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말에 쓴 글) 

Social Theory 책 다 읽었다. 올해 여름방학에 읽기 시작해서, 겨울방학에 다시 시작해 한 해가 끝나기 전에 다 읽은 셈이다. 

이 책과의 인연은 2017년 초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겨울방학 나는 학교 밖 사회학 세미나 모임에 지원해 공부를 했는데(지금도 하고 있다), 당시 세미나 장을 하셨던 분한테 좋은 이론 서적으로 추천받은 책이었다. 그때는 영어 책을 읽는다는 게 그리 익숙하지 못했던 때라--경험이 별로 없기도 하고 영어 실력에 확신이 없기도 했고--“헉, 영어 책이군...” 좋은 책이라니까 읽어보고는 싶은데, 시간과 능력이 안 될 것 같고.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읽는 것은 미루다가 세미나 모임에서 마침 여름방학 때 읽기로 해서 읽기에 도전한 것이다. 여름방학 때에는 1장 ‘이론이란 무엇인가’에서 7장 ‘민속방법론’까지 읽었다. 나머지 갈등 이론, 하버마스, 루만, 기든스, 부르디외 등등은 남는 시간에 틈틈이 읽었다. 2학기 시작하자 바빠서 읽기를 중단했고, 일주일 쯤 전부터 14장인가,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부터 다시 읽기를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은 배제한 채 책에 대해 간단히 평을 하자면, 
a)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사회 이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회 이론이란 무엇인가. 이는 1장 ‘이론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뤄지고 있다. 저자들이 생각하는 사회 이론은 정치학 이론이나 문화 연구 이론과는 다른 것인데, 좋은 사회 이론은 ‘사회적 행위란 무엇인가?’ ‘사회의 질서와 안정은 어떻게 수립되는가?’ ‘사회의 변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와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가지고, 시간 순으로 그리고 공간 순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 이론에 대한 오딧세이를 펼쳐나가는 것이 이 책의 개요라 하겠다. 
b) 책은 갈등 이론을 다루는 8장까지는, 미국에서 위의 세 가지 질문에 응답하는 사회 이론들이 어떻게 출현했고 다양한 이론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태초에 파슨스가 있었다. 그는 베버와 뒤르켐을 엮어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고자 했다(2장).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나며 사회적 행위이론 자체보다는 규범에 중점을 둔 구조기능주의를 발전시켰고, 후기 파슨스의 이론에서는 행위자는 ‘사라지게’ 된다(3-4장). 파슨스가 공격한 공리주의 패러다임이 문제투성이며 발전하지 못하는 것만은 아니다. 5장에서는 신공리주의가 다뤄진다. 6, 7장은 파슨스 식의 기능주의가 간과한 ‘해석적 접근’들이 다뤄진다. 8장에서는 갈등 이론이 다뤄진다. 
c) 이러한 식으로 설명을 전개하는 것은 미국에서의 사회 이론의 흐름을 아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서사’의 흐름을 엮어내고 그것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것이 이 책의 특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존의 교과서들은 대부분 이론이나 주제에 대해 접근한다기보다는 사상가 자체에 대해서만 접근한 측면이 있어서, 각 이론들이 서로 어떤 문제에 대해 다른 해법과 접근 방식을 보이는지, 어느 측면에서 갈등했는지 같은 중요한 지점들을 알기 어렵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독자의 흥미도 떨어지게 되고, 이론이 다뤄야 할 포인트는 무엇이고 각 이론은 어떤 점에서 성공하고 실패했는지를 독자는 잊어버리게 된다. 학생들이 이론을 배우는 이유가 과거의 유산들로부터 ‘더 좋은’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함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의 구성은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d) 그렇지만 뒷부분의 구조주의나 반구조주의, 페미니스트 이론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책 앞 파트만큼은 못하는 아쉬운 응집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몇몇 사상가들은 너무 짧게 다뤄지고 몇몇 부분은 저자(Joas) 본인의 네오프래그머티즘 이론의 성취를 강조하고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쉬운 점. 구체적인 비판은 나중에 쓰기로... 

그리고 책에 대해 오로지 개인적인 소회만 쓰자면,
a) 영어에 대해 그렇게 겁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의 한계 역시 절감했지만... 아이러닉한 태도인데. 이것은 첫번째로 어떻게 어떻게 읽다보면은 영어 실력이 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텍스트에 비해 영어 텍스트는 읽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으며 가끔 해석의 문제나 외국어의 낯설음 따위로 잘못 받아들이거나 누락하는 정보가 어쩔 수 없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b) 그리고 학교 다니면서 다른 영어 논문이나 글들을 읽어보니까 이 책은 그래도 쉬운 영어로 쓰어져 있구나... 하는 것도 알았다. 맞다... 정말 쉽다. 
c) 앞으로 공부를 할 때 길라잡이가 되는 책이므로 틈틈이 다시 읽고 정리해보고자 한다. 

주전장 (2018) 리뷰

2019. 7. 26. 21:05

# <주전장>에서 영화적으로(다큐멘터리적으로?) 불쾌했던 지점은 미국, 일본, 한국의 거리 시민들을 무작정 인터뷰하던 장면이었다. 감독은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겉보기에 설득력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인들을 섭외해 잠시 인터뷰를 하고 장면을 삽입한 것 같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실상 알지 못하고 숙고한 적이 없는 시민들이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위안부’ 증인들의 의견이 때때로 충돌함을 지적한다”는 단편적 사실만을 접하고 반응해 낸 단견(短見)을 부러 영화에 여러 차례 실을 필요가 있었나 싶다. 다큐멘터리가 앙케이트를 할 필요가 있을까? (덧붙여, 거리에서 ‘무관한’ 시민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다큐멘터리가 질 낮은 유튜브 기획 영상 느낌이 나게 하는 데에 일조한 것 같다.) 

 

# 수정주의자들이 부각시키고자 하는 쟁점 중 하나는 ‘20만’이라는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 수치가 정확한지 여부이다. 미키 데자키 감독은 영화의 초중반부에서 피해자 수치에 대한 활동가 진영과 수정주의자 진영들의 입장을 청취한 후, ‘두 측 모두 수치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는 내레이션과 텍스트 문장을 삽입해 나름대로 자신의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갸우뚱했는데 왜냐하면 정대협 활동가들, 그리고 일본의 평화 운동가들이 ‘20만’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선동적으로 활용한 적이 적어도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20만’이라는 수치는 언론이 센세이션을 부추기거나 운동에 깊게 참여하지는 않는 지지자들이 (소녀상 건립을 지지하는 몇 미국 정치인)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하기 위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과연 숫자를 과대포장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숫자에 집착하는 언론과 수에 먼저 반응하고자 하는(“나치가 수백 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대!”) 우리 일반 시민들의 숙고하지 않는 척수반사적 반응은 문제가 없을까? 피해자 수에 대한 논쟁은 일본군 성노예 사건 이외에도 나치 독일 과거사 문제에서도 수정주의자들이 자주 공격하려는 쟁점으로 알고 있다. 추산을 직접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이 상대편을 감정에 휘둘리는 진영으로 호도하고 자신을 객관적인 판관의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과연 (그런 게 있다면) 숫자를 정치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활동가 진영이 문제인지. 이런 문제에 대한 사유가 너무 얕다는 것이 언짢게 다가왔다. (특히, 영화가 끝날 쯤 ‘나는 미국인이지만’으로 시작하는 몇몇 내레이션을 들을 때는 짜증이 좀 치밀었다.) 

언론이든 인터넷 상 반응이든 영화에 대한 많은 평은 이 영화가 민족적 프레임을 취하는 대신 인권이라는 보편적 의제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을 상찬한다. 사람들이 이런 평가를 어떻게 내리게 되었는지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흔히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적 프레임을 벗어야 한다는 비판은, 일본 제국이 조선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유린한 데에 더불어 가련한 조선 여성을 착취했으니 한국인(남성)으로써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는 그런 가부장적이고 정념적인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애초에 영화에 등장하는 정대협 활동가 및 할머니 당사자, 일본의 연구자 및 활동가들은 민족적 프레임을 참조한 적이 없다(즉, 이 문제를 피식민지 조선 대 종주국 일본의 대결 구도로 전혀 보지 않는다). 영화 내용 자체도 중후반부까지는 수정주의자들이 쟁점으로 물고 넘어지는 것들을 찬찬히 체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가부장주의적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을 영화가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조금 어려운 것 같다. 그런 평들이 왜 나오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위안부’에 대해 깊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이지만, 오히려 영화의 후반부가 성노예 문제에 대해 비단 인권만이 아닌 ‘네이션’의 측면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을 던져준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수정주의자들과 일본 우익들의 기존 역사 서술에 대한 공격은, 그들이 인권을 개무시하는 악인들이어서라기보다는 순수하고 무고한 일본인이라는 네이션을 다시 상상하기 위한 기획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나 미일안보조약,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협정 타결에서 미국의 역할 등등은 동아시아의 반공주의와 일본의 내셔널리즘, 미국의 의도를 참조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영화 후반부가 비록 빈약하고 부족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국제정세에 있어 오히려 네이션이라는 문제를 참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환기시켰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했던 한 일본계 미국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 논리 탐구 정도의 다큐멘터리다. 수정주의자들의 민낯을 공론장에서 폭로하는 것 자체는 의의가 있지만... 감독 자체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언론에서 자주 이야기를 실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영상의 측면에서나 내용의 측면에서나 훌륭하고 대단한 다큐멘터리라는 평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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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과 정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짧은 글은, 1996년 3월 부르디외가 콜레주 드 프랑스 대중 강연의 일환으로 진행했고 역시 TV에 방영된 “텔레비전에 대하여On Television”라는 강연의 프롤로그 격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강연은 역시 『텔레비전에 대하여On Television』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저널리즘과 정치”라는 글은 영역본에는 존재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에는(『텔레비전에 대하여』, 현택수 옮김, 동문선, 1998)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은 비록 분량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 장의 작동 구조에 대한 생생하고도 신랄한 묘사를 통해 이후 강연에서 더 깊이 있게 전개될 미디어 비판을 응축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텍스트를 저본으로 해 영문으로부터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Pierre Bourdieu. 1998. “Journalism and Politics.” in On Television, trans. P. Ferguson. New York: The New Press. pp.1-9.


곧 차례로 다른 모든 문화 생산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저널리스트들이 처해 있는 숨겨진 제약들을 밝힌다는 것이 곧 책임 있는 자들을 비난하거나 죄인들을 손가락질하려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각주:1] 대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당사자들이 의식적 노력을 통해 억압의 메커니즘의 손아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려는 것이자, 또한 어쩌면 예술가들과 작가들, 학자들, 그리고 저널리스트들, 즉 정보 전파의 수단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이들에게 공동 행동의 프로그램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공통된 노력을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연구가 이룩한 가장 보편적인 성취물을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가능해질 것이고, 또한 실천적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으로의 접근 조건들을 보편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가장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들이 이 책[『텔레비전에 대하여On Television』]의 분석을 두고 격노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각주:2] 물론 이것은 책임을 부인하려는 시도이지만, (적어도 글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람들이나, 동업자들이나 비슷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 사람들을 제외하면) 본인들이 저격을 당했다고 느낄 리는 없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의 고결한 분노는 “전사(轉寫) 효과(transcription effect)”, 즉 옮겨 씀으로 인해 톤, 제스처, 얼굴 표정 같은 비언어적 표현들이 삭제되는 효과에 기인하는 것일 테다. 공평한 독자라면, 무엇이 서로의 이해를 위한 건설적 토론과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들이 읽어낸 비난들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분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들이 왜 분노했는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저널리스트적인 시각에 전형적인 몇몇 특징들(몇 년 전 나온 책 『세계의 비참La Misère du monde[각주:3]』을 쓰는 강한 동기가 된 바로 그 특성)일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보통 “폭로”라고 부르는 것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경향이다. 그것은 사회 세계의 가장 뻔한 요소들만을 강조하고, 개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특히 무엇을 잘못하는지에만 집중하고, 성급하게 비난하거나 고발하려는 자세이다. 이 모든 경향들은, 개인의 행위와 사고에 영향을 끼치는 보이지 않는 구조와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우리를 분노에 찬 비난이 아닌 공감적 몰입(sympathetic indulgence)로 이끄는 이해—를 가로막는다. 다른 한편, 저널리스트적 시각에는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된 방법보다는 분석가의 (추정된) “결론”에 초점을 맞추는 성향이 있다. 내가 10년 간 행한 연구의 결과이자 요약인 『국가 귀족: 권력 장의 엘리트 학교들The State Nobility: Elite Schools in the Field of Power』의 출판 이후, 나는 한 저널리스트가 나에게 그랑제콜(Grandes Écoles)에 대한 토론회를 제안한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거기서 그랑제콜 졸업생 연합의 회장은 그랑제콜에 찬성하는 입장이고 나는 반대하는 입장일 터였다.[각주:4] 그 기자는 내가 왜 거절을 했는지 이유조차 모를 것이다.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내 책을 훑은 저널리즘계의 “큰손”들은 그냥 간단하게 내 방법론(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장으로서의 저널리즘 분석)을 괄호 쳐 버렸다.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도 못한 새에, 그들은 내 책을 성급한 독설과 분노로 점철된 낡아빠진 정치적 견해들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하지만 그 방법론이야말로 정확히 내가 여기서 다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오해가 또 생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저널리스트 장이 어떻게 정치 장에 대한 특수한 시각—장 속에서 그리고 장에 의해 생산된 저널리스트들의 특수한 이해관심과 저널리스트 장의 구조에 기반을 둔 시각—을 생산하고 사람들에게 부과하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자칫 지루해지면 안 된다는 공포와 어떤 수를 써서라든 즐겨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정치는 매력이 없는 것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황금 시간대로부터 가능한 한 배제되어 있어야 할 것이 된다. 그러므로 정치가 만약 미디어에서 다루어져야만 하는 한에서는, 이 그다지 재밌지도 않고 사실 우울감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광경은 흥미로운 것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이런 필요는 왜 유럽과 미국에서 진지한 논평가와 탐사 보도를 하는 리포터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토크 쇼 호스트들이 꿰차는 경향이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것으로 역시 왜 진짜배기 정보, 분석, 심층 인터뷰, 전문가들의 논의, 그리고 진지한 다큐멘터리들이 순전한 엔터테인먼트에 밀려나는지, 특히 어째서 서로 교체되어도 분간을 못 할 것 같지만 “출연이 공인”되었다는 출연자들끼리 지껄이는 멍청한 토크 쇼 잡담에 밀려나는지 설명이 된다. (뒤에서 나는 예로 들기 위해 그들 중 몇몇의 이름을 언급하는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 것 같다.) 이 무대 위의 “대화들”에서 무엇이 말해지는지, 그 중에서도 특별히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인들이 “패널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선발되는지의 과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 패널리스트들은 언제나 토크 쇼에 즉시 출연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고—이는 그들이 단순히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게임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그들은 질문이 얼마나 멍청하거나 엉뚱한지에 상관 없이 저널리스트들이 묻는 모든 것들에 답하곤 한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는 곧 현안들에 간여할 수 있거나 아니면 “미디어”에서의 유명세가 줄 수 있는 직간접적 혜택—미디어 세계에서의 명성, 강연을 돌면서 받을 수 있는 목돈 등등—을 받을 수 있는 한, 그들은 (논의 중인 주제나, 다른 참여자들이나, 기타 등등에 대해) 어떤 양보든 타협이든 거래든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덧붙여, 특히 미국과 유럽의 방송 프로듀서들이 행하는 선발 면접에서, 방송 출연 후보 패널리스트들은 그네들의 입장을 복잡하지 않게 명료하게 확 와닿는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그들은 복잡한 지적인 숙고가 가져다 줄 수 있는 난처함을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금언이 있지 않은가.)

저널리스트들은 대중들이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돋움으로써 정보를 전달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방송의 민주적인 목표와는 아주 상반되는) 이런 선동적인 단순화를 정당화한다. 그렇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성향과 시각을 대중들에게 투사(投射)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지루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논쟁보다 충돌을 선호하고, 엄밀한 논증보다는 비난을 선호하고, 그리고 서로의 갈등을 촉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주장들에 맞서는 것이 아닌 그 사람들 자체(특히 정치인들)에 맞서는 것을 선호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논쟁에서 무엇이 실제로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는지, 즉 예산 삭감이 문제인지 세금이 문제인지 보호 무역이 문제인지 등을 캐묻지 않는다. 저널리스트 본인들이 기자로서 능력이 있다는 전문성의 근거가 그들의 관찰이나 탐사의 객관성에 기반한 것이 아닌, 내부 정보(심지어 루머나 질 나쁜 가십들)에 대한 접근과 같은 정치 영역 내부자들과의 깊은 교류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은 자기들의 앞마당에 들러 붙어 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실제로 사건의 핵심 대신 게임과 플레이어 자체에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들의 관심사이자 전문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의 내용보다는 정치의 전략에만 관심이 있으며, 정치 연설과 정치 장(political field)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치인들의 책략(연합, 동맹, 혹은 개인들끼리의 갈등 등)의 의미보다는 그것들이 만드는 정치적 효과에만 집중한다. (저널리스트들이 이슈를 만들어 내지 않을 때에도, 이런 것들이 있다. 예컨대 1997년 프랑스의 선거에서 있었던 질문, 좌파와 우파의 경쟁이 사회당의 당수인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과 보수파 총리인 알랭 쥐페(Alain Juppé) 사이에서 일어날지 혹은 네 명의 정치인, 좌파 편에서는 조스팽과 그의 공산당원인 동맹 로베르 휴(Robert Hue) 그리고 우파 편에서는 쥐페와 중도파 동맹 프랑수아 레오타르(François Léotard)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날지 질문이 있었다. 겉보기에 중립적인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질문의 강조점은 좌파 측에서 있을 지도 모르는 분열에 초점을 주어 보수파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저널리스트들은 정치 세계에서 모호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들은 굉장히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지만 정치 세계 내에서 훈련받은 구성원들은 아니다. 이런 위치 덕분에 저널리스트들은 (현재 인맥과 연줄이 저널리스트들과 그들이 낸 책에 호의적인 리뷰를 보증하는 출판계를 제외한다면) 보통은 그들이 스스로는 얻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지원(symbolic support)을 정치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저널리스트들이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모두를 모함하고 “중상모략 말고는 하는 말이 없는(argues nothing but scandal)” 추하고 비겁한 “수다쟁이(thrower of words)” 테르시테스처럼 세상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5] 대체적으로 저널리스트들은 속류 회의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가장 정직한 신념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추구치 않는(disinterested) 정치적 입장마저도 정치 장 내부에서의 특정한 위치와 관련이 있는 이해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이 모든 요소들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주장이나 인터뷰 질문지에서도 나타나듯이 저널리스트들은 정치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정치란 신념은 없지만 정치판의 경쟁 구도와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명료히 간파하고 있는 야망에 가득 찬 사람들로 들어차 있는 결투장(arena)과 같은 것이다. (그런 식의 노골적으로 계산적인—꼭 냉소적일 필요는 없지만—정치 마케팅으로 정치인들을 돕는 정치 컨설턴트와 조언가들에 의해 저널리스트들은 이런 태도를 갖도록 요구받는다. 이제 점점 더 정치적 성공은 저널리스트 장의 요구에 얼마나 순응하느냐에 달려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저널리스트 장 역시 정치인들을 “띄우고” 그들의 이름값을 높이는 일을 책임지는 “코커스(caucus)”가 되었다.) 이렇게 정치의 “소우주(microcosm)” 및 그에 따른 사건들이나 결과들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저널리즘은 대중들과 단절되기 마련이다. 적어도 사람들의 삶과 사회 전반에 대해 내리는 정치인들의 입장들로 인해 가장 심대한 영향을 받는 대중들과는 괴리가 생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절은, 특히 유명한 TV 스타들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그들의 높은 경제적·사회적 지위로 인한 사회적 거리 때문에 더욱 배가되고 살며시 강화된다. 1960년대 이래로 미국과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미디어 스타들이 이미 높은 연봉을 받고 있지만서도(유럽에서는 보통 십만 달러나 그 이상, 그리고 미국에서는 수백만 달러를 받는다[각주:6]), 거기에 더해 그들이 토크 쇼에 출연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정기적으로 신문에 기고를 하거나, 다양한 “거래들”(특히 연례 컨벤션이나 전문가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터무니 없이 과도하다 싶은 사례금을 챙긴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 되었다. 저널리스트 장으로 분배되는 권력과 특권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음은 이 때문이다. 몇몇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의 상징 자본을 보전하고 늘려야만 하는 삼류 자본주의 기업가처럼 행동하는데, 왜냐하면 미디어에 자주 나와야 강연장에서 더 높은 페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불안정한 직업 상황 때문에 자기검열에 빠지게 된 준프롤레타리아(subproletariat) 저널리스트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각주:7]

이 책에서 더 논의되겠지만 저널리스트 장 내부의 경쟁으로부터 비롯한 여러 요소들도 언급이 되어야겠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특종”에 대한 집착이나, 혹은 얻기 힘들거나 가장 최신인 정보에 대한 무비판적인 선호. 혹은 가장 교묘하고 기묘한 해석(보통은 가장 냉소적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비롯된 과장하려는 버릇. 아니면, 현재 진행 중인 사건들을 집단적으로 망각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예측하기 게임(the predictions game). 그런 예측들이나 시대 진단은 (스포츠 게임에 베팅하는 것처럼) 그저 내리기 쉬울 뿐만이 아니라 틀려도 전혀 비난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세상 사건들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저널리스트들의 보도들이 쉽게 잊혀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의 예측은 안전하게 보호받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단 망각은 왜 1989년의 몇 달 동안 전 세계 저널리스트들이 멋지게 수립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들을 칭송했다가 그 다음에는 유럽에서 일어난 끔찍한 민족 학살을 비난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앞에서 묘사한 메커니즘들은 서로 합해져 탈정치화라는, 아니면 더 정확하게 말해 정치의 탈주술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정치가 중요한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지루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질 때, 엔터테인먼트만을 좇는 프로그램은 스펙터클한 광경이나 스캔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만을 끌고자 하기 때문에 시사 현안에 대해서는 침묵만이 감돈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시사 현안”들은 흥미를 끄는 사건에 대한 열띤 설명으로 축소되는데, 보통 이것은 인간 극장(human interest story)이나 버라이어티 쇼 사이 어딘가의 무엇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O.J. 심슨의 재판이 있다.) 결국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그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한데 모이는 시작도 결말도 없는 사건들의 장광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산 삭감 안건 바로 다음에 터키에서 일어난 지진이 보도될 수 있고, 살인 사건 재판과 함께 챔피언십을 딴 스포츠 팀이 보도될 수 있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대에 텔레비전에서 보도되는 것은 그저 선행 원인과 결과라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사건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실상 부조리극의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저널리즘은 미묘한 세상의 변화나, 혹은 대륙의 이동처럼 당시에는 지각될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영향을 끼치는 과정들에 대해 명백히 무관심하다. 그런 미묘한 변화에 대한 무관심함은, 저널리스트들의 그날그날만 수습하는 사고방식(day-to-day thinking)과 가장 최신 속보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속보 경쟁으로 인한 구조적인 망각을 반복하고 강화시킨다. 일상 생활의 날품팔이 노동자인 저널리스트들은 세계를 서로 관련 없는 스냅사진들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부족, 특히 관심과 정보의 부족을 고려할 때(연구 및 참고 자료들은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을 읽는 형식으로만 소개된다), 저널리스트들은 사건들을 (학교 폭력이 증가했다고 해 보자)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전달하는 데에 필요한 일들을 수행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사건들을 그것들이 속해 있는 유관한 관계들의 네트워크 속으로 (학교 폭력은 가족 구조와 연관이 되어 있는데, 가족 구조는 또 노동 시장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노동 시장은 역시 정부 고용 정책의 영향을 받는다, 등등) 재삽입할 수 없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저널리스트들은 정치인들의 영향, 특히 정부 관료들(이들은 다시 정치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의 영향을 받아 지금 그네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정치인들과 관료는 그들이 내리는 의사결정의 단기적 영향을 강조하고 싶어 하고, 또 그걸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극적인 “한 방”은, 시간이 지나야만 그 효과가 눈에 보이는 행위들을 경시하는 환경을 만든다. 

이러한 시각은 탈역사화된 것인 동시에 탈역사화하는 것이며, 파편화되는 것인 동시에 파편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전형적인 표현 양태는 TV 뉴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는 국가들이 차례대로 행진을 이룬다. 그 부조리들은 종국에 가서는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도 없게 될 것이며,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맥락 설명도 없이 나타났듯이 해결책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오늘은 자이르 공화국(Zaire), 어제는 보스니아, 내일은 콩고인 식으로. 어떠한 정치적 행위의 필요성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이런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은 끽해봤자 막연한 휴머니즘적 관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어떤 역사적 시각도 뒷받침되지 않은 채 그저 도매금으로 나열되는 서로 연관이 없는 이 비극들은, 역시 뉴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토네이도, 산불, 홍수 사건과 같은 자연재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다루기 쉬운 간단한 사건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제 거의 저널리즘적 의례가, 아니 확실히 저널리즘적 전통이 된 것처럼 보인다. 뉴스에서 다뤄지는 희생자들은 기차 탈선 사고나 다른 사고에 나오는 희생자들만큼이나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시청자들은 진정한 정치적 연대와 저항을 불러일으킬 요소들로부터 차단되게 된다.

정리를 해 보자. 특히 저널리즘 장에서 일어나는 경쟁의 특별한 형태의 결과로서, 또한 저널리즘 장이 부과하는 일상적 행위와 사고 방식들로 인해, 저널리즘 장은 역사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고 불가해한 자연재해의 연속들이라는 관점으로 세계를 재현한다. 저널리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계는 민족 분쟁과 인종 차별, 폭력, 범죄로 얼룩진 공간이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계는 혼란스럽고 이해가 불가능한 위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로부터 한 발을 빼고 있어야 한다. 시사 논평가들이 (특히 아프리카나 슬럼가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보통 그렇듯이) 자민족 중심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경멸을 쏟아낼 때, 저널리즘이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은, 범죄와 폭력이 어디에나 만연하다다는 오해가 안전에 대한 강박과 공포를 강화하는 것처럼, 제노포비아적 공포를 강화할 뿐 사람들을 동원하고 정치화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세계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해 바깥에 놓여있는 세계이다. 정치가 마치 운동 선수와 관중들로 양분된 스포츠인 것처럼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관념은 이와 연관되어 있다. 특히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인(apolitical) 태도를 띠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널리즘적 세계관은 명백히 현상 유지에만 기여하는 운명론적이고 무관심적인 태도를 더욱 촉진시킨다. 어떤 “포스트모던 문화 비판”은, 사고방식이나 노동 조건 그리고 지향점—무언가 “팔릴 만한” “엄청난 것(extra something)”을 보여줘서 최대한 많은 시청자를 끌겠다는 목표—이 점점 광고 업자들이나 다름 없어지는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냉소주의에 대해,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적극적인 냉소주의(cynicism)를 통해 대항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채널 서핑이 그 예시가 된다고 한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하려면, 그들은 평범한 개인들의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한된) “저항”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문화 비판의 장기인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너가 알고 있음을 나는 안다(I know that you know that I know)”는 식의 비판은 모두에게 가능한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프로듀서들과 광고 업자들이 냉소적으로 만들어 낸 미디어의 메시지에 대해 “아이러니하고 메타-텍스트적인(ironic and metatextual)” 독해를 세련되게 전개하는 것 역시 모두에게 가능한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가장 변태적인 아카데미적 현학성의 포퓰리스트적 버전에 그저 투항해온 것에 다름없다. 

  1. (녹음된 인터뷰나 인쇄물들이 그대로 출판될 때 자주 나타나는) 손가락질이나 희화화를 피하기 위해 나는, 아마도 그대로 있었다면 내 주장의 힘을 그대로 실어주고 독자들에게 평범한 분석들이 놓치기 쉬운 몇몇 예시들을 환기시킬 수 있었던 몇몇 문서들을 누락시켜야만 했다—원주. [본문으로]
  2. 『텔레비전에 대하여』는 몇 달 동안 광범위한 논란을 낳았고 일간지와 주간지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에 이르기까지 매우 유명한 저널리스트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이 책은 베스트 셀러였다—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3. Pierre Bourdieu et al., La Misère du monde (Paris: Seuil, 1993), trans. P. Ferguson et al. (Cambridge: Polity Press, forthcoming) [영역본은 The Weight of the World라는 제목 아래 1999년 Polity 출판사에서 간행. 한국어 역본은 『세계의 비참』, 김주경 옮김, 동문선]. 이 책은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이루는 개인들에 대한 70여 건의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고, 이 인터뷰들은 인터뷰어가 의도한 이론적, 역사적, 정치적, 개인적 맥락 속에서 배치되었다. 이 작업은 부르디외와 그의 연구진들이 행한 다면적인 민족지적(ethnographic), 사회학적 연구임에도, 동시에 이 작업은 경이로울 정도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매우 우울할지는 몰라도) 삶의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의 비참』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4.  The State Nobility: Elite Schools in the Field of Power, trans. L. Clough (Cambridge: Polity Press, 1996). 그랑제콜은 국가에 의해 지원되는 대학은 아닌 명문 학교이다. 그랑제콜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데, 공학을 가르치는 그랑제콜은 에콜 폴리테크니크(the Ecole Polytechnique),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곳은 에콜 노르말 쉬페리에르(고등사범학교; the Ecole Normale Superieure), 행정학은 국립행정학교(the 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그리고 경영학은 파리 경영대학 (Hautes Etudes Commerciales). 바칼로레아 시험을 거쳐 학생들을 받는 일반 대학과 다르게 그랑제콜은 매우 어려운 입학 시험을 거쳐 학생들을 선발한다—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5. Iliad, trans. R. Lattimo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2:212-256.—영역본 역주. [본문으로]
  6. 다음을 보라. James Fallows, Breaking the News: How The Media Undermine American Democracy (New York: Vintage, 1997)—원주. [본문으로]
  7. 다음을 보라. Patrick Champagne, “Le Journalisme entre précarité et concurrence,” Liber 29 (Dec. 1996)—원주. [본문으로]

2018년 여름에 쓴 글. 

 

레이먼드 카버,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So much water so close to home)」.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수록)


미국 교외 중하류층 가정의 불화와 긴장은 카버의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알코올 중독 문제, 불륜(색욕), 삶 자체의 불확실성, 누군가의 죽음 등. 이것이 「너무나 많은 물」에서도 변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한 마을에서 강간 살해 사건이 일어난 후 남편(스튜어트)과 화자인 아내(클레어)에 흐르는 긴장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카버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 역시 익숙해할 것이고, 카버가 이 소설로 처음일지라도 다른 소설에 충분히 익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카버의 여타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너무나 많은 물」의 어떤 독특한 특성이다. 무엇이 이 소설을 다른 소설에서 주로 다뤄지는 중산층의 불안이나 가정의 위기와 같은 조금은 익숙한 테마로부터 구분지어 주고 있는가. 당연해서 지적하기 머쓱한 것이 있지만 명확히 말하자면 젠더라는 제3항의 개입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많은 가족에 대한 소설들은 나(가정)와 타자(외부 세계) 사이의 이질성이라든지 소통 불가능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녀가 사고로 죽게 되거나 가장이 실직하는 것처럼 외부 세계의 사건이 단단한 핵가족에 침입할 수 있다. 혹은 나(남편)이 타자(아내)의 불륜을 눈치채는 등 가족은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수도 있다. 「너무나 많은 물」에서 그런 두 요소의 대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화자인 아내가 겪는 불안은 그녀의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밀접히 연결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젠더라는 요소의 개입으로 인해 소설은 기타 비슷한 단편들과 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울림의 진폭을 가지며, 매우 짧은 분량의 한계라는 새장에서 벗어나게끔 해주는 상상력의 날개를 획득하게 된다. 


남편이 역시 “가정적인” 친구들과 내치즈 강으로 휴가를 떠난 날, 공교롭게도 옷이 벗겨진 여자 아이의 시체가 강에 떠내려 온다. 그녀는 강간 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되며, 남편과 친구들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을까? 있는 것 같은데 남편은 사건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함구하므로 알지 못한다. 남자들 중 누군가는 후에 여자 아이를 꺼내 손을 묶어 나무에 걸었다고 한다.(이 정보는 소설 시작 부분에서 부부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묘사된 이후 125쪽에서부터 과거 시제를 취해 제시되는데, 이는 화자가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관련 뉴스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주관성이 반영되어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남편의 친구 고든 존슨이 “물이 끔찍할 정도로 차갑기 때문”에 “송어가 딱딱”하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127쪽). 


소설은 현재와 회상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강가의 사건이 있고 난 후 이튿날 밤(127쪽 아래), 화자는 남편이 부엌에서 소리를 낸 것 때문에 깨게 된다. 남편은 “무거운 팔을 내게 두르며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문질렀”고, 이후는 부부 사이 성관계가 있을 법하지만 관계가 일어나진 않은 것 같다. 당시 클레어는 내치즈 강의 사건을 알지는 못했지만 어떤 성적 긴장을 느끼고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소설의 말미까지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스튜어트를 비롯한 남성들이 클레어에게 가하는 성적인 암시나 접촉은 이후 클레어의 의식에서 상당히 강조된다. 소설은 시종일관 건조하고 사실 위주의 기술을 지향하는 문체를 고수하고 있는데, 화자의 의식 속에서 도드라지고 기술(記述)을 넘어선 판단이 개입하는 것들은 모두 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리고 성적인 행위와 상징들은 차가운 강물과 남성들의 낚시와 소녀의 이미지와 교차되며 화자로 하여금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흐른다”(129쪽)는 것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물은 익사한 소녀와 클레어, 그리고 클레어가 어린 시절에 알게 된 여성 살해 사건(129쪽)을 이어 주는 매개체가 된다. 익사한 소녀와 클레어가 어렸을 때 살해된 소녀(허블리)는 모두 강에 버려졌다. 클레어 역시 자신을 그들과 같은 여성의 일원으로 상상한다. “나는 개울을 바라본다. 나는 바로 그 개울 속에서 눈을 뜨고, 얼굴을 밑으로 한 채 바닥의 이끼를 보며 죽어 있다”(129-130쪽). 이러한 상상의 근거와 원천은 클레어가 여성이라는 데에 있다. 


클레어가 느낀 여성으로서의 공감은 그녀로 하여금 소극적 저항의 몸짓을 취하게끔 유도하고, 따라서 소설 속 클레어의 모든 진술들은 몇 겹의 상징을 덮어 쓰게 된다. 클레어는 신문을 읽으며 여자의 사체에 가해진 행위를 곰곰이 생각한다. “하지만 몇 가지 조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 속에 뭔가를 넣고, 베고, 무게를 달고, 측정을 하고, 다시 뭔가를 붙인 후 꿰맸다”(131쪽).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행위의 상징과 성격이다. 시체의 조사에 대해 서술하는 보도 기사는 여성에 대해 가해진 폭력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며, 조사 행위 자체도 강간의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다. 잠시 소설의 첫머리로 돌아가 보자. “남편은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먹는다”(123쪽). 낚시를 하던 강가에서 여자 아이가 죽었음에도 남편의 식욕은 왕성하다. 


남성들에 대한 클레어의 잠재의식은 133쪽 아래를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클레어는 보통 잘 단언하지 않는다. 한데, “그는 내 가슴과 다리를 바라본다. 그가 그렇게 했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134쪽). 다음과 같은 말은 마치 클레어가 남편을 살인자와 같은 자리에 놓는 듯하다. “그들에게도 친구들이 있겠죠. 살인자들 말예요. 그렇지 않다고 할 순 없겠죠”(136쪽). 물론, 그녀 역시 남편은 형법상으로 죄가 없음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은 법이 처벌할 수 없는 행위의 공백에 대해 책임지고 속죄하라는 것이 아닐까? “‘알잖아요.’ ‘내가 뭘 알지, 클레어? 내가 뭘 알아야 하는지 말해봐.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겠어’”(124쪽). 


클레어는 “그는 알고 있다”(130쪽)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태는 변하지 않고, 애도는 여자들의 몫이다(135-6쪽). 죽은 사람을 애도한 후 일상적 삶으로 복귀하기 위한 문턱이 되는 의례가 장례식이겠지만, 식이 끝난 후에도 클레어의 불안은 아직 다 여과되지 못한 불순물이 응고되어 가라앉은 듯 가시지 않는다. 화자는 “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는데, 남편은 성관계를 요구한다. 이렇게 소설은 미묘한 파국을 맞는다. 클레어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예상된 귀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그녀가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암시와 모호함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던 클레어의 수동성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상당한 처연한 풍경을 만들어 내며 독자들의 마음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킨다. 동시에 내치즈 강의 소녀-클레어-허블리의 연대의 끈은 소설을 사회적 장(場)의 문맥에 위치시킨다. 

 

 

추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레이먼드 카버의 한국 수용에 대해 

레이먼드 카버가 한국에 수용되는 데의 일등 공신을 뽑으라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러 지면에서 카버의 광팬(?)임을 공공연히 자처해 왔고, 또한 그는 일본어판 레이먼드 카버 전집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무라카미에 따르면 카버는 문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비록 만난 적은 카버의 미국 자택에서 딱 하루 뿐이라고 한다. 웹서핑을 잘 하면 카버가 무라카미를 만나고 나서 쓴 시를 읽어 볼 수도 있는데(신형철이 번역했다), 어쨌든, 그가 아니었다면 카버의 거의 전 작품이 한국에서 번역될 일은 요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카버와 무라카미의 첫 만남은 무엇일까? 그는 『잡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우연히 어느 선집에 수록된 [카버의] 그 작품[「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1975)]을 읽고 ‘이건 대단한 소설이다’라고 감동하고는 조바심을 내며 단숨에 번역해버렸다”(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이영미 옮김, 비채, 2011). 그런데,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은 무슨 소설일까? 한국어로 번역된 카버의 모든 작품에도 그러한 제목의 소설은 없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아마 하루키가 카버의 소설을 번역할 때 제목을 어느 정도 손봤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것이,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So much water so close to home)를 하루키가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足もとに流れる深い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구글에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으로 검색할 때 알 수 있다. 본 소설은 동일한 제목으로 집사재라는 출판사에서 『숏컷』이라는 소설집 제목 하에 수록되어 있다.[각주:1] 여기서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숏컷』의 번역자는 카버의 영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닌 하루키의 일본어역을 중역한 것이라는 점이고, 사정이 이러하니 하루키가 카버의 소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 소설집의 제목 ‘숏컷Short Cuts’은 미국의 영화 감독 로버트 알트만이 카버의 여러 단편 소설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의 제목으로부터 따온 듯하다. [본문으로]

이른 봄 (1956)

2019. 7. 22. 08:25

7월 17일 한국영상자료원 관람. 

 

이른 봄 (早春). 두 번째 보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 

오즈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생과 계절의 순환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는 것 같다. 중요한가?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그런데 「이른 봄」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공간적 분절이다. 도시와 시골. 도시를 움직이는 이들은 샐러리맨인데, 영화에는 샐러리맨의 비애에 대한 대사들이 자주 나온다. 주인공인 스기야마의 친구이자 회사 동기였던 이는 병을 앓고 있는데, 그는 도쿄 역 인근 회사에 대한 막연했던 동경을 자주 이야기한다. 스기야마의 회사가 위치한 빌딩의 쇼트가 자주 등장한다. 장식이 거의 배제된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을 찍은 쇼트는 때때로 섬짓하다. 스기야마가 전근가기 전 친구는 죽는다.

주인공 스기야마는 불륜에 대해 참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스기야마는 영화에서 제일 수동적인 인물이다. 불륜을 하는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전근을 순순히 수락하는 것은 샐러리맨의 운명을 그가 받아들임과 동시에 도피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내가 뒤늦게 오카야마에 도착한 이후 그가 사과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갈등은 임시방편으로나마 봉합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미래는 밝을까?

그들은 오카야마의 방에서 시골의 굴뚝과 기차를 바라본다. 그 기차는 그날 도쿄로 가는 마지막 기차라고 한다. 카메라는 천천히 기차의 움직임을 수평적으로 좇는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료들을 조감(鳥瞰)으로 차갑게 찍었던 이전의 쇼트들과는 대비된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