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사회(최태섭) 인용들
오늘날 패배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루저 컬처라 부르는 현상들이 그렇다. 이 루저 컬처의 원산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장기 호황을 누렸던 서구 자본주의다. 히피, 로큰롤, 펑크, 비트족, 반전주의, 뉴에이지, 반권위주의, 아나키즘 등등이 그 이름이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처절하게 패배했다. 그들이 대체 무엇과 어떻게 싸워서 패배했는지는 이제 와서는 불분명하다. (…) 이들의 상당수는 멀쩡한 중산층 청년들이었다. 루저 컬처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그 상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지적이고 섬세한 스타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루저 컬처는 전도된 혹은 삐뚤어진 엘리트주의라는 혐의를 받을 만한 면도 많았다. 그러나 루저들은 자신의 패배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그들의 수동성에는 역설적인 적극성이 있었다. (…) 그리고 오늘, 우리는 여전히 패배하는 중이다. 오늘의 패배자들에게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감수성이 아니라, 일상적인 패배 속에서 무던해지고 무감각해진 감수성이 남아 있다. 어떻게든 먹여주고 살려주던 호황의 시대는 속절없이 끝났고, 루저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의 여유도 늘어가는 빚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의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 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p.20-22)
과거의 희생에는 그들이 뭔가의 거대한 이념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는 가상의 만족감이라도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고달픔은 이 모든 것이 네가 선택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p.59)
오늘날 나의 존재를 구제해줄 거대 서사나 역사적 소명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근거 없는 존재'이고, 세계는 우리에게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막연함은 우리를 ‘잉여’라는, 피할 수 없는 시작 지점으로 인도한다. (p.76)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프롤레타리아는 어떤가? 이 광경은 더욱 놀랍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그 누구보다 프롤레타리아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고,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의 자리에는 아직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패배자인 운동권들과 노동자 문화를 '쿨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힙스터들만이 서성이고 있다. 이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탄압이 아니라 유행이 되는 것이다. (p.107)그런데 일베의 더 중요한 작동의 논리는 '쾌락'이다. (…) 따지고 보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의제는 대체로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빌려온 것들이다. (…) 이들에게는 촛불, 노무현, 김대중, 민주화, 광주항쟁, 좌파, 민주당, 전라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한 존재이 '깨시민'이 모두 하나의 뭉뚱그려진 위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런데도 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광주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게 된 것은 이들에게 광주가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광주를 욕하면 '적'들이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 68혁명이 그랬듯이 금기를 깨는 즐거움은 혁명에서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러나 양손에 불만을 잔뜩 쥐고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곤란함은, 딱히 더 이상 깨뜨릴 만한 창문이 없다는 것이다. (p.223)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생존, 살아남는 것이다. 그냥 살아남는 게 아니라 '잘'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대에서 생존이란 그 자체가 일종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변해버렸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도움과 우정이 아니라 경쟁과 손익계산을 통해 살아남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다. 손해와 피해에 대한 강박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은 황폐하고 나약하다. 시시때때로 '멘탈 붕괴'가 일어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멘탈甲'들에 대한 찬양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가 인터넷에 남기는 독한 말들은 차라리 아무런 고통이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 없는 로봇이 되는 축복을 받지 못한 우리들 대부분은 고통도, 슬픔도, 어김없이 고개를 드는 자기와 타인에 대한 연민도 모조리 겪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은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다. 지탱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순결한 희생자로 사라지는 것보다 추악하지 않은 생존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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