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의문
2017. 1. 24. 15:31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책 읽고 나서 작은 의문점
- 책 말미에서 김경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따라서 지금처럼 미디어, 정치,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학자들을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며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글로벌 지식장의 방관자로 남아 기꺼이 상징폭력의 희생자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행동하는 지식인들 대부분이 유학을 통해 획득한 상징자본을 가지고 자신의 사회참여를 정당화하지만, 정작 그들이 내세운 상징자본은 그들이 실천 혹은 대중과의 소통이란 미명하에 외면해버린 순수한 지식장 안에서만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 그렇다면 이른바 ‘행동하는 지식인’류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일까?
(1) 학문장 안에서 고립되어(secluded) 지식 생산과 지적 논쟁을 열심히 펼치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류는 분명히 학문장 안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
(2) 그러나 우리가 사회 이론이나 그를 통한 경험적 연구결과들이 사회 문제의 해결과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행동하는 지식인’류는 진보와 발전을 위해 사회에 필요하지 않을까? 지식인들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특권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정치 영역이나 정책 결정 영역에서 그들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합리적이어 보인다.
(* 경험적 연구가 줄 수 있는 사회공학적 방법과, 비판이론이 제공하는 사회 체제 변혁의 단초는 매우 다른 것일 수 있다. 나는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저자 김경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담론과 해방Discourses on Liberation을 읽고 싶다.)
(3)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정치적 장이나 사회정책 결정의 영역에서 학문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기능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들은 학문 장 안에서, 일류 생산자가 절대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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