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조중걸)
키치란 용어를 어디선가 여러 번 들어보긴 했지만 어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키치를 처음 들어본 것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였다. 보통 글에서 보이는 키치의 쓰임새는 우스꽝스러운 것, 복고풍, 어설퍼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릭턴스타인의 팝아트를 가리켜 키치스럽다고 많이 하는데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키치라는 개념을 미술적 영역보다는 철학적 영역에서 인용한다. 키치는 비유컨대 '똥이 없는 것으로 처신하'는, 그러니까 대충 위선적인 느낌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키치에는 어떠한 이상이 있고 그에 반대되는 것들은 모두 삭제한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도 그러한 맥락에서 키치다. 이것이 쿤데라의 소설에서 정의된 키치다.
그런데 쿤데라의 책을 읽고 나니 전자의 키치(단순한 미술 영역에서의)와 후자의 키치(철학 영역에서의)가 아무래도 머릿속에서 잘 연결되지가 않는 것이었다. 글쎄, 나는 그냥 미술 용어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심오한 철학적 연원이 있었을 줄이야. 아니면 그냥 원래 단순한 뜻으로 쓰이는 용어인데 쿤데라가 오독한 건가? 인터넷에 찾아봐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진 않아서 관련 서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책이 조중걸의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다. 어려운 서적은 아니고 대중을 위한 개론서다. 이 책은 키치라는 미학적 용어를 정의하고 그 키치라는 프레임으로 예술사를 설명한다.
키치란 무엇인가? 키치(kitsch)는 싸게 하다는 독일어 단어와 덤핑 판매를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가 합해져 만들어진 조어라고 한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키치는 좋은 의미는 아니다. 저자는 간단히 말해 키치를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정의한다. 저자―지식이 짧아서 저자만의 시각인지 미술계 전반의 시각인지는 모르겠지만―는 예술을 고급예술과 통속예술로 나눈다. 고급예술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안에 작가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렬한 고뇌가 녹아있다. 따라서 고급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양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그에 반해 통속예술은 대중들의 위안을 위한 저급 예술이다. 대중들은 통속예술을 그저 소비하면 된다. 고급예술이 요하는 교양 같은 건 필요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급예술을 양으로, 통속예술을 늑대로 볼 수 있는데 키치는 이 둘 사이에서 대중들에게 고급예술의 탈을 써 뭔가 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전하는 한편 속은 싸구려 통속예술이란 게(양의 탈을 쓴 늑대)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통속예술을 '(저급하긴 하지만) 이런 값싼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예술도 필요하지' 하는 태도로, 존재론적으로는 어느정도 긍정한다. 다만 키치에 대해서는 비난 일색이다. 키치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 뒷부분에 가서는 고급예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키치가 어느정도 필요악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키치에 대한 저자의 비난은 때때로 읽는 독자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강도가 높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을 불러 일으킨다. 예컨대 헤어진 옛 애인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이런 이차적 눈물은 감상자를 작품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하게 한다. 작품은 그저 개개인의 추억이나 감상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매개체로만 기능하게 된다. 작품은 그저 고상해 봬는 과시용 이미지로 소비된다. 그래서 키치는 달콤하다. 쉽고, 고상해 보이니까. 하지만 결국 키치는 위선적인 싸구려일 뿐이고, 진정한 예술 감상을 막기 때문에, 저자는 키치가 미학적으로 배격되어야 할 태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키치는 어떤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서양)철학사를 짚는다. 중세 시대, 세계는 요약하여 신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신 중심이었다. 그러자 근대에 있어 이성이 중요해지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신의 존재가 부정되거나 적어도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불가지론)으로 설명되면서 신은 세계를 설명하는 근본 원리의 자리를 과학과 이성에 내주고야 만다. 그런데 그 과학과 이성의 자리도 흔들리고 만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인간의 이성과 과학문명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세계는 신으로 설명되는 것이거나 적어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근대에 들어서며 둘 다 정답은 아니었고 더 문제는 정답이 있는지 자체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을 말하고 그려야 하는가? 예술은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 사실 알 수 없다. 정답은 없다. 정답이 없으니 대중은 우왕좌왕하기 마련인데 여기서 키치가 등장한다. 이 세계에 진리는 없는데 마치 키치는 세계에 확고부동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위안을 주니까(신이 사라지고 과학적 이성도 믿을 수 없어진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실존적으로 불안해 하고 고뇌해야 하는데 말이다. 고상한 예술은 그것을 표현해야 하고). 그래서 키치는 근대로부터 생겨난 개념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키치를 배격하기 위한 여러 예술가들의 분투를 설명한다. 다다이즘, 추상주의... 미술 사조 말고도, 연극 분야에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 문학 분야에서는 보르헤스를 위시한 메타픽션(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 책의 전반부가 키치에 대한 철학적, 예술사적 설명에 가까웠다면 후반부는 키치라는 렌즈로 바라본 현대 예술사에 가깝다.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이라면, 저자의 문체가 상당히 단정적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상당히 엘리트적인 태도는 읽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예컨대, 본문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 이념으로서는 어떠하든 간에 문화와 예술을 위해서는 비극적인 것이었다."는 문장). 키치는 미술계에서도 상당히 논쟁적인 개념일텐데, 키치를 바라보는 다층적인 시각을 소개하고 전달하기보다는 저자 한 명의 단정적인 주장이 책의 주를 이루니 저자의 키치에 대한 시각이 오히려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대상 독자가 대중들이니 키치에 대한 여러 관점을 소개하고 반박해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면 더 좋았겠다는 소리다. 아울러 보통 쓰는 키치의 용법(B급 문화나 팝아트 같은 느낌을 키치스럽다고 평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없어서 아쉬웠다. 이 책에 따르면 그런 식의 키치란 개념어 사용은 올바른 용법은 아니겠지만. 평소 궁금하던 걸 짚어주지는 못했으므로... 그럼에도 책의 서술은 크게 어렵지 않은 평이한 수준이고, 후반부에 다양한 작품과 예술적 시도들을 키치란 프레임으로 들여다보는 내용은 유익했다. 불편할 수는 있지만, 유익하고 알찬 책이다. 다만 예술은 엘리트들을 위한 것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하는 저자의 무의식에 깔린 생각에는, 잘 모르겠다. 기만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태도의 키치를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향 평준화가 되어야겠지만.
"그녀가 5월 1일의 행진을 보았던 것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광신적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다. 행진 대열이 연단에 가까이 가면 가장 우울한 표정의 얼굴조차도 미소로 환해졌는데,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자기들이 즐기고 있다고,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듯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행진 대열이 내건 묵시적 슬로건은 <공산주의 만세!>가 아니라 <인생 만세!>이었다. 공산주의 정치의 힘과 모략은 이 슬로건을 독점하는 데 있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들조차도 공산주의 행렬에 내모는 것은 바로 이 멍청한 동어반복 <인생 만세!>이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을 읽고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키치는 전체주의적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공산주의(적어도 20세기의 현실 공산주의)는 키치였다. 동유럽 국가와 소련에서는 공산주의만이 유일한 세계의 진리로서 인정받았으니까. 그런데 일개 사상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나. 결국 공산주의라는 키치 아래에서 무수한 사람이 스탈린 등에게 탄압받았고 프라하의 봄은 무참히 짓밟혔다. 사비나는 이러한 키치에 염증을 느꼈던 것이고 아마 쿤데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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