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지헨과 수능

2020. 10. 26. 22:57

고2 말 쯤에 본격적으로 수능을 준비했다. 수능 대비 공부를 하면서 여러 아티스트들을 들었는데 -- 비틀즈와 존 메이어, 포플레이, 빌 에반스, 뱀파이어 위켄드 등을 많이 들었다 -- 그중에 가장 기억이 남는 쪽은 도쿄지헨(東京事変)이다. 특히 수능이 가까워졌을 무렵 [大人(어른)] 앨범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도쿄지헨이 생각나서 종종 들으면 수능 보기 전의 기억과 그때의 느꼈던 생각들도 같이 떠오르곤 한다. 

도쿄지헨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많은 경우 나는 아티스트를 처음 접한 계기를 기억하는데 도쿄지헨은 예외인 셈이다. 누가 추천해줘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것 같다. 어쩌면 시이나 링고가 "群青日和"를 부르는 그 뮤직비디오에 꽂혀서일 수도 있고, 뭔가 재즈적인 화성 등 그런 색채가 가미된 록 앨범을 찾다가 도쿄지헨을 듣게 되었을 수도 있다. 제일 처음 들었던 곡은 恐るべき大人達였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고2-고3 때 도쿄지헨 앨범은 거의 다 들어봤다. 개중에 [교육(教育)]도 좋기는 했지만 역시 [어른(大人)] 쪽이 취향저격이었다. 일단 화장을 고치고(化粧直し) 트랙부터. 고등학생 때에도 보사노바를 참 좋아했다. 조빙이나 게츠 같은 사람들을 깊게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보사노바 리듬 위에 서정적인 여성 보컬이 깔리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이다(그래서 이소라 노래 중에서도, 1집 곡이었나, "청혼"을 제일 좋아한다). 링고의 감미로운 보컬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겠고, 이 곡의 피아노는 참 관능적이다. 그 외에 또 좋아하는 곡은 黄昏泣き(황혼 울음, たそがれなき). 화장을 고치고와 같이 이 앨범에서 드물게 조용한 곡인데, 마찬가지의 이유로 스윙 리듬 위에 깔리는 링고의 목소리가 좋았다. 이 앨범에서 제일 재즈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곡이라고 해야하나. 여기서 링고의 보컬은 좀 더 잔망스럽고, 호소하고자 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성인데, 2분 20초 이후로 감정을 고조시키는 피아노(? 키보드? 무슨 악긴지 잘 모르겠음)가 좋다. 그것 말고도 블랙아웃이나 투명인간, 슈퍼스타는, 원래 도쿄지헨 1집 스타일--록밴드 악기들이 정신없이 질주하고, 열정적인 링고의 보컬이 그 위를 타며 재촉하는--이니까, 좋아한다.  

수능을 준비할 때,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사실 대학 진학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고, 어쨌든 그때의 나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고 사는 게 쿨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서, 점수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냥 1년 동안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지켜보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모의고사 점수는 잘 나왔는데, 이는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첫째로 평소에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국어 점수와 영어 점수는 기본으로 받쳐 줬어서 수학만 공부하면 되었고, 또 둘째로는 내가 수능을 봤던 당시 수능 문제들--특히 수학 과목 문제들--이 그나마 쉽게 나왔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아니면 먼 과거라면 그런 식으로 수능을 준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되다보니 점수를 올려보는 재미도 있었고 국어나 영어나 사회탐구 같은 과목은 공부를 하는 게 목표 점수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의미가 커서 10월까지는 수능에 대해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었다. 

그런데 10월이 되니까 수능에 대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생각보다 점수를 잘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도 있었고, 그때는 워낙 실수가 주는 타격이 크다보니 조마조마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공부 계획이란 걸 대충 세워서 10월 정도부터는 문제를 풀 것도 없고 특별히 더 공부할 것도 없어서 이미 풀었던 모의고사를 풀거나 교육청 문제를 풀곤 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 여러모로 불안했다. 답답하면 공부도 안 되니까 주변을 무작정 산책했다. 당시 공부하던 곳이 한국예술종합학교 근처여서 한예종 캠퍼스를 자주 걸었다. 그때 도쿄지헨을 들었던 것이다. 아마 수능 며칠 전까지도 그렇게 도쿄지헨을 들었을 것이다. 황혼울음(여담으로, 그때는 일본어 한자를 읽을줄 몰라서 '타소가레나키'라고 읽는지도 몰랐다. 그냥 뜻만 알았다)이나 화장을 고치고 같은 트랙이 나오면 괜히 센치해지는 한편 설국이나 수라장 같은 트랙이 나오면 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신나는 느낌도 들고... 그러다가 다시 황혼울음과 화장을 고치고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래도,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은 정말로 음악밖에 없다. 가장 위로가 되었던 트랙은 투명인간(透明人間)인데 별 이유는 없고 링고의 보컬이 거기서 귀엽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능을 봤고 특별히 이변은 없는 성적표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에 지원했고, 그리고 정말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시간이 지나갔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수능을 보고 나서 도쿄지헨을 그렇게 자주 듣게 되지는 않았고... 듣는다 해도 [오락(娯楽)] 앨범이나 [大発見], [스포츠スポーツ] 앨범의 좋아하는 몇몇 곡 위주로 듣게된 것 같다. 그래서 도쿄지헨의 여러 앨범들 중에서 어른(오토나) 앨범 하나에 그때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도쿄지헨이 재결합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도쿄지헨을 다시 듣다가,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주절주절 써봤다. 예전 생각인가. 몇 년 전이긴 한데...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 내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사실 지금의 것과 엄청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때 들었던 것들을 지금도 계속 듣고... 그런다. 그때 들었던 것들은 질리지가 않는다. 캡슐(カプセル)이나 킨(Keane) 같은 몇몇 그룹들을 제외하면 뭐 계속 듣는다. 그렇게 보면 사실 지금의 내가 고등학생 때의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인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아래는 디시인사이드의 시이나 링고 마이너 갤러리에 올라온 앨범 大人의 라이너노트. 
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ingo&no=5213&_rk=tDL&exception_mode=recommend&page=1

 

『大人(ADULT)』 SELF LINER NOTES - 시이나 링고 갤러리

2006년 잡지 "CDでーた"에 게재된 시이나 링고의 도쿄지헨 2집 『大人』 해설01 비밀1기 멤버와 투어에서 연주했던 곡이므로, 그대로 수록해도 좋았겠지만, "첫 번째 곡에서 타성으로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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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비밀

1기 멤버와 투어에서 연주했던 곡이므로, 그대로 수록해도 좋았겠지만, "첫 번째 곡에서 타성으로 하면 맥빠져"라고 이자와가 말하기에, 보컬 파트 이외는 그에게 (편곡을) 일임했습니다. 그것도 즐거웠어요.



02 싸움고수

도입부의 중얼거리는 부분은, 제 휴대 전화로부터 하타의 휴대 전화로 얘기한 것을 녹음 받아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바탕 연극을 한다는 느낌이죠. 연주는 "싸움"이라고 하는 것 치고는, 녹음 할 때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03 화장 고치기

이렇게 브라질의 색채가 나온 곡은 (이제까지) 없었어요. 부모님이 그런 음악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틀어 놓으셨기에, 자연스럽게 (제 안에서) 표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직접 실행하는 것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수치심을 떨쳐버렸습니다.



04 슈퍼스타

투어에서 이미 연주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기타를 격정적으로 치는 편곡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멜로디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는데. 이자와가 이전의 것이 좋다고 해서 싸움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슈퍼스타는 제 안에서는 이치로입니다.



05 아수라장

싱글과 합주 구성이 달라요. 싱글이 어라, 어라, 하는 사이에 완성된다면, 예상 이상으로 상승되어 버립니다. 본래의 이미지도 담자는 것으로, 다시 만들었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06 설국

니가타에 갔을 때 만든 곡입니다. 이것은 엔카입니다. 데모에서는 피아노의 리프와 노래만으로 진행하고, 밴드는 강조의 역할로써만 들어가 있었습니다만, 이자와가 "이런 건 이젠 됐어"라고 하며. 리프도 많이 바꾸어서, 이렇게 됐습니다.



07 가부키

앨범 전체를 통틀어, 한 여성의 바이오리듬,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만, 저 자신은, (본래) 가무(歌舞)하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한 번 돌아가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후반의 흐름을 목차식으로 설명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08 블랙아웃

암전(暗轉)의 곡이죠. 사실은 아야야(미츠우라 아야)가 불러주었으면 했습니다. 귀여운 쪽이 노래하는 이미지가 있었어서. 그래서 제가 부르면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며 자의식 과잉을 극복하면서 불렀습니다.



09  황혼울음

보컬을 삽입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몇 번을 불렀지만 '이거다' 하는 테이크가 기록되지 않아서, 집에 가지고 와서, 곁잠의 자세를 취하며 노래하거나, 여러 가지 자세를 시험해서 불러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멀쩡하게 서서 불렀지만요.
(*역주: '황혼울음'은 '영아산통infantile colic' 증상을 의미. 영유아가 황혼의 시점에 이유없이 우는 증세. 따라서 어머니의 느낌으로 곁잠의 자세를 취하기도 한 것으로 보임.)



10 투명인간

스승(카메다)님 작곡의 귀여운 곡. 가사는 오래 걸렸습니다. 개인이나 조직을 대하는 데 있어서, 어미(語尾)나 어구(語句)를 바꿔야 한다는 게 싫어서, 저도 아들도 모드(mode)의 전환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열심히 작사했습니다.



11 편지

이자와의 작곡입니다만,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노래라면, 어떤 작위(作爲)도 통용되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부르지 않는다면, 이 노래의 진짜 좋은 점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大人』 앨범의 마지막이기에, 무구(無垢)한 것을 배치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