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의 사상(박가분)
2013년 겨울쯤에 산 책인데, 사고 나서 절반 쯤 읽다가 바빠서인지 어쩐 이유에선지 그만뒀다. 그래서 2015년에는 읽다가 만 책들 좀 읽자는 계획에, 다시 읽게 되었다.
일베를 남 조롱이나 일삼는 걸 재미로 아는, 사회에서 도태된 히키코모리들 집단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일베에 무슨 사상이 존재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베가 남 조롱 일삼는 행위를 재미로 아는 집단은 맞지만, 일베는 뚜렷한 사상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김치녀', '홍어', '좌빨', '광주폭동' 등으로 대표되는 일베의 혐오 발언들의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일관적인 사상적 체계가 있다. 몇몇 바보 찌질이들이 일시적으로, 재미로 벌이는 분탕질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단순히 사고해서는 일베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일베를 "자율적인 사상에 입각한 존재"로 간주해야 "일베 유저들에게 윤리를 요구"할 수 있다(p.18). 왜 일베라는 존재가 출현하게 되었고, 일베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일베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일베의 사상>은 적절한 진단과 지향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책은 크게 1부(일베와 그들만의 문화), 2부(일베의 사상은 무엇인가), 3부(일베와 한국의 정치)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주로 일베의 탄생과정을 다룬다. 디시인사이드로 거슬러가는 일베의 그 탄생연원부터 시작해서, 짤방이나 논객 문화 같은 인터넷 문화를 다룬다. 이러한 일베의 탄생과정과 일베(그리고 인터넷)의 문화를 짚은 후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베의 특수한, 일베의 '사상'을 다룬다(과거 디시 정사갤이 일베 극우사상의 모태지만, 일베에는 단순 극우사상에서 더 나아간 특수한 멘탈리티와 문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베와 한국의 정치를 다룬다. 한국 정치는 어떻게 일베를 태동시켰는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3부의 골자다.
사실 인터넷 문화에 대해 평론하는 사람들 중에 나이가 많거나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직접 인터넷 공간과 잘 호흡하지는 않기 때문에 고리타분해보이거나 실제와 안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위화감이 들 때가 많다. 그런데 <일베의 사상>은 저자가 루리웹을 해서인지 인터넷 문화와 역사를 정확하고 밀도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런 정확한 인터넷 문화 인식(?)을 바탕으로 고찰한 일베의 문화(2부)는 상당히 통찰력있는 고찰이다. 일베의 미학을 분석하는 장(章)은 짧은 관련 지식 탓에 깊은 문맥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일베를 미시마 유키오와 관련지어 논의를 펴는 등 인상깊은 부분이 많았다.
앞에 장도 많이 유익하지만, 이 책에서 제일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마지막 부 일베와 한국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일베는 국가와 국민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시민사회의 부재로 인한 증상 같은 것이다. 시민사회라는 중간적 매개 없이 자신의 이상을 그대로 국가에 투사하는 촛불집회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이벤트가 있었다. 그것이 08년 광우병 시위로 절정을 맞고, 완벽히 파산했다. 그 폐허 속에서 일베가 자라난 것이다. 저자의 진단에 적극 동의한다. 이러한 일베라는 증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에서 일베를 경멸하거나 국가적 차원에서 일베를 규제하면 안 되고 정치적인 욕망을 정제해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오래된 방법론이지만 어쨌거나 유효한 방법은 이 뿐이다.
'독서 일반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 왜 유럽인가?(잭 골드스톤) (0) | 2016.07.16 |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아즈마 히로키) (0) | 2016.07.14 |
학교를 넘어서(이한) (0) | 2016.06.16 |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0) | 2016.06.16 |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조중걸) (0) | 2015.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