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에 쓴 글. 

 

레이먼드 카버,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So much water so close to home)」.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수록)


미국 교외 중하류층 가정의 불화와 긴장은 카버의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알코올 중독 문제, 불륜(색욕), 삶 자체의 불확실성, 누군가의 죽음 등. 이것이 「너무나 많은 물」에서도 변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한 마을에서 강간 살해 사건이 일어난 후 남편(스튜어트)과 화자인 아내(클레어)에 흐르는 긴장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카버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 역시 익숙해할 것이고, 카버가 이 소설로 처음일지라도 다른 소설에 충분히 익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카버의 여타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너무나 많은 물」의 어떤 독특한 특성이다. 무엇이 이 소설을 다른 소설에서 주로 다뤄지는 중산층의 불안이나 가정의 위기와 같은 조금은 익숙한 테마로부터 구분지어 주고 있는가. 당연해서 지적하기 머쓱한 것이 있지만 명확히 말하자면 젠더라는 제3항의 개입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많은 가족에 대한 소설들은 나(가정)와 타자(외부 세계) 사이의 이질성이라든지 소통 불가능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녀가 사고로 죽게 되거나 가장이 실직하는 것처럼 외부 세계의 사건이 단단한 핵가족에 침입할 수 있다. 혹은 나(남편)이 타자(아내)의 불륜을 눈치채는 등 가족은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수도 있다. 「너무나 많은 물」에서 그런 두 요소의 대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화자인 아내가 겪는 불안은 그녀의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밀접히 연결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젠더라는 요소의 개입으로 인해 소설은 기타 비슷한 단편들과 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울림의 진폭을 가지며, 매우 짧은 분량의 한계라는 새장에서 벗어나게끔 해주는 상상력의 날개를 획득하게 된다. 


남편이 역시 “가정적인” 친구들과 내치즈 강으로 휴가를 떠난 날, 공교롭게도 옷이 벗겨진 여자 아이의 시체가 강에 떠내려 온다. 그녀는 강간 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되며, 남편과 친구들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을까? 있는 것 같은데 남편은 사건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함구하므로 알지 못한다. 남자들 중 누군가는 후에 여자 아이를 꺼내 손을 묶어 나무에 걸었다고 한다.(이 정보는 소설 시작 부분에서 부부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묘사된 이후 125쪽에서부터 과거 시제를 취해 제시되는데, 이는 화자가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관련 뉴스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주관성이 반영되어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남편의 친구 고든 존슨이 “물이 끔찍할 정도로 차갑기 때문”에 “송어가 딱딱”하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127쪽). 


소설은 현재와 회상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강가의 사건이 있고 난 후 이튿날 밤(127쪽 아래), 화자는 남편이 부엌에서 소리를 낸 것 때문에 깨게 된다. 남편은 “무거운 팔을 내게 두르며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문질렀”고, 이후는 부부 사이 성관계가 있을 법하지만 관계가 일어나진 않은 것 같다. 당시 클레어는 내치즈 강의 사건을 알지는 못했지만 어떤 성적 긴장을 느끼고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소설의 말미까지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스튜어트를 비롯한 남성들이 클레어에게 가하는 성적인 암시나 접촉은 이후 클레어의 의식에서 상당히 강조된다. 소설은 시종일관 건조하고 사실 위주의 기술을 지향하는 문체를 고수하고 있는데, 화자의 의식 속에서 도드라지고 기술(記述)을 넘어선 판단이 개입하는 것들은 모두 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리고 성적인 행위와 상징들은 차가운 강물과 남성들의 낚시와 소녀의 이미지와 교차되며 화자로 하여금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흐른다”(129쪽)는 것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물은 익사한 소녀와 클레어, 그리고 클레어가 어린 시절에 알게 된 여성 살해 사건(129쪽)을 이어 주는 매개체가 된다. 익사한 소녀와 클레어가 어렸을 때 살해된 소녀(허블리)는 모두 강에 버려졌다. 클레어 역시 자신을 그들과 같은 여성의 일원으로 상상한다. “나는 개울을 바라본다. 나는 바로 그 개울 속에서 눈을 뜨고, 얼굴을 밑으로 한 채 바닥의 이끼를 보며 죽어 있다”(129-130쪽). 이러한 상상의 근거와 원천은 클레어가 여성이라는 데에 있다. 


클레어가 느낀 여성으로서의 공감은 그녀로 하여금 소극적 저항의 몸짓을 취하게끔 유도하고, 따라서 소설 속 클레어의 모든 진술들은 몇 겹의 상징을 덮어 쓰게 된다. 클레어는 신문을 읽으며 여자의 사체에 가해진 행위를 곰곰이 생각한다. “하지만 몇 가지 조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 속에 뭔가를 넣고, 베고, 무게를 달고, 측정을 하고, 다시 뭔가를 붙인 후 꿰맸다”(131쪽).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행위의 상징과 성격이다. 시체의 조사에 대해 서술하는 보도 기사는 여성에 대해 가해진 폭력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며, 조사 행위 자체도 강간의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다. 잠시 소설의 첫머리로 돌아가 보자. “남편은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먹는다”(123쪽). 낚시를 하던 강가에서 여자 아이가 죽었음에도 남편의 식욕은 왕성하다. 


남성들에 대한 클레어의 잠재의식은 133쪽 아래를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클레어는 보통 잘 단언하지 않는다. 한데, “그는 내 가슴과 다리를 바라본다. 그가 그렇게 했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134쪽). 다음과 같은 말은 마치 클레어가 남편을 살인자와 같은 자리에 놓는 듯하다. “그들에게도 친구들이 있겠죠. 살인자들 말예요. 그렇지 않다고 할 순 없겠죠”(136쪽). 물론, 그녀 역시 남편은 형법상으로 죄가 없음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은 법이 처벌할 수 없는 행위의 공백에 대해 책임지고 속죄하라는 것이 아닐까? “‘알잖아요.’ ‘내가 뭘 알지, 클레어? 내가 뭘 알아야 하는지 말해봐.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겠어’”(124쪽). 


클레어는 “그는 알고 있다”(130쪽)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태는 변하지 않고, 애도는 여자들의 몫이다(135-6쪽). 죽은 사람을 애도한 후 일상적 삶으로 복귀하기 위한 문턱이 되는 의례가 장례식이겠지만, 식이 끝난 후에도 클레어의 불안은 아직 다 여과되지 못한 불순물이 응고되어 가라앉은 듯 가시지 않는다. 화자는 “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는데, 남편은 성관계를 요구한다. 이렇게 소설은 미묘한 파국을 맞는다. 클레어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예상된 귀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그녀가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암시와 모호함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던 클레어의 수동성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상당한 처연한 풍경을 만들어 내며 독자들의 마음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킨다. 동시에 내치즈 강의 소녀-클레어-허블리의 연대의 끈은 소설을 사회적 장(場)의 문맥에 위치시킨다. 

 

 

추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레이먼드 카버의 한국 수용에 대해 

레이먼드 카버가 한국에 수용되는 데의 일등 공신을 뽑으라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러 지면에서 카버의 광팬(?)임을 공공연히 자처해 왔고, 또한 그는 일본어판 레이먼드 카버 전집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무라카미에 따르면 카버는 문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비록 만난 적은 카버의 미국 자택에서 딱 하루 뿐이라고 한다. 웹서핑을 잘 하면 카버가 무라카미를 만나고 나서 쓴 시를 읽어 볼 수도 있는데(신형철이 번역했다), 어쨌든, 그가 아니었다면 카버의 거의 전 작품이 한국에서 번역될 일은 요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카버와 무라카미의 첫 만남은 무엇일까? 그는 『잡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우연히 어느 선집에 수록된 [카버의] 그 작품[「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1975)]을 읽고 ‘이건 대단한 소설이다’라고 감동하고는 조바심을 내며 단숨에 번역해버렸다”(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이영미 옮김, 비채, 2011). 그런데,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은 무슨 소설일까? 한국어로 번역된 카버의 모든 작품에도 그러한 제목의 소설은 없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아마 하루키가 카버의 소설을 번역할 때 제목을 어느 정도 손봤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것이,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So much water so close to home)를 하루키가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足もとに流れる深い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구글에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으로 검색할 때 알 수 있다. 본 소설은 동일한 제목으로 집사재라는 출판사에서 『숏컷』이라는 소설집 제목 하에 수록되어 있다.[각주:1] 여기서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숏컷』의 번역자는 카버의 영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닌 하루키의 일본어역을 중역한 것이라는 점이고, 사정이 이러하니 하루키가 카버의 소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 소설집의 제목 ‘숏컷Short Cuts’은 미국의 영화 감독 로버트 알트만이 카버의 여러 단편 소설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의 제목으로부터 따온 듯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