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 <구별짓기>, 최종철 역, 새물결. (일러두기에 보면, 일본어판을 참고했다고 나와 있는데, 단순 참고를 넘어 아예 일본어판을 바탕으로 중역을 한 것이 강하게 의심되는 대목이 몇 있다. 일본어에서만 쓰이고, 한국에서는 잘 안 쓰이거나 보통 순화되어 쓰는 한자 표현이 있음.) 나는 Richard Nice의 영역본을 참고하며 읽어 보았다. 페이지 수는 모두 새물결판의 것. 

 

p.28 비난하건 칭찬하건 이들[민중계급]의 음미는 항상 윤리적 토대를 갖고 있다.

p.29 순수한 시선의 초연함은 부정적인 경제적 요구, 즉 안락한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다양한 필요나 요구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유도하는 경제적 조건화의 역설적 산물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일반적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p.29 모호한 번역: “(윤리적 침범이 예술적인 선입견parti pris이 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 (visible when ethical transgression becomes an artistic parti pris) 윤리적 침범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윤리를 위반하는 것’, 혹은 ‘윤리적 규범의 위반’. ‘도덕 규범 위반’이 명확하지 않을까? 

p.30 마지막 문장에서, 특히 Mill의 향기가 드러난다. 즉 교양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감식안이 아닌 '훈련'인 것이라는 관념. 혹은 다음과 같은 전통이 강조하는 것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덕있는 본성의 완성.

p.48 "음악은 부르주아적 에토스가 모든 종류의 예술에 대해 요구하는 세계 특히 사회 세계에 대한 부정 중 가장 급진적이며 절대적인 형태를 띤다." 

p.60 학력이나 등급 구분에 의한 공식적 차이는 분류되는 각 개인들에게 누구나 그러한 차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음으로써 실제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또는 재강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실제적인 존재를 공인된 존재와 일치시키려는 행동을 취하도록 만든다. [self-fulfilling prophecy?] 

p.64 이런 능력은 흔히 가정이나 학교에서 정통 문화를 몸에 익히거나 주입받으면서 획득한 성향을 바탕으로 해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의식적 학습을 통해 습득된다.
=> 
p.65 따라서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문화적 실천들이 학력자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변화하는 이유 또한 이런 식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p.77 대중문화에 대한 절 
만약 서커스나 멜로드라마(…)가 무용이나 연극보다 더 ‘대중적인’ 이유는 단지 덜 형식화되고(…), 따라서 덜 완곡하게 표현되는 이것들이 한층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무대장식의 눈부신 화려함과 휘황찬란한 의상, 흥을 불러 일으키는 음악과 생생한 율동, 그리고 열정적인 배우 등 집단 축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화려한 구경거리를 제공함으로써(나는 음악당이나 가벼운 오페라, 또는 장대한 스펙터클영화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모든 형태의 코믹물 특히 ‘위대한 사람들’을 풍자하고 패러디함으로써 희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모든 형태의 희극들(몸짓, 익살, 광대 짓, 모창 등)과 마찬가지로 흥청망청 마시고 놀거나 허심탄회하게 수다 떠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슴을 탁 털어놓고 호탕하게 웃는 취향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만족감을 주며 다시 이것이 사회 세계를 전복시키고 실천과 예의범절을 뒤집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p.76 주석(26번)
백화점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화랑(畵廊)이다. 익숙한 세계에 속하며 따라서 사용방법도 익히 알려져 있고, 일상의 치장 속으로 삽입될 수 있으며, 일상적인 용어로 이름을 붙일 수 있고 하나하나 평가할 수 있는(…) 제품들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백화점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초월적인 가치, 즉 소위 상층계급의 생활양식의 원리들에 의해 측정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취향과 색감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이름하에 나도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p.85
“양성간의 전통적인 분업에 따라 여성에게는 ‘인간적인’ 또는 ‘인도주의적인’ 과제나 감정이 할당되며, 이성과 감정의 대립이라는 미명하에 여성들에게는 쉽게 감정의 분출이나 눈물이 배분된다. … 따라서 여성은 남성들보다는 미적 성향(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성향은 자연의 거부 또는 오히려 자연에 몸을 맡기는 것의 거부를 가리킨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지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지배계급의 지표로, 이들의 미학적 성향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이 요구하는 대로 ‘자연적’ 감정을 검열하거나 억압할 필요가 훨씬 적다.” 
=> symbolic violence. 남성 지배의 메커니즘. 유년기와 아동기의 학습 단계에서부터 남성은 ‘자연적인 것’을 억압할 수 있도록 길러지고 훈육되며, 사회 공간에서 그러한 자연적인 것을 억압할 수 있는 능력은 보다 더 정당성 있는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p.90
아방가르드 연극이나 비구상 회화에서 나타나는 형식 실험이나 또는 단순하게 고전음악이 민중계급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들 연극이나 음악이 그래도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라고 할 때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전혀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비상한 솜씨와 서투른 손길을, 그리고 ‘진지한’ 형식적 도구와 냉소적인 협잡질을 구분할 수 없다고 느낀다.

pp.103-108 중성화와 가능성의 세계
=> 독립적인, 초역사적인 형식적 쾌를 준다는 관념의 맹점. 
“이리하여 각 [예술적] 체험은 다른 모든 부분적 체험에 응답하고 서로를 강화하는 가운데 예술적 성찰의 매력을 창조하게 된다.” (108) 
“간단히 말해 [장르의] 유사성을 파악하려면 먼저 함축적이건 아니면 암묵적으로건 차이점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106)
프루스트 인용: “배우의 의상이나 사교계 부인의 드레스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옷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모로Moreau가 그린 바로 그 옷, 발작이 묘사한 바로 그 옷이기 때문이다.” 

p.114 소제목 THE AESTHETIC SENSE AS THE SENSE OF DISTINCTION (한국어 번역은 좀 이해가 힘들었음. '구별의 감각으로서 작용하는 미적 감각' 정도의 내용이겠지?)

p.117 "이리하여 이들은 역설적이지만 본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타고 태어난 성향’을 절대적 차이로 만들려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영역 By a paradoxical reversal, they thereby help to legitimate the bourgeois claim to ‘natural distinction’ as difference made absolute. 
[여기서 부르주아지의 요구란 무엇인가? 타고 난 성향을 절대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 

p.118 쁘띠 부르주아의 유미주의 (aestheticism) 

p.121 누가 봐도 분명히 미학적으로 보이는 선택도 실제로는 사회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고 따라서 직접 맞서서 경쟁하고 있는 집단이 택하는 선택과 대립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pp.124-125 '구별 감각 the sense of distinction'의 적대적 본성과, 그 다이내믹을 잘 묘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오직 그들만이 패러디나 승화의 형태로 자신보다 낮은 계층의 유미주의에 의해 거부되는 대상들을 미적 대상으로 복권시킴으로써 모든 거부를 재거부하는 대담한 재주를 부릴 수 있다.”(125)
p.126 각주 69번: “실제로 쁘띠 부르주아지는 ‘상승지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화 ‘엘리트들’이 이들에게 넘겨주는 특히 덜 정통적이거나 아직 정통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영역(이따금 이들의 야망이 표현되는 사진이건 영화건 상관이 없다)에서는 거의 무장해제 상태에 놓이게 된다(이것은 예를 들어 영화감독에 대한 지식의 경우 쁘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지 간의 격차는 작곡자들에 대한 지식만큼 크지는 않다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p.133 "작품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예술애호가 또한 결코 의식하거나 명확하게 정식화하지 않고도 작품의 구성원리를 내면화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술이론과 달인의 체험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데, 이 달인은 통상 자신의 평가원리를 확실히 표현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모든 제도화된 학습은 어느 정도의 합리화를 전제하는데, 이것은 소비되는 재화와의 관계에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유미주의자의 지고지순한 쾌락은 얼마든지 개념규정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이것은 ‘초심자’의 아무 생각 없는 쾌락(이것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눈이라는 신화를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찬미된다)만큼이나 쁘띠 부르주아와 ‘벼락부자’parvenu의 소위 무쾌락적인 사유와도 대립된다. 이들은, 막상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 정말 시시콜콜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화광처럼 항상 경험보다는 지식을 우위에 놓으며, 작품에 대한 논의를 위해 작품감상을, 다시 말해 훈련Askesis을 위해 감각aisthesis을 희생하는 금욕주의적 타락의 형태에 노출되어 있다."

p.135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합리적 예술교육은, 직접적 체험을 대신하고 작품에 친숙해지기 위해 오랜 시간을 버리는 대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해주며, 소위 취향의 자발성이 아니라 개념과 규칙의 산물인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며, 이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해결책을 마련해준다—유미주의자들이 교육학자와 교육학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이것이야말로 처녀수태라는 태고적 신비의 현대판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p.139, 143 역설적이지만 조숙함(la précocité)은 연륜(l’ancienneté)의 효과이다. 귀족성이란 특히 연륜의 한 형태인데, 이것은 (적어도 가풍의 오래됨과 귀족성—실제로 이 두 개념은 동의어로 볼 수 있다—이 가치로서 인정되는 사회에서) 오래된 가문의 후손이 태어나면서부터 소유하게 되는 권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행동방식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희귀한 획득조건, 즉 암묵적으로 최고의 탁월함으로 공인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사회적 권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물건들 즉 축적되고 결정화(結晶化)된 역사, 귀족의 칭호와 작위, 성(城) 또는 ‘국보로 지정될 만한 가옥’, 그림들, 수집품들, 수백년 된 포도주, 고가구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오직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시간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즉 상속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이 모든 물건을 통해, 그리고 오래된 물건을 선호하는 취향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함께 획득할 수 있으며 여유를 갖고 천천히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습득할 수 있는 성향들을 통해 시간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p.152 학자(부르주아지, 신흥 계급, 현학적 체하는 이들)와 ‘사교가’(유미주의자, 쾌락주의자, 귀족)의 구분

p.155 인테리어나 가구의 출처에 관한 앙케트 응답자들이 고른 형용사들은 … 학력자격보다는 출신계급과 더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의복, 가구, 요리 또는 더 정확하게는 의복과 가구나 음식의 구입방식에 투입되는 성향이나 지식만큼 어릴 적의 체험적 습득, 특히 교육하려는 뚜렷한 의사 없이 이루어지는 교육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pp.165-166 ‘구식 독학자’와 ‘신식 독학자’의 대비 


p.170 일종의 정식화? 
“특정한 영역이 정통적일수록 그 영역에 대한 능력을 갖출 필요가 커지며, 그만큼 ‘수지맞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할수록 손해가 막심하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The more legitimate a given area, the more necessary and ‘profitable’ it is to be competent in it, and the more damaging and ‘costly’ to be incompetent. 

p.172
"이와 정반대로 영화나, 재즈, 더욱이 만화나 SF소설 또는 추리소설과 같은 ‘중간수준’의 예술은 문화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데 완벽히 성공했거나 정통적인 방식으로(즉 어릴 적부터 익숙해짐으로써) 정통 문화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두 면에서 모두 정통 문화와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pp.172-173
Thus one might expect the scholastic field to give the highest value to scholastically certified cultural capital and the scholastic modality, whereas the markets dominated by extra-scholastic values—‘society’ salons and dinners, or all the occasions of professional life (appointment interviews, board meetings, conferences etc.) or even academic life (oral examinations at ENA or Sciences Po, for example), in which the whole person is evaluated—would set the highest value on the familiar relation to culture, devaluing all the dispositions and competences which bear the mark of scholastic acquisition.


p.210
이를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성별 분업의 논리에 따라 취향에서는 여성에게 우선권을 준다면(정치에서는 남성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남성의 의복선택에서 남성 자신의 취향의 비중(따라서 옷이 취향을 표현하는 정도)은 상속된 문화자본이나 학력자본만이 아니라(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역할분담은 학력자본이 증가함에 따라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배우자의 학력자본과 문화자본의 크기, 그리고 두 사람간의 차이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