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소설을 읽을 시간이 전혀 없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두 개를 읽었다. 단편이다보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2014)의 “비를 피하다”와 “야구장”. 

2. 

“비를 피하다”에서 여자는 불륜 관계에 있던 前 직장의 남자와 헤어진 후 우연히 바에서 만난 중년의 수의사와 돈을 받고 섹스를 하게 된다. 여자는 혼자 간 바에서 우연히 중년의 수의사와 합석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 수의사는 (그런 일이 종종 있듯이) 소설의 여자와 술을 한 잔 한 후 자신의 집에서 시간을 보낼 것을 제안했는데, 그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비싸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이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요 며칠 계속해서 그녀의 내부에 응어리져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함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닫는다(152쪽). 초조함이 사라진 이유를 서두에서의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과 나란히 놓고 볼 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름대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인생 전반에 대해서 좀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즉 우리의 존재 혹은 실재는 다양한 종류의 측면을 긁어모아 성립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분리 불가능한 총체라는 견해다. 즉 우리가 일해서 돈을 버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선거에 투표를 하고, 프로야구 야간경기를 보러 가고, 여자와 자는 각각의 작업은 하나하나가 독립되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것이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생활의 경제적 측면이 경제 생활의 성적 측면이라는 견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 우리는 실로 여러 가지를 일상적으로 사고 팔고 교환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무엇을 팔아 무엇을 샀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다니던 직장은 대형 출판사였는데, 여자가 편집자로서 맡던 잡지가 폐간된 후 여자는 총무과로 사실상 좌천을 받게 된다. 여자는 별다른 기회 없이 총무과에서 잡일을 하다가는 편집자로서의 커리어가 무너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불륜 관계인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남자는 적당한 핑계를 대어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는 배신당한 느낌이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남자와의 관계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여자는 일이 없어 책을 읽거나 레코드를 들었지만 한없는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데(그녀는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지만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지인들은 약속을 미루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 고독감은 알 수 없는 계기로 갖게 된 남자와의 돈을 받고 하는 섹스로 해소됐다. 우연히 돈을 받고 남자와 자게 된 사건으로 인해, 여자는 사실 전 직장에서의 남자와의 관계도 대가가 오갔던 관계임을 직감한 셈이다. 적어도 그녀는 무엇을 팔아 무엇을 샀는지의 사슬의 고리들 각각을 파악할 수는 없어도 직장의 남자와의 관계도 그러한 연쇄의 일부분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의 경제적이지 않은 생활의 여러 측면들(=직장에서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기, 일을 그만둔 후 친구들에게 전화하기)에 역시 경제적 측면(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대가관계를 기대한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 모종의 계기로 드러난 셈이고, 이로써 그녀의 이유 모를 응어리짐은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좀 추상적이지만, 분리 불가능한 총체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3.
“비를 피하다”는 과연 섹스는 공짜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yes or no의 형태로 대답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더 흥미로웠던 것은 화자가 다음과 같이 소설을 끝맺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옛날, 섹스가 산불처럼 공짜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것은 산불처럼 공짜였는데”(157쪽). 이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일종의 추억처럼 읽힌다. 아닌 게 아니라 서두에서 화자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 “물론 훨씬 젊었을 때는 … 나는 아주 단순하게 섹스라는 것은 공짜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호의와 호의(좀더 다른 표현도 있겠지만)가 만나면, 거기서 극히 자연스레 자연발화하듯 섹스가 생겨난다는 생각이다. 젊었을 때는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사고만으로 통했고, 무엇보다 돈 자체가 없었다. 나한테도 없고, 상대에게도 없다. 낯선 여자의 방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면서 차가운 빵을 나눠먹는 생활만으로도 즐거웠다”(136쪽).

회의적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과연 ‘젊었을 때’에도 섹스가 공짜였을까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소설 속 화자가 ‘실제로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느낀 점이 나에게는 흥미롭게 다가왔다(실제로 소설 말미에서 화자는 섹스에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좀 떨떠름하다고” 생각한다). 낯선 사람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차가운 빵’을 먹는 풍경은 어떤 사회적 조건들이 합류해야 가능하고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

자연발화하듯 감정이 교류해 관계를 맺는 그림 자체는 낭만적이며 또 소박하고, 우리에 있어서 어떤 연애 관계의 이상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아침이 되어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면서 차가운 빵을 나눠먹는 생활’은 (본 적은 없지만) ‘몽상가들’과 같은 서구 60년대의 대학생 젊은이들의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대학이라는 공간에 모여 있었던) 자유분방함을 떠올리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 나이대의 세대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 이 풍경은 현재의 한국의 (20대들이 속한) 풍경과는 매우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한국의 대학생들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고(돈이 많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적 자유화가 완수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호의와 호의가 맞부딪히면 섹스를 나눴던 좋은 때를 이야기하지만, 지금 있어서 남녀의 성관계란 ‘호의와 호의’라기보다는 욕망과 욕망이 맞부딪히는 것으로 이해되고, (특히 남성의) 성적 욕망은 순치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자발성과 성적 동의가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따라서 섹스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위험이 항상 내재한 것이며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아무래도 섹스는 자연발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된 느낌이다.

‘산불처럼 섹스가 공짜’였던 시절을 회상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낭만적 제스처는 이해가 되면서도(그런 시절이 있었을 테고, 또 좋은 시절이었겠지), 또 거리감이 느껴진다.

 

4.

“야구장”이라는 소설은 은행원을 직업으로 하는 한 아마추어 소설가와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자신의 습작 소설을 읽어 달라는 어떤 사람의 투고를 받게 되는데, 그 원고에 첨부된 편지가 “예의바르고 간결하고 솔직”해서 투고에 대해 짧은 감상을 남기게 되고, 그에 대해 아마추어 소설가 은행원이 화답해 자신이 살 테니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수락했고, 작가는 은행원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의 소설의 기이한 소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은행원은 실제로 자신이 체험한 이상한 것들을 소설에 그대로 쓸 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작가는 흥미가 동해 그 ‘이상한 체험’ 중 하나를 이야기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은행원은 그리하여 야구장에 관한 ‘이상한 체험’ 하나를 들려주게 된다.

 

은행원은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 속한 어떤 여자에게 푹 빠졌는데, 직접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녀의 뒤를 캐다가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찾게 되는데, 그 아파트는 강을 면해 있고, 그 강 건너에는 한 야구장이 있었다. 은행원은 야구장의 ‘3루석 근처에 있는 낡은 아파트’를 발견하고 여자가 사는 아파트가 정면으로 보이는 낡은 아파트의 방으로 짐을 옮기고, 아버지의 카메라와 망원렌즈 그리고 삼각대를 빌려 그녀의 방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주일 정도 염탐을 하다가 그만둘 작정이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사태는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 야구장 건너편 아파트를 엿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어 학교 생활마저 불가능해졌고, 씻지도 않고 이발소도 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염탐은 여름방학이 찾아옴으로써 끝이 나는데, 왜냐하면 여자가 짐을 싸 고향 홋카이도로 떠났기 때문이다.

 

“[…] 저는 그녀가 떠나고 며칠 동안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며칠이 지나자 저는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목욕을 하고 이발소에 가고, 방을 치우고 빨래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점점 원래의 저 자신으로 돌아갔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원래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스스로를 신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진정한 나는 대체 무엇인가 하고요.

 

여자를 염탐하기를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입안에서 혀가 점점 부풀어올라, 결국에는 질식하고 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마치 액체처럼 제 안의 폭력성이 모공을 비집고 나오는 듯한 그런 느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원은 이상하게, ‘스스로를 신용할 수 없을’만큼 여자가 홋카이도로 떠났다는 간단한 사정만으로 일상 속으로 되돌아간다. 은행원은 “테니스, 오토바이, 음악” 등의 취미에도 냉담해지고 동아리 및 학교 수업에도 나가지 않고, 만약 염탐이 들통나 사회로부터 경멸과 비난을 받아 매장되는 것이 아닌지 매일매일 악몽을 꾸는 등, 염탐 생활에 깊게 사로잡혀 있었음에도, 여자가 홋카이도로 떠난 이후에는 일상을 회복하게 된다. “여름 내내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는 별로 가지 않았던 탓에 학점이 아슬아슬했죠. […] 저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차츰 그녀를 잊어갔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도 거의 끝날 무렵 돌아보니, 전 예전처럼 그녀에게 몰두해 있지 않더군요.” 여자를 훔쳐본다는 것부터가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실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염탐 생활의 해소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소박한 감상이지만 적어 둔다. 일상으로의 복귀는 은행원 자신도 알 수 없이, ‘너무나도 쉽게’ 다가온 것인데, 바로 그 점이 흥미롭다. 사람들은 종종 고백을 한다. 이러한 고백은 흔히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었든,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든, 운이 나쁘게 불쾌한 일을 경험했든)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배웠고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진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은행원의 술회는 그러한 구조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는 염탐하는 자의 삶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것은 여자가 고향으로 떠난 후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시험공부를 하고’ 차츰 잊어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염탐으로 인한 폐인 생활의 종료 과정은 ‘시험 공부를 한다’, ‘그러면서 차츰 여자를 잊었다’는 두 문장으로 압축되어버린 셈인데, 변화에 대한 이러한 고백 방식은 이야기 속에서 여자의 방을 훔쳐보는 것에 대해 별다른 윤리적 반성이 없는 것만큼이나 낯선데, 그런 식의 묘사가 아주 이상한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과거의 어떤 경험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험은 고백의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전형적인 고백이 갖는 이러한 구조는 우리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은행원의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모종의 계기를 의식하고 그에 따라 반성하며 생활의 경로를 바꾸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에는 반성적 태도가 유용하고 또 요구된다는 것과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