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이 끄집어낸 고종석의 속엣말』(삼인) 완독. 우연히 고종석 씨가 뇌출혈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의 소식이 궁금해 신간인 인터뷰집(?)을 읽어 보았다. (요새 참 남들 안 읽는 책만 골라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런 사담(私談)을 책으로 낼 생각한 기획자는 누구였을까 하는 것. 가감과 수정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황인숙과 고종석이 사적 자리에서 이야기 나눈 것을 그대로 옮긴 포맷을 띠고 있다. 

 

이 책은 다음 의미에서 흥미롭다. 첫째, 신영복 씨가 돌아가고 난 후 경향신문 칼럼('연쇄편지마'라는 별명을 안겨 준) 게재를 사실상 거부당한 고종석 씨의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면 고종석 씨가 소셜 미디어 상에서 욕을 많이 먹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엠마 왓슨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책 초반부에 이에 대한 술회도 나온다. 고종석 씨는 이게 왜 맨스플레인인지 반문한다. (그 편지는 책에 실려 있으니 굳이 경향신문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편지 이후 허핑턴포스트에 N(정황상 노정태 씨)이라는 사람이 상당한 비판을 했는데 그것에 대한 고종석 씨 개인의 생각 내지는 감정도 기술이 되어 있다. 

 

뭐 TMI 투성이인데 그냥 인터뷰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TMI라는 점이 이 책이 흥미로운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고종석 씨가 갑자기 불어 얘기를 하다가 내 불어는 명교라는 사람의 수준에 한창 못 미치는데 트위터 상에서 명교의 오역을 재담삼아 지적했더니 친했던 사이였던 명교가 그 후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렇다면 명교는 누구인가. 여기서 독자는 각주를 통해 명교가 연세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정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아마도 편집자가 붙였을 법한 각주는 고종석 씨와 황인숙 씨의 대화에서 안주삼아 등장하는 그들의 50년대 후반생 친구들을 잘 모르는 독자에게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참여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직을 맡았던 강금실 씨도 나오고 뭐 그런다. 고종석 씨와 황인숙 씨의 사회연결망이랄지 그런 걸 책 부록의 인명색인으로 한결 편하게 살펴볼 수도 있다. 이게 책의 세 번째 흥미로운 점 같다.

 

고종석 씨는 뇌출혈 이후에 담배와 술을 못 하게 되었는데 담배를 못 피우니 글을 못 쓰겠다는 것을 반복해 말하고 있다. 이걸 읽고 건강관리를 잘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담배가 없으면 글을 못 쓰는 것이 참 고약한 습관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뇌출혈 이후 우리말과 외국어를 비롯하여 어휘를 자꾸자꾸 깜빡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형식이 인터뷰 대담이라 그런지 글을 못 쓰게 된 글쟁이의 비감 같은 것은 잘 느껴지지 않았고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것이 궁금해서 책을 빌린 것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고종석 씨가 2012년 쯤인가 경향 칼럼에서 절필을 선언했기 때문에--그리고 그 뒤로 드문드문 글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왕성하지는 않았으니--글쓰기에 큰 미련을 두지 않는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다. 이런 추측을 또 뒷받침해주고 개인적으로는 고종석 씨의 현실 감각을 약간 의심하게 한 대목이 있는데, 그는 2012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안철수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당연해 보였으니 박-문-고 삼파전을 구상했다고. 사실 이게 책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역차별과 영남패권주의의 혁파였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사회의 정치 구조를 내각책임제로 개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책에 나온다.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 전자책으로 나온 팸플릿인 <기어가는 혁명을 위하여>일 것이다. 

 

언어학도이자 기자였던 그가, 조직도 없고 경험도 없음에도 대선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나 그 생각의 궤적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관심을 끈 것 같다. 이 분의 현실 인식과 자아 인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비꼬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라 뭔가 아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대선에 나가서 사회를 바꾸겠다는 그런 얼마간은 얄팍한 생각이 오랜 기간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사람에게서 나왔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이번 독서는 노정태의 <논객시대>의 연장선상이 된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대담의 마지막에서 고종석 씨는 누구나 다 아는 대가의 이름을 들며 파리 유학 시절을 낭만적으로 회고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사적 교분도 쌓았고 당시 무슨 총리와도 만찬을 함께했다고 한다. 데리다가 살아 있을 적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회고를 보고 이런저런 감정이 들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지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기억할 만한 일이고,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그런 일화들을 다소간은 맥락 없이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이제 글을 쓰지 안 혹은 못 하게 된 왕년의 '논객'이 대담에서 한 회고로는 사뭇 처연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