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북서울미술관에 들렀다. 전시는 다소 실망스러웠고, 윗층에 미술 관련 서적이 있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들러 보았다. 예술 관련이 아닌 책들도 다양하게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들어와서 펼쳐 보았다. 그런데 약간 놀랄 만한 이름이 나와서, 도서관에 들르면 책을 빌려서 다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사실 이 책은 제목을 『IMF 키즈의 생애』라고 지으면 안 됐다.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한영인 씨의 글을 잠시 가져와 본다. 

 

“물론 저자가 의식하듯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사건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런 ‘결정론’에 붙박일 필요는 확실히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사건과 개인 사이의 상호 조응하는 측면까지 무시해도 좋다는 건 아니다. 이 책은 ‘IMF 키즈’라는 도발적인 개념을 내걸었지만 사회-문화-경제적 변동을 가져온 거시적 사건과 그 토대 위에서 펼쳐온 개인의 삶 사이의 조응관계를 설득력 있게 구조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이 책은 실패인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IMF 키즈라는 개념에 굳이 얽매일 필요가 없다면 이 책은 내 또래의 개인적 역사와 삶의 고민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통찰과 깨달음도 적지 않다. 이 글의 제목을 “‘IMF 키즈’는 아니지만 괜찮아”라고 단 이유다.”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들의 가정이 IMF 금융 위기에 대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가정은 아니라고 술회하고 있다. IMF로 가정경제의 상황이 크게 변화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는 아주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생각해도 이들을 IMF 키즈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역시 이들은 IMF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변동을 체험한 세대일까. 

 

책 앞에 실려 있는 밥 제솝(Bob Jessop)의 말이었던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관련 책을 쓴 지주형의 말이었던가. 정확히 인용하기는 어렵지만 위기의 시기 대응의 전략은 이후 사물이 움직이는 방식을 오랫동안 규정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기에 이 책은 IMF 이후 사물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진단과, 사물들의 새로운 배열은 개인의 미시적 생애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그 평가에 대해 그다지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IMF는 공통의 세대 경험인가? 

 

그럼에도 이 인터뷰집은 성실하게 몇몇 공통의 세대적 경험을 희미하게 그려낸다. 포착한다고 표현하기는 조금 주저되는 것이, 별로 방점이 찍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잠깐 생각나는 것은 90년대 이후 다양해진 교육의 기회이다. 이를테면 ‘황광우 키즈’였던 김남희 씨. 잠시나마 열린 어떤 가능성의 공간으로서의 민족사관고등학교. 그러고 보면 하자센터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교육 공급의 창구가 다양해지고 논술이든 주산이든 각자 학원들이 소비자들에게 저 나름의 이유로 호소하던 것에 보통의 학부모들이 기민하게 발맞추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저 좋다니까 보내거나’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학원이라는 레퍼토리), 아이들이 한다니까 보내거나. 돈 없어서 못 시켜주겠다는 것은 좀 그렇고 어쨌든 공부(교육)은 시켜야겠으니 아이들 요구는 들어줘야하는 그 상황이 몇몇 사람들 삶의 분기점이 된 것 같아 자못 흥미로웠다. 

 

 

눈여겨본 부분은 특히 김남희 씨와 김괜저 씨의 인터뷰이다. 

 

‘’정치 운동’이라는 경력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능력과 경력은 다른 세계로 좀처럼 호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운동’에 방점을 찍고 한정된 일을 불안정한 상태로 계속하기보다 ‘정치’에 방점을 찍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그가 말한 ‘우클릭’을 내 식대로 풀어 써보면 이렇다. (161쪽) 

 

‘호환’이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본다. 적실한 말인가? 좋은 표현인가?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와닿았다. 우선 일반적으로 보면 호환되지 않는 경험들이 많기 때문에 다들 실패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도전은 안전한 것들에 국한된다. 토익 점수라거나 한국사 자격증이라거나… 

 

그럼에도 정치 활동이나 운동에 대해서만 본다면, 그런 류의 활동들은 그 영역 바깥의 사람들에게 자주 에누리되어 평가되는 경향이 또 있는 것 같다. 사실 운동 경험이야말로 이것저것 다 해볼 수 있는 실무 경험임에도 말이다. 

 

 

그다음 숫자로 제일 두드러지는 건 법대나 의대를 노리고 한국에 들어오는 경우예요. 처음에는 그런 현상이 되게 실망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각자의 케이스로 보면 각자 결정인 거니까 실망스러울 일이 아닌데, 전체적으로 봤을 땐 실망스러운 결과. 그런데 저 역시도 나름의 고민을 거치고 친구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듣고 하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각자의 입장에선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 거죠. 어쨌든 각자가 다 나름대로 타고 있던 궤도가 있을 것이고 거기서 그 결정을 하기까지 뭘 거쳤을지는 (타인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인데, 나는 그저 ‘실망스러운 결과다’ 하고 있었으니 스스로가 되게 미웠어요. 그래서 요즘은 정말 진심으로 여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않아요. 그렇게 진로를 바꾸었던 본인들도 예전과 지금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몇 년 전에는 의대나 법대, 경영대에 들어간 친구들이 절 불러내서 “넌 재밌는 거 하는 애니까 네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어” 이랬는데 이제는 그런 게 진짜 없거든요. 각자 분야의 전문가로 만나니까 훨씬 좋아요. (215-16쪽)

 

다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직장을 얻는 기회를 미국 정착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214쪽) … [미국에 정착한 친구를 만나며] 이 친구는 조국의 미래고 뭐고 하는 압박을 다 털어낸 줄 알았어요. 난 그냥 미국 왔으니까 여기에 동화돼서 살 거야, 이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별 갈등 없이 거이에 필요한 것만 하며 살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만나보니까 이 친구도 같은 갈등을 했고, 결정만 달랐던 거예요. (216쪽). 

 

흥미로운 지점. 왜 민사고 학생들은 미국에 가서 정착하고 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미국에 남아서 생활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민사고 학생들은 ‘모두의 기대를 받아’ ‘광명성처럼 쏘아올려졌다’고 김괜저 씨가 글에서 쓰지 않았던가? 학교가 되었든, 지역사회가 되었든, 파스퇴르 기업이 되었든, 아니면 가장 넓게는 민족(네이션)이 되었든, 사회의 지원과 기대 속에 가장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사실 나고 자란 공동체에 대한 완전한 절연(絶緣)인 미국에 정착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흥미롭다. 가서 남는 것이 능력 입증과 민족 중흥의 길이라면,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이들은 누구일까? 어떻게 민사고 몇몇 학생들은 그 기대를 내면화했을까? 

 

 


 

2000년대 초의 성장 서사 

 

“2학년 때인가? 학교에 ‘모둠일기’라는 수행평가용 사이트가 만들어졌어요. … 거기에 그때쯤 이해찬 식 교육의 영향도 있고 해서, ‘입시가 다원화된다’ ‘논술 비중이 높아진다’ 이런 식으로 학교에 설득을 하기 쉬웠을 것 같아요. 

… 그리고 그 주에 잘 쓴 일기를 수업시간에 같이 읽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약간 매체처럼 된 거죠. 그때 제가 대박이 난 거죠. … 쓰다 보니 재미도 있고 조회 수도 판타지 연재할 때보다 훨씬 높고. 

… 그런 동기가 있으니까 가끔은 수행평가 기준을 넘겨서 심할 때는 하루에 한 번씩 정말 일기처럼 쓰기도 하고. 그게 저한테 가장 큰 게 됐어요. 선생님들도 저를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고. 또 평소에는 서로 이야기를 안 했는데 모둠일기 사이트를 통해서 알게 되는 친구들이 생겼죠. … 그때 외로움이 많이 해소됐어요.” (299쪽) 

 

읽으며 웹툰 여중생A가 생각났다. 

 

“연평도로 부대를 옮긴 뒤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해진 시기에 알게 된 ‘책마을’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 공개 커뮤니티가 아니라 군의 인트라넷 비공식 게시판이었고 기본적으로 서평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 무엇보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어쩔 수 없이 군복과 부자유에 매여 있을 뿐 실은 전혀 다른 배경을 지닌 ‘고수’들을 만난 것이 제대 후까지도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정말 글 잘 쓰는 친구들도 많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책마을은 단순히 병장 시절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제대 후의 새출발에 앞서 자신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영화 일에 필요한 ‘공부’에 대한 적극적인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315쪽)

 

책마을은 공군 인트라넷 게시판으로 나는 알고 있다. 학교 동아리에서 예전에 조영일 비평가 초청 강연을 열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동아리원 아닌 어떤 분이 오셨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일화를 들었다. 공군에 있을 때 누군가 책마을에 조영일 비평가와 김영하 소설가의 인터넷 상 논쟁을 올려서 그걸 열심히 읽었는데 알고보니 그거 올린 분이 당시 동아리원 K였다나. 디테일은 좀 다를 수도 있는데 아무튼. 내가 알기로는 박가분 씨도 책마을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링크 http://weekly.khan.co.kr/khnm.html?artid=201104141053261&mode=view) 2011년 초인가에 폐쇄되었다고 하는데, 위에 얘기한 사람들의 학번을 감안할 때 그 뒤로도 몇 번 살아남았던 것 같다. 지금은 있으려나? 

저자가 책에서 여러 차례 역시 언급하고 있는 앤 스위들러의 매우 영향력 있는 논문인 “Culture in Action” (Swidler, 1986)는 문화를 “연장통(toolkit)”로 보기를 제안한다. 스위들러는 논문 초반부에서 “빈곤문화 The culture of poverty” 담론에 대해 논하며, 빈곤문화론의 한계는 문화를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이 내면화한 어떤 특별한 행위의 목표(ends) 내지는 가치로 정의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빈곤층들 역시 다른 계층들이 지향하는 성공, 안락함, 가족적 가치 등을 부인하지 않고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를, 마치 전철수switchman처럼 행위의 방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어떤 ultimate goals나 value로 보는 대신, 행위 전략을 구성하는 데에 쓰이는 습관, 레퍼토리, 스타일 등으로 보는 관점이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스위들러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지방대생 역시 “수도권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성공이라는 가치를 공유한다.” 맞다. 그런데 한편 나는 이렇게도 지적하고 싶다. 역으로, 지방대생들이 수도권 학생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성공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을 비틀어, 수도권 대학생 역시 지방대 학생들처럼 가족의 안녕과 행복이라는 소박안 가치를 공유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스위들러가 말하듯이, “People profess ideals they do not follow, utter platitudes without examining their validity.” (ASR 51(2) p.280.) 미친 극한의 생존주의 뿐만 아니라, 소박한 행복과 안녕 역시 한국 사회에서 널리 공유되는 보편적인 가치이며, 사람들의 삶의 목표로 종종 언급하는 platitudes다.  

여기서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이를 추구하기 위해 행위를 조직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84) 

이에 대해서는 의심을 좀 많이 덧붙이고 싶었다. 적어도 과연 그들이 가용한 행위 스타일이 인서울 대학생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까, 라는 측면에서. 지방대 학생들 역시 토익을 보고,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휴학을 하고 영어 공부를 한다. 이것을 자기계발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책에 나오는 지방대생들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주체가 과연 아닌지, 반문하고 싶었다. 책에서 묘사된 지방대 고학년 재학생들 학생들이 취업 준비 등으로 했던 약간의 스펙 쌓기, 공무원 시험 준비가 흔히 말하는 인서울 대학생들과 얼마나 크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그리고 이는 바꿔 말해서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생존 경쟁에 쫓기는 대학생들의 상이 또한 실제로 얼마나 현실과 들어맞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방대 생활로부터 내면화되거나 습득하게 되는 행위전략 내지는 습관, 스킬이 아님을, 2부 4장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 같다. 2부 4장을 읽으면서, 최종렬 교수가 지적한 ‘적당주의’, 느슨한 스타일, 가족주의, 겸연쩍음은 지방의 구조적 여건에서 비로소 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지방에서는 일반 소규모 사업체에 취직하면 물론 어렵지만,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이 문제가 없는 직장들이 많다. “사회복지 법인, 영어학원, 대학 연구소, 사회적 기업, 시민단체가 그 예다”(264). 지방에서 “적당주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도 큰 무리”가 없는 이유는 “가족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267). 그러나 이런 가족 혹은 유사-가족의 뒷받침은 역으로 제약이 되기도 하는데, (유사)가족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자본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성장하며 습득한 아비투스 역시 영어와 같은 문화자본을 축적하는 데에 제약이 된다. 영어 공부를 한다고 휴학을 하지만 그것이 단기간에 되기 어려운 것이다(282). 그렇다고 지방대생들에게는 졸업장이라는 공인된, 제도화된 문화자본 역시 다른 자본으로 변환되기가 매우 어렵다. 지방대 졸업장 자체가 사징권력이 없고 legitimate하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방대 졸업생들에게 보이는 것은, “가족의 인정을 추구하는 집단주의와 자신의 감각적·쾌락적 경험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의 “혼재”이다(261). 둘 모두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스위들러 식으로 볼 때 (특히 settled time에서) 이런 ‘가치’는 어차피 모두가 중요하다고 일단은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열악한 객관적 조건”, “사회자본과 문화자본의 한계”(286)이다. 

이 책에 대해 여러 비판이 쏟아진 맥락은, 지방대생들의 ‘습속’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편견이 엿보인다거나 지나치게 ‘대상화’하는 것 같다고 우려를 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오히려 ‘지방대적’ “적당주의”를 발현시키는 것은(?), 혹은 적당주의를 존재케 하는 것은 가족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지방의 부족한 사회연결망, 사회자본과 문화자본의 한계라는 물적이고 구조적인 여건이 아닐지라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복학왕의 사회학』을 2부 전까지만 읽고 든 의문들 


# 신자유주의 통치성? 

(1) 
저서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란 개념은 무엇인지 갸우뚱해진다. 우선 책의 내용에 충실하자면,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만드는 것이고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금욕주의적 에토스를 갖고 삶을 통째로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합리적으로 구성하고 조직”하는 이다(85쪽). 그런데 이는 푸코나 푸코를 따르는 학자들이 논의하고 있는 주체들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에서 말한 행위자의 이미지에 더 가까워 보인다. 

과문하지만,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제시된 통치성 개념을 이어받는 논의들은 금욕하고 자신을 규율 속에 가두며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주체라고 이야기했다기보다는, 노동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고 생애에 있을 수 있는 리스크를 탄력적으로 관리하는 이들이 신자유주의 주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이 지금 시대에 “품행의 인도”로서 통치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자유주의의 통치성으로부터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의 이행 과정은 곧 복지국가의 축적 전략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자크 동즐로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회적인 것의 경제적인 비용 절감”을 위해 담론과 통치 테크놀로지들의 배열, 작동 방식이 변화한 과정인 것이고. 이런 점에서, 기존 연구들의 맥락을 따져 봤을 때 『복학왕의 사회학』 저자가 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왜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불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양보해서?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그냥 자기계발하는 주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꼭 거기서 통치성이라는 화두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통치성이라는 게 국가 영토 내의 인구 관리, 보건, 안전 보장, 리스크 매니징이라는 주제에 대한 푸코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개념인데 왜 자꾸 자기계발의 영역에서만 논의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통치 테크놀로지들을 논하지 않는다면 굳이 푸코 가져와서 쓸 필요 있나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창조성,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업가적인 노동자들의 상은 스튜어트 홀이나 데이비드 하비가 포스트 포디즘의 축적 양식 이야기하며 자주 들었던 것이기도 하고.) 


(2) 
한편, 책 속의 대구 지방대 재학생들의 인터뷰를 찬찬히 봐도 그들의 언술로부터 그들이 “동물” 혹은 “속물”(김홍중)이 아니라는 결론이 곧바로 따라나오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우선 책의 논의대로, “성찰성을 도구적으로” 쓰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워홀 가고 토익 준비하는 지방대 학생들을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도 그들이 속물이라거나 자기계발 주체라거나 성급하게 결론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보다 지방대 학생들과 인서울 대학생들과 서로 차이가 많지 않을 수도 가능성을 제안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마 저자라면 ‘성찰적 겸연쩍음’이나 ‘적당주의’의 에토스를 내세워서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적당주의 에토스는 실제로 지방대생들이 그런 걸 내면화해서라기보다는 교수와 대면하고 있는 연구 상황 자체 때문에 발현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인서울 대학생들과 인터뷰해도 비슷하게, 악착같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의 이미지가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통치성이라는 게 주체가 내면화해야 비로소 작동하는 것인지는 다른 이론적 논의가 되겠다.) 

김홍중을 끌어들여 더 이야기하자면, 그가 『마음의 사회학』에서 동물과 속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온 계기는 80년대 ‘진정성’의 소멸 이후 한국 사회를 설명하고자 하는 동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 그러니까 지방대생이 속물이냐 아니냐, 속물이라기에는 너무 가족과 유사-가족 관계의 사람들을 아끼고 소박하게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들 아닌가 하는 것들 이외에도 지방대생들이 어떤 80년대의 ‘진정성’이 아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질문이 있어야 온당하다고 본다. 


(3) 
다른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신자유주의 통치성과는 약간 무관하게, 자기계발과 ‘게임의 규칙’에 대한 지방대 학생들의 인식이다. 

예컨대 적지 않은 수의 지방대 학생 혹은 졸업생들은 군대에서 ‘고학력자’(SKY, 인서울 대학생을 칭한다)를 만난 경험을 life-changing experience로 들고는 한다. 이를테면 명문대생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잘난 이유는 꼼꼼해서라든가 비전이 있어서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들과 자신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그려진 청년들의 상과 비슷하게도 보인다. 더 파고들면 이야기할 거리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잘 다루어지지 않고 찾아보건대 오찬호의 위 책 인용도 한 번 정도에 그치는 것 같다. 비록 적은 수의 재학생이지만, 아무튼 인터뷰는 귀중한 경험이다. 기존의 청년 담론들을 좀 더 상세하게 살피고 인용했다면 더 중요하고 재밌는 것들을 물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신간 <엘리트 독식 사회 Winners Take All>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서평을 번역. 

 

 

Meet the 'Change Agents' Who Are Enabling Inequality 

https://www.nytimes.com/2018/08/20/books/review/winners-take-all-anand-giridharadas.html

 

 

이제는 무시할 수 없게 된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불러온 지난 20년 동안 악화된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를 묘사하는 책들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나서 세계화를 다룬 두꺼운 학술서들(인정하건대 내 것까지 포함해서)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들은 서구 국가들이 지금의 이런 불공정성을 부추긴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혀 주저함 없이 추구한 바를 상세히 다뤘다. 

 

그렇다면 다음의 새로운 장르도 기대할 법하다. 그런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대 기업인들을 부드럽지만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책들 말이다. 엘리트들은 시스템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컨퍼런스에서 술잔을 한 손에 쥔 채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고 상투적인 말들만을 이야기하며 지금 우리의 비뚜름한 경제적 현실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뉴욕 타임스의 전직 칼럼니스트인 아난드 기리다라다스(Anand Giridharadas)는 아스펜(Aspen) 인스티튜트 컨퍼런스에서 이 현상에 대해 연설을 했는데, 이제 그는 흥미로워 보이는 신간 “엘리트 독식 사회Winners Take All”에서 이 아이디어를 더욱 심화시키고자 한다. 민주당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분투하고 세계의 선동가들이 흥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세계가 겪고 있는 이 위태로운 전환으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세계화, 기술, 그리고 시장 자유화가 수혜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는 것이—적어도 미국과 전세계의 선진국 대부분 사람들에게만큼은—이제 명백해졌으니 말이다.

 

세계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본인들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박애주의 정신을 가진 유력 부유층들과 열정 있는 “사회 변화의 지도자”들에게 지금이 이 악화되는 딜레마 속에서 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반추할 좋은 때가 될 것이다. 이번 여름 휴가 햄프턴에서 그들이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이 특권층의 일부인 여러 개인들을 각각 다룬 장들에서, 기리다라다스는 그들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는 0.001%의 사람들이 자신의 행태를 어떻게 합리화하는지를 폭로한다. 새클러 가문은 미국 오피오이드 위기에 기여했음에도 중요한 대의를 위해 돈을 대고 있다. 시나본의 최고 경영자는 그녀의 회사가 파는 음식의 지방과 설탕의 구성 성분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회사가 끼치는 해악을 벌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파워 포인트 프레젠테이션과 무해해 보이는 선의들의 세계이다.

 

기라다라다스는 이 세계에 만연한 에토스를 “마켓월드”라고 부르는데, “마켓월드”는 무언가 “잘 하고 좋은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아스펜과 다보스, 그리고 최근까지 존재했던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스의 언어를 우아하게 포착해 낸다. 마켓월드는 “윈윈”이나 “변화를 만든다”는 기분 좋은 클리셰들로 가득 차있는 세계이다. 마켓월드 군중들의 이런 틀에 박힌 대화들은 최근 뉴욕 퍼블릭 시어터에서 상연된, 브루스 노리스가 쓴 연극 “The Low Road”의 제2막 시작 부분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기라다라다스가 마켓월드의 에토스를 그리는 바에 따르면, 마켓월드는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민중들의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있지만, “엘리트들의 죄를 고발하거나, 권력의 재분배와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하거나, 지금 엉망이 된 세상에 관해 약간의 느낌이라도 가져볼 수 있게, 금권 정치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남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하는” 데에 그들은 무능하다. 

 

살을 빼기 위해 적게 먹는 것만 빼고 무엇이라도 할 다이어터처럼, 비즈니스 세계의 엘리트들은 소셜 임팩트 투자,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박애자본주의, 인공지능, 시장에 의해 주도되는 문제 해결 방식을 써서 세계를 구하려고 한다. 게임의 규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는지 질문하지 않는 대신, 아니면 더 나아가 지금의 왜곡되고 비효율적이고 불공정한 규칙들이 만들어 내는 해악을 줄이기 위해 그간의 행동을 고치는 대신, 그들은 그때그때 유행하는 상투어로 이루어진(buzzwordy) 프로그램에 수백만 달러의 펀드를 댄다. 옳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윈윈 멘탈리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실제 희생을 수반할 것이다. 그것을 감수하는 대신 개인적 관심이 있는 프로젝트나 변화의 ‘이니셔티브’에 집중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기는 하다. 기리다리다스가 말하듯이 사람들은 “평소에 하던 일을 좀 더 명예로운 방식으로 하는 대신 고결한 주변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 한다. 

 

엘리트들이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모두에게 최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경제를 일구기 위해서 마켓월드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법인세와 소득세를 지불해야 할 것이고, 노동자들에게 적정한 임금(decent wages)를 지급해야 할 것이고, 노동조합의 설립을 허가해야 할 것이고, (차터 스쿨charter school에 돈을 대는 대신) 퍼블릭 스쿨에 돈을 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개인 부담 형식의 건강 보험을 지지해야 할 것이고 금융 개혁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사다리의 아랫 부분이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경제적으로 평등한 현실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높으신 분들 자신들이 만들어냈고 역시 그들에게 혁혁한 보상을 안겨 준 이 새로운 경제적 현실을 기념하는 다보스나 다른 국제 회의에서, 기업 리더들은 아무런 무리 없이 기후 변화와 점증하는 불평등과 금융 불안정성의 위험을 논의하는 세션으로부터 억만장자와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을 축하하고 탈규제 안건들을 환영하는 디너 파티로 유유히 이동한다. 편리하게도, 그들은 경제의 중간층을 이루는 대다수에게 세금이 올랐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미 미국에서 기대수명이 짧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300만 명 정도에게 적용되는 건강 보험을 폐지하려는 공화당원들의 시도에 대해서도, 커져 가는 환경 오염에 대해서도, 새로운 금융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례 없이 커져가는 기업의 부도덕한 양심 없는 행위에 대해서도(웰스 파고Wells Fargo의 사기든 폭스바겐의 배출 조작 사기이든) 그들은 침묵한다. 인지 부조화는 마켓월드에 내재해 있다. 

 

기리다라다스는 이렇게 자원을 잘못된 곳에 쓰는 것이 엄청난 기회비용을 낳는다고 옳게 말하고 있다. 마켓월드 사람들이 사회 질서의 닳아 빠진 주변 부분을 고치는 데에 애쓰는 시간과 돈은 정말로 실제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데에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미국이 다음과 같은 정치적 전투의 전장임을 고려할 때, 즉 대부분의 연방 대법원 판사들과 의원들이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독점적인 권력을 강화시키고, 헬스 케어에 대한 접근을 약화시키고 여성의 재생산권을 부정하는 식으로 미국의 경제·정치 시스템에 대한 규칙을 다시 쓰려고 하는 이 때 그것은 특히 중요하다. 

 

마켓월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는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신봉하는 것이 사실이 그러하듯이 문제를 더욱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책처럼 보이게 되었다. 저자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요인 중 하나는 아첨꾼들인 “지식소매상thought-leader”인데, 그들은 금권 정치가들로 하여금 빈민에 대해 더 생각하게끔 유도하나 절대로 금권 정치가들에게 직접 도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금권 정치가들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마켓월드의 문제 접근 방식이 실제로는 책임 회피 구실이지만 그렇지 않고 채택할 만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역사학자인 낸시 맥린(Nancy MacLean)의 “쇠사슬에 묶인 민주주의Democracy in Chains”라는 새로 나온 다른 책은 이기적인 이데올로기들이 퍼질 수 있는 위험한 방식들에 대한 좋은 교훈들을 보여 준다. 

 

“Inside Philanthropy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캘러한(David Callahan)이 최근의 책 “기부자들: 새로운 도금 시대에서의 부, 권력, 그리고 박애정신”에서 한 것처럼, 기리다라다스 역시 그가 쓰고 있는 마켓월드에 자신을 위치지었다. 그리고 캘러한처럼, 기리다라다스는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글을 쓴다. 언뜻 보기에 그는 두 가지 층위를 오가며, 즉 약삭 빠르고도 섬세하게 글을 쓰는데, 종국에 그는 한 계급 전체, 풍자하기는 쉽지만 개혁하기는 어려운 계급에 대해 통렬한 초상을 그려 내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고치려는 현실의 이 문제들이 매우 다루기 힘들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기리다리다스는 세상을 바꿀 처방책을 제시하는 대신 책의 마지막 문장들을 정치학자 키아라 코델리(Chiara Cordelli)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우회한다. “타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권리는, 간단하게, 권력이 있는 시민에 의해 행해질 때 부당한(illegitimate) 것이 된다.” 좀 더 분명한 결론이 내려진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럼에도 코델리의 말은 이 책의 진정한 교훈을 가리킨다. 그것인즉슨 미국을 특징짓게 된, 민주주의와 높은 불평등은 그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상류층은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쓸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바로 멋모르는 엘리트들이다. 본인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끽해봤자 그들은 문제의 주변부만을 손대고 있으며,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미미한 수정만을 가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시스템은 그래왔던 것처럼, 방해 받지 않고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이상을 모두 말해 준다. “세상을 바꾼다는 엘리트들의 가식(Charade).”

2019년 7월 5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관람. 

## 한국영상자료원의 이번 기획에서 아키라를 튼다고 하길래 시간을 꼭 내서 가 보았다. 일본 거품경제의 상징 격인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뭐다 하는 말들 말이다. 정말로 그런가? 가서 봤는데 버블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굉장했다. 이런 애니메이션은 앞으로 더는 나오지 않겠지. 배경 설정과 스토리도 그렇지만 작화에 대한 감상이다. 앞으로 없을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말하자면 이런 슬픔이다. 예컨대 컨트리 음악을 듣고 싶다면 아직도 컨트리 음악을 발표하고 부르는 가수들이 있기 때문에 뭐 괜찮다. 재즈 빅 밴드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이다. 서부극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컴퓨터 그래픽을 거의 쓰지 않은 애니메이션은 앞으로 만들어질 일이 없지 않은가. 

## 그런데 영화를 줄곧 따라가다보니 이상하다고 느낀 점들이 많았다. 전개의 엉성함이라고 부를 것들이 있다. 원작 만화를 보면 그런 의문들이 부분적으로 해소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봤으니 원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아마도 긴 원작을 영화로 만들다 보니 커트해야 할 부분이 있었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원작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보기에는 그런 편집으로 인한 성긴 전개가 상당히 기묘한 분위기를 이끈다는 것이다. 관람객을 존중하지 않는 불친절한 전개는 상당히 실험적이고 종종 전위적인 느낌을 줬던 것 같다. 사운드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절제된 배경음악의 사용은 의도된 것인가? 배경음악의 부재 위에 단속적으로 나타나는(예컨대 테츠오가 폭주할 때) 효과음은 자칫 피로해질 수 있는 극의 전개에 긴장감을 잘 불어넣은 것 같다. 

## 악몽처럼 테츠오를 짓누르는 열등감과 원한 의식이 극을 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를테면 테츠오가 네오 도쿄를 여자친구 카오리와 탈출하고자 하는 장면. 카오리는 다른 폭주족 갱들에 의해 강제로 성추행 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이 장면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몇몇 신처럼 시각적으로 매우 불쾌하고 충격적이다). 이것은 테츠오가 카네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가 더욱 불안정해지고 파괴적이어지는 결정적 사건이 된다.  

여기서 테츠오의 여자친구 카오리와 카네다의 여자친구(?) 케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재미있는 것은 두 여자 모두 외양이 굉장히 남성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남성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쪽은 케이인 듯하다. 케이는 저항집단의 일원이기도 하고, 카네다의 장난스러운 구애를 거절한다. 때로는 카네다를 구해 주기도 한다. 가슴이 드러나는 카오리와 달리 그녀는 여성성을 노출하지 않으며 항상 트렌치 코트를 싸매고 있다. 요컨대 폭주족 세계에서 테츠오의 여자친구 카오리는 케이에 비해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할 수 있다. 

## 어떻게 본다면 아키라라는 인물 혹은 배양 세포는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 아키라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영화 후반부에서는 일종의 활력론 내지는 생기론과 비슷한 알쏭달쏭한 관점이 제시된다. 즉 그것은 어떤 힘 같은 것인데 인간들에게 잠재되어 있고 그것이 적절히 계발되지 못하거나 폭주할 만한 인간에게 소유되면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네오 도쿄의 올림픽 스타디움 아래에 보관되어 있는 아키라의 잔해는, (극중 독재 치하의 일본과 올림픽이라는 대중 동원 행사의 맥락을 포개어 볼 때) 파시즘을 발동시킬 수 있는 광기나 에너지의 은유로 읽힐 수 있을 듯도 하다. 다만 그것은 아직 동면 상태에 있으며 그래서 에너지는 빛이 렌즈를 통하듯 한 곳으로 모아지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간헐적으로 분산되어 분출되는 것이다. 극중에서세밀하게 묘사되는 아키라를 광신하는 사이비 종교나 도시의 공공 장소에서 남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젊은이들은 부글부글 끓는 에너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아키라와 세기말 분위기의 네오 도쿄가 가지고 있는 정치성이 완전히 탈각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사회를 조직하는 에너지는 사회를 조직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어떤 방향성과 가능성을 가진다. 영화 중반까지는 아키라와 초능력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쟁점들이 엿보인다. 예를 들자면 정부 내각 회의에서 아키라 관리 비용을 더 들여야 하는지 대신 그것을 대중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복지에 써야 하는지 하는 논쟁이 있다. 대중들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거나 데카당스에 빠지는지 하는 원인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무튼 『아키라』에서 사회는 그러한 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아키라의 힘은 테츠오라는 개인에 의해 사적으로 전유된다. 아키라라는 힘은 방향성을 잃고 폭주한다. 흔히들 ‘세카이계’라고 부르는 작품들이 풍기는 분위기를 『아키라』에서 느낀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였다. 영화의 말미에서 말그대로 테츠오는 자가증식하는데, 마치 거품과도 같이 돔형으로 커져 간다. 지름이 늘어나는 원에는 방향성이 없다. 아주 개인적인 학창 시절의 괴롭힘과 주변 폭주족 친구들과의 비교로 인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던 테츠오의 기억과 원한은 점점 커져가며 네오 도쿄를 포획한다. 테츠오의 사적 감정은 곧 (사회가 아닌) 세계가 된다. 

사실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다. TV판 『에반게리온』을 봤을 때처럼 약간 김이 샜다고 하나. 테츠오 너의 에고 트립이 궁금한 게 아닌데. 아무튼 테츠오가 폭주하면서 죽게 되는 몇몇 인물들이 있다. 거기서 사망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 명이었는데, 테츠오의 여자친구 카오리였다. 그녀가 극에서 약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때는 앞에서도 말한 성추행 신과 마지막의 사망 신이다. 그녀는 일종의 토큰으로서 소비되는 셈인데, 이 자체는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테츠오의 개인적 감정은 폭주해 그 자체가 부풀어 네오 도쿄가 되고 곧 세계가 된다. 그 세계가 내쳐야 하거나 혹은 반대로 속으로 꼭꼭 감추고 숨겨야 하는 것은 곧 테츠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여자친구 카오리이다(테츠오는 그녀가 아닌 케이를 가지고 싶어할 것 같다). 그렇게 세계의 끝에 여자친구가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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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ss, Justin Van and Erika Summers-Effler. 2016. “Reimagining Collective Behavior.” Pp. 527-46 in Handbook of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edited by S. Abrutyn. Springer. [집합행동을 다시 생각하기]

 


요약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는, 합리적 행위 개념을 기반으로 한 집합행위(collective action) 이론의 득세에 의해 오래 전에 길을 내어 준 집합행동 이론의 지혜와 통찰을 최근에 발달된 인지적 사회과학 이론과 결합해 다시 이해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집합행위이론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화가 이루어졌으나 집합행동에 관해서는 일반적 이론화가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합행동에 대해 맥파일(McPhail)과 로버트 파크 등은 굉장히 일반적인 정의를 내놓았는데, 보통 집합행동은 합리성을 짙게 함의하는, ‘사회 변동을 이끄는 집합적인 행동’(=collective action)만이 아닌 덜 조직된 우발적인 모임들, 즉 제도 외부의 행동(extrainstitutional behavior)까지 포함한다. 
    초기 집합행동 연구는 심리학적 측면에 초점을 많이 맞췄다. 사회학적 접근은 개인의 심리적 동기나 군중의 심리적 동학이 아닌 집합행동을 촉진시키는 외부적, 제도적, 조직적, 환경적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럼에도 저자는 집합행동연구가 다양한 이론적 관점과 세부 분야가 접합도리 수 있는 유망한 분야라고 말하고 있다.
    집합행동이론의 주요 고전은 프랑스 학자 귀스타프 르 봉의 <군중The Crowd>이다. 르봉에 따르면 군중은 통제하기 쉽지 않고(invincible), 군중들은 외부적 요인에 영향받기 쉽다(suggestible). 이런 군중에 대한 이해는 로버트 파크, 가브리엘 타르드, 프로이트까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한다. 상징적 상호작용 전통의 허버트 블루머는 사회적 불안(social unrest) 속에서의 상호작용과 의미, 세계관 형성을 강조한다. 사회적 불안은 기존의 사회질서가 수용할 수 없는 새로운 충동이나 성향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런 이들은 모두 “변형 가설transformation hypothesis”, 즉 군중의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집단적 감정에 지배받는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래 전에 기각된 이들의 이론이, 최근의 연구들에 의해 많은 부분 지지된다는 것이다.
    위의 이론가들 말고도, 군중을 공통된 성향 체계나 내적 충동을 가진 개인들의 집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는 위의 변형 가설을 기각한다. 군중에 특유한 멘털리티라는 것은 없고, 군중의 행동은 이완된 긴장을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공통된 이해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단순히 개인 차원으로 설명을 끌어 내렸다는 비판도 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테드 거(Ted Gurr)의, 학습 이론을 결합한 상대적 박탈 테제(deprivation thesis)인데, 행위자의 상대적 인식/위치에 따라 그가 느끼는 박탈의 정도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위의 견해와는 또 다르게 블루머의 학생들—터너와 킬리언—은 군중들이 사실 다양한 동기와 감정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집합행동은 여기서 루틴화된 행위가 아닌 협상된, 발현된 질서로 정의된다. 재난 등의 일상적이지 않은 심각한 상황에서 군중이 생기고 모임(gathering)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발언이나 임시적인 의견을 모으는 그룹(assembly) 등의 의견 교환 기회가 생기게 된다. 이런 견해는 최근 사회연결망 연구에서 많이 채택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견해는 루머를 잘못된 정보들이 유통되어 영속화되는 것으로 보는 대신, 루머의 상호작용적 기능, 발현에 주목한다. 이런 견해에서 어떻게 기존 사회의 환경이나 생태학적 요인들이 집합행동의 협상적, 발현적 질서를 촉진시킬 수 있는지 연구를 할 수 있는데 자오(Zhao)의 천안문 당시 학생 운동 연구가 대표적이다. 
    고프먼 등의 통찰을 받아, 모임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바탕으로 집합행동의 ‘생애 주기 관점’을 이해하는 관점도 있다. 즉 모임을 모임 과정(process), 모임 자체, 그리고 분산(dispersal)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올리버(Oliver)는 집합행동 모이기 이전에 기회(occasions)들이 있음을, 즉 참여자들이 계산과 궁리를 하는 기회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집합행동 이전 기회들에서 집합행동의 전략이나 구조가 느슨히 만들어진다. 
    또한 억압이 동원을 촉진하는지, 못하게 하는지에 대한 연구들도 존재했다. 억압은 집합적 정체성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Khawaja). 그의 연구에서 흥미롭지만 덜 이론화된 것은, 도덕적 기준을 침해하는 억압은 방관자들을 참여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셰프(Scheff)의 “수치심/분노 나선”에 따르면, 공포는 동원을 줄일 수 있지만 분노는 동원을 더욱 촉진시킬 수 있다. 
    구조의 긴장(strain) 역시 중요하다. 찰스 틸리는 “붕괴 이론”(사회 운동은 규범의 붕괴, 빠른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사회적 통합을 줄임)과 “연대 이론”(잘 조직된 사회에서 더 운동이 많이 일어난다) 사이를 견주어 볼 때 붕괴 이론이 별로 증거가 없다고 논했다. 그러나 어심(Useem)은 붕괴 이론이 쓸모가 있다고 논함으로써 자원동원이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구조적 긴장의 심화와 더 많은 규범의 붕괴는 권위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수 있다. 스노우 등(Snow et al.)은 일상생활에 주목하여, 일상생활이 방해받으면 루틴을 회복하기 위해 행위자들이 노력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최근의 인지심리학, 인지사회과학 이론을 통해 집합행동 이론의 통찰을 되살릴 수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사실 합리주의적 운동 이론가들이 생각했던 거보다 초기의 이론가들이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째로 이중과정모델(DPM)은 일상생활에서는 인간이 스키마적인 기억(schematic memory)를 사용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새로운 환경에는 다른 인지 전략 즉 규칙에 기반한(rule-based)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논했다. 따라서 상황이 어떻게 규칙 기반한 사고를 촉진하는지 미시사회학적 접근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면 이런 상황에서 행위자들이 만드는 새로운 의미와 규칙들이 퍼져나가고 전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Killian, Turner의 이론은 여기서 적실하다). DPM 이론은 프레임 정렬의 중요성을 또한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발현적 규범이 생기고 이것이 개인의 역사적 이해와 충돌할 때 개인의 이해는 집단의 동학이나 집단의 컨센서스에 따라 부화뇌동할 수 있음을 몇몇 연구들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둘째로 거울 뉴런의 작용과 전염(contagion)이라는 은유는, 집합행동의 초기 이론가들이 “정신적 통합”, “사회적 촉진”이라 부른 현상들을 포괄할 수 있다. 거울 뉴런이 활성화됨에 따라 집합행동이 구성원들이 타자의 행위나 감정을 모방하는 것이 촉진될 수 있다. 거울 뉴런의 연구 성과는 왜 감정이 전염처럼 퍼지는지 보여준다. 셋째로 최근의 인지과학은 감정이 합리적 사고의 필요 조건이고, 우리의 많은 행위가 몸의 습관이나 감정 반응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이후 연구가 (1) 몸이 사고에 끼치는 중요한 영향을 간과하지 말고, 몸의 위치를 집합행동 이론에 다시 돌려 놓는 것을 지향해야 하고 (2) 집합행동이 공간과 시간의 동학에 맞추어 어떻게 조정되는지 이론화해야 하고 (3) 행위자의 동기를 합리적 선택 뿐만이 아닌, 다른 새로운 다양한 방식으로 이론화하여야 한다고(e.g. 연대[뒤르켐], 자아의 확장[Summers-Effler]) 주장한다.