발된, 물에 풀어지면 펼쳐지는 일본 사람의 종잇조각 같은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90쪽)은 다시 화자가 잠드는 방으로 축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