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 『정체성』.

2018. 9. 29. 15:14

밀란 쿤데라, 『정체성』. 


소설에 대한 두 가지 은유를 상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거울이고, 다른 하나는 건축물이다. 전자의 시각으로 소설을 봤을 때, 소설의 미덕은 현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다.[각주:1] 소설은 당대 사회를 반영해야 하고 인물들의 심리와 행위들은 납득 가능한, 유사-과학적인 형태로 제시되어야 한다. 물론, 거울 하나로 세계를 모두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소설가는 취사선택과 약간의 변형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류의 생각은 오랫동안 소설가들을 지배해 왔으며 우리가 소설에 대해 논할 때 흔히 드는 개연성이라든지 핍진성(Verisimilitude or truthlikeness)은 바로 이러한 소설관을 가졌을 때 그럴듯한 것이 된다 하겠다.  

그럼 다른 하나는? 건축물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낸 인공적인 것이다. 소설 역시, 소설가가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구축한 무엇이다. 여기서 소설가(건축가)는 자연을 모사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소설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꼭 따를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 저자는 인물들의 입 뒤로 숨지 않아도 된다. 이런 식으로 볼 때 많은 실험적인 기법을 사용한 소설들은 자연을 충실히 비추는 거울이라기보다는 목적이야 어쨌든 소설가들의 생각을 독창적으로 반영한 건물들로 생각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 역시 분류하자면 후자의 소설관을 가지는 작가로, 따라서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을 때 굳이 스토리라인이나 내러티브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사실, 그는 사유를 즐기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특정한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캐릭터는 살아 있는 존재의 시뮬레이션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의 존재죠. 실험적 자아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설은 자신의 시초[돈 키호테]와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돈 키호테를 살아 있는 존재로 실제 생각하기는 쉽지 않죠.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좀 더 생생한 것은 어떤 캐릭터인지요?”[각주:2]  

늙은 자신의 육체를 마주한 샹탈은 소설 내내 다음과 같은 역설에 시달린다. (혹은, 우리는 작가의 그러한 사유가 샹탈을 잉태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녀는 두 가지 시선을 받고 있는데, 하나는 장마르크가 그녀에게 던지는 사랑의 시선이다. 이것은 개별성과 특수성, 대체 불가능함을 대표한다.[각주:3] 다른 하나는 익명의 대중이 그녀에게 던지는 욕망의 시선인데, 보통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니 여기에는 개별성이 무화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샹탈은 샹탈이어야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육체적으로) 매력적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그녀가 늙었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하지만 인간은 사랑만으로도 살 수 있지 않은가?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을진데, 내가 시들어버린 장미꽃이 되면 관심을 거두어 버릴 누군가들의 욕망이 무슨 필요가 있다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은 보통 애인이 있는 사람에게 던지는 누군가의 추파를, 그들의 신성한 언약의 영토를 무례하게 침범하는 행위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쿤데라는 그렇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듯한데, 왜냐하면 “사랑의 시선은 외톨이로 만드는 시선이기 때문이다”(45쪽). 장마르크의 시선은 샹탈을 그녀가 딛고 있는 지반으로부터 잠시 들어 올려 그녀와 그만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공간 속으로 그녀를 위치시킨다. 한편,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은 “그녀를 인간 사회에 머무르게” 한다(46쪽). 결국 그녀는 이 두 시선들 모두를 포기할 수 없고,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그녀는 두 개의 자아--일터나 공원에서 공적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장마르크와 마주할 때 사적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갖고 사는 셈이다.  

그래도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 아닐까 다시 반문할 수 있지만 반대로 샹탈과 장마르크의 사랑이 자리잡은 공간의 취약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연상의 여자였기 때문에 약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46). 그녀는 나이가 많고 결혼한 적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볼 때 이것은 연애 시장에서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녀가 장마르크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우월한 경제력이다(그녀는 장마르크에 비해 다섯 배나 더 많이 벌고, 아파트도 그녀의 소유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시 그녀가 가면을 쓰는 대가로 얻어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위의 조건 때문에 장마르크는 불안을 느낀다. 그녀가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그리고 실제로 변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갖는 다른 자아(가면)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  

가족이라는 전통적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온전한 개인성을 되찾기 위해 가면을 써야 하는 샹탈과는 대조적으로, 장마르크는 가면을 써야만 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오히려 가면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이득--가면은 회사, 사교 클럽 등의 여러 가면 무도회장의 입장을 가능케 하는 티켓이 아닌가--을 포기한다. 이러한 포기로 인해 그가 샹탈에게 가질 수 있는 협상력은 제한되고(그는 육체를 불신하고 혐오하여,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한다) 우정을 ‘배반’한 오랜 친구와도 그럴듯한 관계를 맺는 데에 실패한다. 그가 자신에게 진실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나 커서, 삶의 “변경”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샹탈에 기대야만 한다.  

장마르크는 노화에 대한 샹탈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녀를 사회로 붙잡아 두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45-6쪽) 하에 자신의 정체성을 쪼개 시라노로서 편지를 보낸다. 이러한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고 또 샹탈의 컴플렉스(자신이 나이 들었기 때문에 남자와의 관계에서 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극하게 되어 결국 그와 샹탈이 갈라서는 계기가 된다. 샹탈이 장마르크를 포기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에게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  

소설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제시된다. 연인이 보내는 독특하고 무엇으로도 환원 불가능한 시선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샹탈이 할 수 있는 것은 가족으로 복귀하거나 난교 파티장에 가는 것이다. 사실, 이 두 목적지는 개인적, 독립적 정체성의 포기를 감수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샹탈이 전 남편과 재회하고 아이를 다시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 화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아기를 갖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67쪽). 난교 파티장에 가는 것 역시 자신의 육체를 수많은 익명적 시선에 맡기고 원래는 애인에게 바쳐졌던 자신의 유일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두 가지 가능성 모두 현대적 삶의 조건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사실,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연원 역시 비슷하다고 하겠다. “폐허 위에 희망의 황금빛 오줌을 뿌리는 리틀 보이라는 인물로 의인화되어 히로시마 상공을 날아다닌 것은 바로 생명 그 자체란 말이지. 그렇게 해서 전후 시대가 개막된 거고”(37쪽). 전후 시대 이후 고도의 물질적 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계층으로서 ‘청년’이 발견되었고, 이들은 68혁명을 통해 역사의 주체로 바로 서서 성해방을 부르짖었다. 성해방은 곧 생명의 찬미와 같다. 여기서 바로 난교 파티는 삶과 젊음에 대한 순진한 긍정의 태도로 해석된다. 왕년에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샹탈의 상관 를르와는 “섹스란 씁쓸한 질투심을 자아내는 젊고 건장한 육체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한다(61쪽). 그에 따르면, 에로티시즘(59쪽)은 늙은 엄마와 아이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샹탈의 집에 침입한 시누이처럼 가정을 이루는 것은 역시 아이(삶)를 찬미하는 것에 다를 바 없으며, 난교 파티장과 가족 역시 “타액 공동체”(62쪽)라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사태가 이러하기 때문에 개인성, 혹은 정체성의 발견은 더욱 소중한 것이 된다. 오직 육체에만 집중되는 군중의 시선과 마치 시위를 하듯 신음 소리를 내는 시누이(128쪽)는 각자의 개별성을 무화시키는 소설 첫머리에서 나오는 CCTV의 시선과 닮아 있다. “우리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제되고 녹화되는 이 세계 ... 에서 어떻게 감시에서 벗어나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8-9쪽). 따라서, 소설의 마지막 샹탈과 장마르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대화조차 사라진 풍경은 아름답다. 두 커플은 CCTV의 시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서로 같은 히스테리적 꿈을 꾸는데, 이 프로이트적인 꿈이 지나간 후 둘은 같은 대답을 발견한다.[각주:4]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게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 어떤 사랑도 침묵에 배겨 날 순 없어”(92쪽). 소설의 마지막 장은 여기에 대한 대답이다.  



  1. “그런데 독자여, 소설이란 큰길가를 돌아다니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푸른 창공을 비춰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도로에 파인 수렁의 진흙을 비춰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채롱에 거울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다니! 그의 거울이 진흙을 비추면 여러분은 그 거울을 비난한다! 차라리 수렁이 파인 큰길을, 아니 그보다도 물이 괴어 수렁이 파이도록 방치한 도로 감시인을 비난함이 마땅할 것이다”(스탕달, 『적과 흑』 2권, 민음사, 162쪽). [본문으로]
  2. Milan Kundera, The Art of the Novel, trans. by Linda Asher. [본문으로]
  3. 참고로, 이러한 시선은 장마르크의 우정관과 조응한다. 장마르크는 우정을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관계나 뒤마의 소설에서 나오는 총사들의 관계로 상상한다. 그들에게 있어 우정은 친구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계산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본문으로]
  4. 재미있게도 이 소설의 구도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Eyes Wide Shut (1999) - 원작은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 - 과 매우 닮아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