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페디먼, 『서재 결혼 시키기』, 정영목 옮김, 지호, 2001.

추천 받아서 며칠 동안 틈틈이 읽은 책. 원제는 Ex Libris로, 한국어판 책날개에 이렇게 풀이가 되어 있다: “Ex Libris는 책 소유자의 이름이나 문장(紋章)을 넣어 책표지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라는 뜻의 라틴어로, 그 책의 소장자를 지칭할 때 쓰기도 한다.” 책 얘기를 하는 책을 읽은지 얼마 만인지… 저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구절에서 괜스레 반갑기도 했고 또 저자의 내공에 깜짝 놀라거나 지레 질려버린 적도 때때로 있었다. 구체적인 문장들을 빌려 와 얘기를 하는 게 더 낫겠다. 재미있었던 에세이 별로 감상을 써 본다. 

(1) 책의 결혼

한국어판 제목의 모티프가 된 결정적인 에세이 같다. 제목 현지화(번역)에 별 불만은 없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 장서(藏書)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이라기보다는 저자 앤 페디먼의 지극히 사적이지만 책벌레라면 다들 공감할 법한 잡기들이 물건으로서의 책이라는 주제를 구심점으로 느슨히 묶여 있는 수필집이니까. Ex Libris (장서표)라는 제목도 에세이들을 모두 포괄하기에는 아쉬운 듯하다. 

    “마침내 우리가 장서 합병이라는 좀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19)…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사회학에서 흔히 결혼은 친밀한 관계(intimate relationships)로 정의된다. 세간을 합치고 생활을 같이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친밀성을 요구하는 것이 책을 합치는 것이라는 재밌는 표현. “조지는 나와 결혼해 살면서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 때만은 달랐다고 했다”(21). 여기서 그 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구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하던 때.

    “우리의 흠 하나 없는 새로운 체계도 서로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는 엔트로피와 남편의 힘에 의해 누그러졌다”(25). 책을 질서 있게 정리하면 무질서하게 책을 정리하는 사람에게도 이득이 된다고 설득했음에도… 귀여웠던 부분. 

    “우리는 하드백이 페이퍼백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단 책 여백에 써 놓은 글이 있을 때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24). 법적 소유권과 관계 없이, 책이 내 것이 되는 때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책이 내 책장에 배치될 때. 내 책임을 식별할 표지가 없음에도 책은 책장의 다른 책들과 함께 내 개인사의 고유한 맥락을 부여받는 동시에 그것을 구성한다(이것은 뒤에 실린 에세이 “집 없는 책”에서 더욱 깊게 다뤄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둘째, 책에 메모를 하거나 밑줄을 칠 때. 에세이의 마지막에서, 페디먼은 십대 때 읽었던 스타인벡의 책을 다시 읽다가 남편의 메모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발견하게 되고 다음처럼 말한다. “이렇게 나의 책과 그의 책은 우리 책이 되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결혼을 한 것이다”(26). 


(2) 책벌레 이야기

이 에세이를 읽게 되면 저자 앤 페디먼이 보통 책벌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은 이 책의 영어 부제는 Confessions of a Common Reader인데, 커먼 리더라고? 아무리 봐도 앤 페디머는 커먼 리더가 아니다. 페디먼 집은 “매주 일요일 오후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G.E. 칼리지 볼”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퀴즈를 맞추고 매튜 아널드 시구를 던져 놓고 “인용구 알아맞추기를 즐겨하”던 집안(33). 부제의 ‘커먼 리더’는 오히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젠체하고 싶지 않아 하는 상류층의 허영 내지는 자만의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에세이서부터 독자는 알게 된다. 

“네 목록에 있는 단어들을 한번 소리내서 읽어 봐! 우리가 잃어버린 말들은 내포적이고, 우리가 얻은 말들은 지시적이지. 나는 시에서 모뎀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어”(37-38). 이 에세이에서 가장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말. 원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내포적이라는 것은 inclusive, 지시적이라는 말은 ostensible일까?). 아무튼 예시를 들기 어렵지만 위 문장은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잃어버린 한국어 단어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월리들은 모두 자기가 아는 단어를 어디서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해 냈다. … 내가 monophysite의 정의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그 단어를 처음 본 것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였는데, …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 책을 읽었어. 봄이었기 때문에 밀 로드의 나무마다 눈이 트고 있었지.” 나는 그가 monophysite라는 단어를 처음 만나던 영광스러운 날을 기억할 때처럼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정확하게 옛 애인의 얼굴, 옷, 향수를 기억하는 남자는 이제껏 본 것이 없다”(37). 읽고 나서 잠시 생각에 깊게 잠겨 좀 길게 인용해 보았다. 우선,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한국어 단어—학적인 개념 말고 일반적 단어들—를 누군가가 나에게 떠올려 보라고 할 때 나는 선뜻 이야기를 꺼낼 것이 많지는 않다. 단어를 예시로 든다면 잘 모르겠지만. (대신 몇몇 영단어는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다. 이를테면 à la라는 단어는 2017년 여름에 세미나 했던 사회학 이론 교과서에서 알게 된 단어. 랩탑을 옆에 끼고 열심히 단어를 찾아 읽었다.) 유감스럽게도 사전에서 찾아볼 만한 단어를 사용하는 한국어 저자들은 드문 것 같다. 있어도 우리가 잘 읽지 않거나. 
    그건 그렇고 책벌레들이라면 몇몇 책들에 대해 그 책을 언제 읽었는지 순간들을 종종 정확히 기억해 내는 것 같다. 어떤 단어를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그 순간을 지목해내는 게 더 변태 같고 덕후 같나? 생각해 보면 위 인용구에서 ‘걸어가는 길에’ 기번의 그 책을 읽었다는 게 더 변태 같기는 한데 어쨌든(걸어 가면서 책 읽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 한다. 나도 종종 걸어 가면서 책을 읽기는 하지만…). 


(3) 소네트를 멸시하지 말라

“내가 자칭 시인 노릇을 하던 짧은 기간 동안 왜 나는 거의 전적으로 소네트에만 매달렸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그 형식이 나의 기질과 나의 육체적 자아 양쪽을 정당화해주는 형식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나는 몸집이 작았고 강박감에 시달렸다. 나는 서사시나 자유시에는 어울리지 않았다”(58). 

별로 할 말은 없는 에세이이긴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에세이 같고,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취미로 소네트를 쓰는 윌리엄 쿤슬러를 “동지애”(?)를 느낀다고 은근히 놀리며 (책벌레라면 대부분 공감할) 문학에 대한 학생 때 자신의 인정욕구를 은근슬쩍 전시하는 동시에 마지막에는 밀턴의 「나의 실명에 대해서 On his blindness」로. 소네트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주제를 종횡무진 옮겨가는데… 암튼 결국 페디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네트의 위로하는 힘이다. 집에 셰익스피어 소네트 집이 있어도 읽다 덮은 사람이지만 이 글을 재밌게 읽은 건 역시 잘 쓴 글이어서…


(4) 내 조상의 성 

“나는 열네 살 때 아버지의 서재 (…) 책꽂이에서 책등이 안쪽으로 들어가 꽂혀 있는 책을 발견했다. 당연히 나는 그 책을 향해 다가갔다. 그 책은 [영국 매춘부들의 생활을 다룬] <파니 힐>이었다. (…) 부모의 책장은 십대가 성애 문학과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장소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173-74). 



** “컴퓨터가 아닌 뜨거운 금속으로 찍은 활자”(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