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신우승 옮김, 전기가오리, 2016.
매우 유명한 논문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이하 「기술복제」)에서 벤야민의 논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제1절에서 천명하건대, 그것은 바로 “파시즘의 목적에는 전혀 쓸모없”는 혁명적인 예술 테제를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변증법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생산 조건에서 전개되는 변증법은 경제(토대; 하부 구조)뿐만이 아닌 상부 구조(국가, 이념, 예술, etc.)에서도 전개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예술에서 변증법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술작품에는 제식 가치와 전시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진정한(authentic)’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언제나 제의에 기초를 둔다.” 하지만 기술복제로 인해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파괴되고, 그것은 제의의 기능과 전통이라는 맥락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 또한 전시가치가 제식가치보다 양적으로 매우 우월하게 된다. 이러한 양적 변화는 예술작품의 질적 측면의 전화를 이끈다(변증법: 양질 전화의 법칙). 예술의 실천은 이제 제의가 아닌 정치에 기초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새로운 가능성을 벤야민은 영화를 통해 일부 고찰하고 있다(cf. 6절 ‘기계 장치와 통각’, 12절 ‘대중에 의한 영화의 통제’, 13절 ‘영화에서 생산자와 대중의 일치’, 16절, 18절 ‘영화와 지각의 산만’ 등)
그렇다면 파시즘과 자본은 어떤 목적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에 벤야민은 그것들에 사용되는 개념을 “파기”하고자 한 것일까? 마지막 절에서 요약되어 제시하듯이 파시즘은 정치를 심미화하고자 한다. 이는 무슨 뜻일까.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대중정치의 시대에 대중을 동원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체제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파시즘은 정작 중산층을 비롯한 광범위한 대중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지만 “이 대중이 폐지하고자 하는 소유관계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파시즘은 대중 동원이 가능한 예술(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예술)을 사용해 “대중이 자신을 표현하게” 하지만, 정작 그 예술을 통해 얻어져야 할 것과 예술의 측면에서도 변혁되어야 할 소유관계는 은폐한다. 따라서 파시즘의 귀결은, 영화와 사진에서 그 진보적 함의를 소거한 채 그것을 오직 대중 동원에만 이용하고 자신들의 선전을 낭만화하는 ‘정치의 심미화’일 수밖에 없다(미주 17 참고). 물론 전통과 아우라가 파괴된 시기 영화나 사진에서 제식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 같은 예술주의적·낭만주의적 요소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기묘하게도 예술 영역에서 기술의 발전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유익할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으나 그것은 파시즘 국가 체제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설명을 떠올리게 한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독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극에 치달은 생산력의 발전은 곧 생산의 사회화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다만 이뤄야 할 과제는 전반적인 소유·생산관계의 변혁이기 때문이다. 즉, 제국주의는 더 높은 사회경제적 질서[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이다. 한데,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의 완전한 분할이 달성된 시점에서 금융자본의 이익 추구는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즉 “식민지 분할과 금융자본의 세력권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자본주의하에서 전쟁 이외”의 방법은 없다. 이러한 맑스주의적 분석에서 벤야민은 기술이라는 또 하나의 변수를 기입하고자 한다. 생산력의 발전을 소유 관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니 기술의 발전 역시 “생산력을 부자연스럽게 활용하는 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전쟁만이 소유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현재의 모든 기술 수단을 동원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파시즘은 전쟁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기에 이를 수밖에 없다.
벤야민이 제시한 테제의 혁명적 가능성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변화한 테크놀로지와 예술 형식에서 예술의 실천은 정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그의 테제는 파시즘의 목적을 쓸모없게 한다. 물론 여기서 예술의 정치화를 ‘정치적 목적의 선전에 예술 작품을 동원한다’는 식으로 일면적으로 읽는다면 곤란할 것이다. 새로운 예술 형식은 예술의 대한 대중의 참여 방식과 인간의 지각체계에 변화를 불러오고(18절), 대중에 의한 예술 형식의 직접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고(8절), 예술의 소유관계와 생산관계의 민주화를 불러오고(13절), 시각의 무의식을 일깨우고(16절), 즐거움과 비평적 태도가 결합하고(15절),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일깨워 준다는 점(미주 4)에서 의미가 있다. 즉 새로운 예술 형식의 혁명적 가능성은 말 그대로 그 형식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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